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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동네에는 1권 (19화)


히어로들의 온갖 능력이 동원되어 보안을 유지하고 있으며 소문으로는 A급 이하의 능력자는 침입자에 대한 보안 시스템이 발동하는 순간 죽음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능성을 배재할 수는 없지.’
세상에는 정말 기상천외한 능력을 가진 능력자들이 많이 존재했고 그들의 능력 중 서버 침투에 특화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 확률은 극단적으로 낮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러한 이유 탓에 지금 장원삼에게는 한 명 더 감시해야 할 존재가 생긴 상황이었다.
바로 이선영.
현재의 경기 지원 본부장으로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뛰어난 실력과, 미모, 그리고 착한 마음씨로 회사의 유명 인사 중 한 명이던 그녀.
비록 불의의 사고로 능력을 잃기는 했지만 그녀의 평소 인망과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경기 지원 본부장이라는 상당한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 그녀가 장원삼의 감시망에 오른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신태일의 업무 내용에 변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았다는 점. 그게 수상하다.’
분명 태일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은 그동안 꾸준히 업무 할당량이 늘어 왔을 것이다.
하지만 태일은 그동안 언제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을 터.
그런 데도 불구하고 그냥 방관만 하고 있었다는 것이 바로 그녀의 혐의였다.
‘정말 위험하군. 경기 지원 본부장이면 타 지원 본부본부장과 공적으로는 같은 위치지만 사실 한 수는 앞서는 지위야. 그런 위치의 사람도 첩자라면 그보다 상위의 간부가 첩자 아니라는 법은 없지. 좋아, 이와 관련해서도 보고를 해야겠군.’
어제 태일과의 대면에 있어서는 돌아오자마자 보고를 마친 상태였다.
사실 내용을 따지고 보면 그의 위장이 간파당했다는, 본인의 경력에 오점을 남기는 보고 일 수도 있었지만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자존심이야 어쨌든 일은 일. 그에게 일을 맡긴 사람은 그의 보고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같은 시각 보고 내용을 받은 사람은.
“벌써 발각되었다고? 음. 내용만 봐서는 발각은 아닌 거 같은데……. 이 녀석 또 피해망상증이 도진 건가? 뭐 어쨌든 녀석의 눈썰미가 상당히 좋다는 정도의 정보는 되었지만, 굳이 이렇게 장황하게 쓸 필요가 있는 건가. 이 녀석 일 열심히 하려는 건 좋은데 그냥 며칠에 한 번씩 중요 내용만 종합해서 보내면 되잖아. 내가 실시간 보고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말이야. 열심히 하는 것 갖고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어휴.”
그와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 * *

뚜득. 뚜드득.
“음, 좋아. 오늘은 베스트 컨디션이군.”
어제 공짜 저녁을 먹은 탓인가도 싶지만 잘 생각해 보면 어제도 일한답시고 밤을 새우긴 했지만 사실 그 사건 이후로 딱히 한 게 없어서 아침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학교나 가 볼까.”
내 기억으로 오늘은 상당히 널널한 전공과목과 교양의 조합이었다.
뭐 전공과목이 어떻게 널널하냐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 듣는 전공과목의 경우 교수님이 특이하게 학기 초와 학기 중간에 했던 과제로 시험을 대체한다고 공지한 탓에 사실상 이미 시험이 끝난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교양 과목의 경우 역시 그간 해 온 과제를 통해 평가한다고 해 시험 준비 같은 건 필요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중요하지 않은 공부가 없으니 만큼 오늘 강의들도 중요하긴 하지만 출결로 점수를 까먹지 않기 위해 학교에 간다고 봐도 무방했다.
어떤 교수든 교수한테 안 좋은 이미지인 건 학점에 도움이 안 되니 말이다.
적당히 이불을 개고 적당히 개어진 옷들 사이에서 옷을 찾아 적당히 평범한 코디와 더불어 몇 가지 학교 가기 전 의식을 마치고 가벼운 마음으로 학교를 나섰다.
그렇게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학교를 향해 나섰다.

“오빠!”
덥석.
단번에 가슴 한 켠이 무거워졌다.
‘대체 어떻게 알고 나를 찾아오는 거니, 넌?’
이런 질문이 목구멍까지 솟아올랐지만 함부로 질문을 내뱉지는 않았다.
왠지 답변을 들으면 무서운 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어, 그래. 무슨 일이야, 오늘은……?”
“에엑? 오빠, 우리가 언제 무슨 일 있어야 만나는 사이였어?”
‘우리는 서로 이름 안 것도 며칠 되지도 않았어! 아니, 그보다 우리가 무슨 사이인데?’
뭐, 굳이 사이를 정의하자면 매달리는 여자와 헤어지고자 하는 남자 정도?
……라고 하기엔 애당초 만나거나 사귄 일이 없어 표현이 부적합하다라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표현을 하자면 이게 가장 알맞은 거 같았다.
“그래, 어쨌든 무슨 일인데?”
“우, 너무해!”
“나 오늘 전공과목이야. 빨리 가야 해.”
물론 제시간에만 가면 오늘 강의야 널널할 테지만.
하지만 전공이라는 마법의 단어는 대학생들 간에 인정받는 단어.
그 어떤 약속도 무력화할 수 있는 엄청난 마법의 단어였다. 그리고 이것은 남녀 사이에도 어렵지 않게 먹히는 기술이었다.
“치, 알았어! 오늘은 점심만 먹고 가지 말고 같이 저녁에 영화 한 편 보는 게 어때? 나 영화표 생겼어!”
밝은 모습으로 영화표 두 장을 꺼내 든 그녀는 내 앞에 살랑살랑 표를 흔들면서 유혹하듯 말했지만.
“안 돼.”
단칼에 거절해 줬다.
“에엥? 왜!”
“알바 가야지.”
“그 경비일 저녁 늦게 하는 거라면서!”
‘편의점 알바에 대해서는 말을 안 해 줬던가?’
생각해 보니 특별히 그런 기억은 없는 것 같다.
처음 물어 봤을 때는 그냥 알바를 한다고 알려 줬지만 나중에 듣게 된 것은 경비업체 직원이라고 소개한 이선영 본부장의 말뿐이었으니 말이다.
“아니야, 그거 말고 나 저녁때는 편의점 알바도 하거든.”
“엥, 진짜?”
“그래,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지.”
“혹시 귀찮아서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내가 뭣하러,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실 이 몸인데.”
물론 진짜로 마시지는 않겠지만.
혹시 모르지 않겠는가, 양잿물도 받아다 두면 어딘가에는 쓰게 될지. 옛날 사람들은 빨래를 할 때 썼다는데 나도 그렇게 쓸지도 모르고.
“흐응…….”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올려다보는 시선이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지만 나는 거짓말한 게 없으니 당당했다.
그렇게 한참을 노려보던 은빛은 내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그때서야 팔짱을 끼고 시선을 돌렸다.
“뭐,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네. 이번엔 특별히 믿어 줄게.”
‘애당초 거짓말이 아니야, 뭘 이번만 믿겠다는 거야?’
“그럼 일하는 편의점이 어딘데?”
“아, 우리 집 앞에 있는 편의점인데…….”
더 이상의 실랑이를 피하기 위해 나는 그냥 내가 일하고 있는 편의점의 정보에 대해 나불나불 불기 시작했다.
‘근데 굳이 이런 것도 알려 줘야만 하는 건가?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다시 한 번 우리 둘의 관계에 관한 의문이 떠올랐지만 어차피 저번에 집주소도 알려 준 경력이 있는바.
이 정도쯤이야 문제될 것이 없다는 판단하에 그냥 모든 것을 알려 주었다.
위치, 업무 시간, 업무량, 같이 일하는 알바생이라든지.
별 생각 없이 나불거리던 말들이었지만 나는 그때까지 오늘 저녁 나에게 펼쳐질 일에 대해 꿈에도 몰랐다.

그렇게.
오후 6시가 다가왔다.
딸랑.
“안녕하세요.”
“오, 오늘도 정확한 출근이구만.”
“네, 집도 가까우니까요.”
“하하, 옛날에 학교 다닐 때 보면 꼭 집이 가까운 애들이 지각을 하곤 했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서 좋은 거 같아!”
“네, 꼭 그런 애들이 있었죠.”
언제나처럼 북적거리는 저녁이 될 게 빤했지만 점장과 나 사이에 대화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뭐, 먼저 와 있는 사람 중에 전혀 대화에 끼지 못하는 사람도 한 명 있었지만.
정확히 여섯 시가 되면서 점장님은 바쁘게 자리를 뜨셨고 어느새 다시 계산대에는 나와 어제 새로 온 알바생, 김상원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오늘따라 유달리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보면서 어제 경험해 본 피크 타임에 위력에 위축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먼저 말을 건넸다.
“상원 씨?”
“……왜 그러시죠?”
내 부름에 돌아온 것은 날카로운 눈초리와 음울한 대답뿐이었지만 나는 최대한 웃으며 대화를 이끌고자 했다.
물론, 성공했다곤 안 했다.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쏘아보던 김상원은 나를 다시 한 번 찬찬히 훑어보고는 물었다.
“오늘 팬티 색이 무슨 색이시죠?”
“……네?”
순간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직장 내 성희롱? 특이한 성적 페티시즘이 있는 페도필리아? 아니면 애당초 성 정체성이…….
엄청난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 최대한 현실적인 상상을 했다.
‘그래 겨우 팬티 색을 물어본 거잖아? 혹시 학과가 속옷 디자인과 관련하다든지, 그런 쪽의 공부를 할 수도 있는 거고. 애당초 두 번 얼굴을 본 사람 앞에서 커밍아웃을 한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그래, 그런 거야.’
나는 순간 굳어 버린 얼굴을 풀고 편히 대답해 주었다.
“음. 제 기억으론 검정색이네요.”
“사이즈는요?”
“사이즈요? 이게 제가 알기론 스판이라 프리 사이즈로 알고 있는데…….”
“스판에 프리, 검정색이라…….”
내가 말함과 동시에 어디서 꺼낸 것인지 수첩에 내가 말한 것을 쭉 받아 적는 그를 보면서 나는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에 안도했다.
‘그래, 저 모습을 봐. 학구열에 불타는 대학생의 모습이잖아? 지금 물어본 것은 그냥 표본조사 같은 걸지도 몰라. 내가 너무 과민반응한 거라니까.’
뭐, 미리 이유를 알려 줬다면 오해 없이 대답을 해 줬을 수도 있었을 거란 생각을 하면서 그가 수첩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적고 있는 본인의 생각은 달랐다.
‘젠장, 이 녀석. 보통내기가 아니군, 보통 속옷 색 같은 걸 대놓고 물어보면 무언가 특별한 반응이 있어야지 않나? 원래 이렇게 순순히 알려 주는 거야?’
솔직히 말하면 장원삼은 태일의 속옷 색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물론 이런 것도 나름 정보에 심리학적으로 따져 보면 뭔가 건질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적고는 있지만 그가 목적했던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
그저 이미 자신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을 태일이 자신의 이런 물음에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기에 물어본 것이었다.
뭐, 예를 들어 화를 낸다든지 혹은 이런 자신을 비난하거나 이미 다 알고 있는 주제에 등의 표현, 또는 행위를 통해서, 녀석이 내뱉는 말들을 활용해서 베일에 가려진 정체와 숨기고 있는 바를 유추하고자 한 행위였다.
뭐, 겨우 그런 걸 가지고 어떻게 알 수 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누가 뭐래도 이런 일에 전문화된 특수 요원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물론 평소라면 이런 무식한 방법은 사용하지 않을 테지만 이미 정체까지 어느 정도 드러난 만큼 거칠 게 없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부분이 있다면 녀석이 너무 순순히 대답을 하는 것이다.
그 탓에 평정심을 잃고 그는 내친김에 수위를 높여 사이즈까지 물어봤지만 이 역시도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모습을 보면서 순간 장원삼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 녀석은 바보인 것일까? 순진해 빠진 건가?’
순간 자신이 첩자로 잘못 생각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외로 정답에 근접한 생각까지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어제 녀석이 보여 준 눈썰미는 결코 범인은 흉내낼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지. 굉장히 고도로 훈련을 받아야만 가능한 기술. 나도 그만한 눈을 갖기까지 실전 경력 오 년은 필요했다고. 그렇다면 이 녀석은 천재인가? 그래, 애당초 수많은 능력자들이 득시글거리는 회사에 사람을 잠입시키려면 웬 만한 머리로는 불가능하겠지. 지금 이 녀석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분명 무언가 더 노리는 바가 있는 거야.’
장원삼의 머릿속에서 태일이 신격화되어 가고 있는 사이, 시간 멈추지 않고 다가와 멀뚱멀뚱 장원삼의 행동을 보고 있던 태일을 덮쳐 오기 시작했다.
딸랑딸랑.
‘벌써 시작인가?’
시계를 보니 약 오 분정도 빨리 시작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삑, 삐비빅! 삐삐삐빅!
순식간에 계산대에 쌓이는 물건과 내밀어지는 카드와 현금들, 그리고 눈에 띄게 줄어 가는 진열대의 물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