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지금 우리 동네에는 1권 (20화)
그 끝이 없는 일의 행렬에 편의점은 폐허가 되어 가고 몸은 피폐해졌다. 하지만 정신만은 맑게 유지하기 위해 옆의 상원 씨의 일처럼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오 분을 일찍 시작했으니 오 분 일찍 끝날 거야.’
어차피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의 수는 큰 변동이 없다.
그렇다면 먼저 사람들이 와서 물건을 사 가지고 간다면 나중에 가서는 그만큼 사람들이 줄어드리라.
‘그래! 긍정의 힘은 위대한 법, 그 힘 덕분에 조금 전 김상원의 이상 행동에 대해서도 오해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잖아?’
만약 긍정의 힘이 없었다면 결코 쉽게 넘어갈 수 없었을 테지.
하지만,
어째서인지 손님이 줄지 않는다.
삼십 분이 지나도 한 시간이 지나도, 두 시간이 지나도!
삑삑삑삑…….
“사천삼백 원입니다.”
‘어째서?’
손과 입은 쉬지 않고 일을 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으론 이 기이한 현상에 대해 분석하고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학생층은 이미 빠져야 할 시간이야.’
여섯 시로부터 두 시간이 더 지난 지금은 학생이 몰려오는 시간이 아니라 빠져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학생들은 이 시간이라면 학원 혹은 학교의 야간자율학습 시간으로 어딘가에 묶여 있어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유달리 많다. 그것도 여자의 비율이!’
직장인들의 수도 그렇다.
본래 이 시간쯤이면 샐러리맨들은 모두 집에 가야만 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확실히 ‘맨’들은 빠졌어!’
지금 시야에 보이는 것은 모두 여자!
간간이 남자들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슬리퍼 차림에 목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들을 보니 집에서 뭐하다가 나왔는지 보일 정도. 그에 반해 지금 여기에 모여 있는 여자들은 학생, 직장인을 불문하고 여기저기 찍어 바른 얼굴에 한껏 차려입은 옷차림으로 편의점 내부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대체 이 상황은?’
나는 물품의 진열대를 쭉 훑어보면서 여성을 매혹시킬 만한 물건이 새로 들어온 게 있나 확인을 해 봤지만 바뀐 것은 전혀 없었다.
아니, 최근에 바뀐 물품 자체가 없으니 굳이 훑어볼 필요조차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편의점 내부에 존재하는 모든 장비와 시설도 마찬가지.
그 어떤 것도 여성의 이목을 끌만한 것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 이곳에 바뀐 것은……!
‘사람!’
그렇다. 최근 바뀐 것은 오직 사람! 바로 알바생 둘!
하지만 나 스스로도 잘 알다시피 나의 경우 특이 취향의 몇몇을 제외하면 이성의 관심을 끌 만한 비주얼은 결단코 아니었다.
아니, 관심은 끌되 남녀노소 구분 없이 내 덩치에 호기심을 표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삑삑삑―!
“삼천백 원입니다.”
입과 손으로 연신 계산을 하면서도 자연스레 눈이 내 옆 계산대를 향했다.
띠띠띠!
“현금 영수증 필요하신가요?”
“아, 아뇨.”
일을 시작하기 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잔뜩 굳은 얼굴로 연신 계산을 하고 있는 김상원이 보였다.
그리고 훤칠한 키에, 옷에 가려졌지만 섬세하게 길러진 근육질 몸매, 갸름한 얼굴에 잘 어울리는 적당히 굽이친 파마머리까지. 흔히 아는 미남의 모습이 함께 보였다.
‘결론 났군.’
저토록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손님을 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만을 표하는 손님은 없었다.
아니, 사실 알바 표정을 보고 대놓고 불만을 표하는 손님은 평소에도 없지만 그 어떤 기분 나빠하는 기색조차 비치지 않고 오히려 계산을 하는 그를 보며 입을 달싹거리는 여성들을 보아하니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갔다.
‘편의점의 잘생긴 알바를 보러 몰려오는 손님들이라.’
상투적인 스토리지만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왜냐? 여긴 대학교 근처의 자취촌이니까!
사실 이 동네 사는 대부분의 젊은 남녀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대학생들일 것이다.
게다가 특정 대학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니만큼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는 사람들 역시 모인다. 그들에게 있어 서로의 얼굴은 평소에도 자주 보는 같은 학교 다니는 사람의 얼굴로 인식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동네에 난데없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남이 편의점 알바로 등장했다면?
관심이 모일 수밖에 없는 상황.
뭐 남자들이야 잘생긴 남자가 동네에 들어오든 말든 별로 상관없을 테지만 핑크빛 대학생활을 꿈꾸었을 여대생들이 대학교에 들어와서 느낀 배신감 덕분에 잠을 못 이루며 외로운 밤을 지새울 때, 느닷없이 나타난 미남 편의점 알바생은 분명 그녀들 사이에서 충분한 화젯거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대학교 근처에 살면서 잘생긴 대학생 오빠들에 대한 핑크빛 환상을 꿈꾸다가, 대학가 근처에 산다는 이유로 남들보다 빠르게 현실을 깨닫게 된 이 동네의 중고생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이런 괴현상이 벌어진 것이겠지.’
다들 어디서 그렇게 소문을 듣고 왔는지 그 행렬이 끝이 없어 보였다.
조금이라도 상원의 얼굴을 더 보려고 열심히 물건을 고르는 이들은 최대한 계산대 정면에서 물건을 고르기 위해 사투를 벌이다가도 다들 계산대 앞에 서면 순한 고양이가 되어 제대로 말도 못하고 입만 달싹이다가 계산을 하고 사라지곤 했다.
‘뭐, 사람이 많아지긴 했지만 나한테 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결과적으로 손님이 많이 늘어나긴 했지만 한참을 계산해 보니 나에게 오는 건 차마 상원의 계산대 앞에 서기엔 용기가 부족한 남자 손님뿐이었다.
평소랑 다를 바 없이 바쁜데도 불구하고 왠지 일을 덜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실제로도 덜 하고 있는 게 맞았다.
워낙에 많은 여자들이 편의점을 채우고 있어서 밖에서 눈치 보며 서성이다 발걸음을 돌리는 몇몇 손님이 보였으니 말이다.
‘이런 현상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뭐, 나쁘지는 않네.’
일이 줄어들었는데 어찌 나쁠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런 갑작스런 여자 손님의 증가는 당연하게도 일시적인 증가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금을 최대한 즐기며 활용할 수밖에.
이런 나를 치사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남보다 적게 일하고 같은 돈을 받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 만인의 꿈 아니겠는가?
‘일 안 하고 돈을 버는 게 궁극적이긴 할 테지만.’
그런데 이때.
딸랑.
편의점 문에 달린 종이 맑은 소리를 내며 울리자 편의점 문에서 가까운 사람들부터 동심원을 그리듯 점차 고요함이 퍼져 이내 시끌벅적하던 편의점을 조용하게 만들었다.
이유는 제각각이었는데 남성들은 경외 혹은 감격이 담긴 눈빛으로, 여성들은 극도의 긴장감, 그리고 경계가 담긴 눈으로 방금 들어온 한 여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번엔 또 뭐지?’
사실 손님이 누가 오던 나야 물건만 찍어 팔면 되니 상대가 돈만 있다면 상관없지만 이런 극적인 변화를 이끌어 낸 사람에 대해서 궁금증이 생겨 시선을 돌렸다.
바닥부터 천천히 올라간 시선 끝에는 예쁜 신발을 시작으로 잘 빠진 새하얀 다리를 따라 한여름에 잘 어울리는 시원한 핫팬츠가 눈에 띄었다.
거기에 더불어 잘 짜진 몸매를 과시하는 얇은 소재의 반팔 티까지, 정말 자신의 매력을 잘 아는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시선을 조금 더 올리자.
눈이 마주쳤다.
“…….”
“…….”
씨익.
나와 시선이 마주침과 동시에 길게 웃어 보이는 예쁜 얼굴을 보면서 나는…….
스윽.
시선을 회피했다.
저벅 저벅 저벅―
우뚝.
그녀의 발걸음 소리, 그리고 흐르는 식은땀.
“…….”
“…….”
지금 내 앞에 서서 내 눈을 올려다보려고 무진 애쓰는 게 보이지만 나는 즉시 고개는 비딱하게, 시선은 하늘에 두고 현실을 부정했다.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손님?”
“…….”
우리의 기묘한 대치를 바라보던 상원이 먼저 내 앞에 서 있는 손님에게 말을 건넸지만 돌아온 것은 침묵뿐.
그런 그녀의 태도에 편의점에서 상원의 계산대 앞에 벌써 삼십 분가량 물건을 고르고 있는 몇몇 여성들이 ‘감히 저분 말을 무시해?’라는 함축적 의미를 담은 표정과 따가운 시선을 쏘아 보냈지만 나의 고개도, 내 앞의 손님의 시선도 바뀌지는 않았다.
덥석.
작고 부드러운 두 손에 얼굴이 잡혔다.
꽈아아악!
허공을 향하는 얼굴을 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맘먹고 힘을 준 내 목은 오 톤 트럭이 잡고 끌어도 쉽게 아래를 향하게 할 수 없었다.
끼잉! 끄응!
안간힘을 쓰는 목소리가 정적을 깨는 가운데 나는 더 이상 이 대치 상황을 끌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느닷없이 그런 걸 깨달았는가 하면 하늘을 향하고 있던 내 시야에 CCTV가 보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점장님이 이 꼴을 보게 할 수는 없지.’
지금의 상원효과로 보건대 아마도 점장은 오늘 분의 CCTV 녹화 내용을 반드시 틀어 볼 것이라 장담했다.
‘그리고 이 모습도 보게 될 테지.’
이런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나로 인해 판매가 멈춘 것을 보이는 게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쓰윽―
아직도 내 목을 내리기 위해 용을 쓰는 그녀를 향해 머리를 내렸다.
“오빠!”
“그래, 내가 네 친오빠는 아니지만 나이로 따지면 오빠가 맞지. 그러니까 그렇게 크게 안 불러도 된다.”
지금 네 한마디에 얼마 되지도 않는 남자손님들이 나를 적대하기 시작했다는 걸 네가 알았으면 좋겠는데. 무리겠지?
일단 최대한 담담한 척은 하고 있지만 난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도를 생각해 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 일단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어필하자.’
“은빛아, 나 일하고 있어. 지금 못 놀아 줘.”
“누가 놀아 달래? 나도 손님으로 온 거야, 물론 온 김에 오빠랑 얘기도 할 생각으로 왔지만.”
선전포고에 가까운 그녀의 말에 직감적으로 이걸 주제로 말을 더 이어 가면 자가당착에 빠질 확률이 높음을 깨달았다.
‘……일단은 계산대에서 떼어 내자.’
“그럼 일단 물건부터 골라 와. 계산해 줄게.”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뒤를 눈짓으로 가리키자 잠시 고개를 돌린 은빛은 그때서야 뒤에 선 사람들의 존재를 깨달았다는 듯 조금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계산대에서 몸을 뗐다.
“헤헤, 그럼 일단 나도 물건 좀 골라 올게.”
“그래.”
그 말을 끝으로 진열대를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일단은 몰린 사람들을 해결하고 보자.’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
“…….”
“…….”
그래, 관두자.
제자리에 망부석마냥 서서 은빛만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건대 아마 계산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릴 듯싶었다.
내 계산대야 어찌 되었든 은빛이 자신들의 경쟁자가 아닌 것에 안도한 다른 여자 손님들은 다시 상원을 향해 구애를 펼치고 있었다.
‘그냥 바라만 보고 우물쭈물하다 돈 내고 나가는 것도 구애라면 말이지…….’
하긴 여기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도 처음 만난 사람한테 첫눈에 반했다느니, 사귀자느니, 그런 고백을 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할 테니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어필을 하면 저런 답답한 모습이 연출되지는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저런 경우는 부담스럽지만.’
“으흐흥, 흐흥. 오빠랑 먹을…… 응?”
나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친 은빛은 방금 집어 든 과자를 손에 쥐고 나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그리고 느껴지는 적의!
‘우웃! 이건 나이트메어 이상!’
몇 되지 않는 시선이었지만 지금 느껴지는 이 강렬한 적의는 그간 싸워 왔던 나이트메어들보다도 강한 힘이 느껴졌다.
그리고 개중에는 살의로 변질되는 것도 있었으니, 그 강렬한 시선의 주인을 찾아 눈을 돌리니 단번에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이 주변에 공대가 있었다는 것을 깜빡했군.’
내가 알바를 시작한 이래로 매일 밤 먹을 것을 찾아 편의점에 오던 공대생들의 시선은 그야말로 지금 당장 나를 갈아 마시고 싶다는 눈빛이었다.
이런 웃지 못할 상황에 내심 한숨을 쉬면서 그런 그들의 시선을 피해 전체적인 편의점 내부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줄은 서 있지만 움직이지 않는 내 앞의 남자 손님들, 계산은 하고 있지만 편의점 내부 인원에 비해 턱없이 진행이 느린 상원 쪽 계산대의 상황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