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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동네에는 1권 (21화)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할 필요성을 느꼈다.
‘민간인에게 힘자랑하는 건 싫지만…….’
푸화확―!
순식간에 내 몸을 중심으로 낮은 기세가 편의점 내부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것은 뜨거운 기류이자 열풍으로 편의점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해졌고 다시 한 번 편의점에 정적을 몰고 왔다.
그리고 내 특유의 뜨거움을 담은 기세는 극도로 낮춘 위력에도 불구하고 즉시 효과를 나타냈다.
“어휴, 더워, 갑자기 왜 이렇게 덥지?”
“으, 찝찝해.”
“여기 에어컨 없나?”
금세 편의점은 더위에 호소하는 소리로 가득차고 각각 상원과 은빛을 향한 시선을 거둔 채 연신 흐르는 땀을 훔치거나 옷자락을 펄럭이며 편의점을 나서기 위해 계산대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좋아! 잘 먹혔군.’
고르던 물건까지 놓고 편의점에서 나가는 사람들과 들고 있던 물건만 가지고 곧장 계산대 앞에 줄을 잇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계획이 성공했음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불굴의 의지로 본래의 자리를 고수하는 이들이 존재했지만 좀 전에 비하면 그야말로 극소수에 불과한 정도라 별문제는 없어 보였다.
‘뭐, 그 극소수에 은빛이도 포함이 되어 있긴 하지만…….’
나는 기세를 퍼뜨릴 때 오직 옆 계산대에 있는 상원을 재외하고는 얄짤 없이 편의점 내에 모두에게 공평하게 기세를 날려 주었다.
계획대로라면 그녀로부터 ‘오빠, 오늘은 안 되겠다. 먼저 갈게’라는 대답을 듣고자 했지만 상황을 보아 하니 그렇게는 힘들 것 같았다.
그래도 그녀에게 시선을 주고 나에게 적의를 보내느라 혈안이 되어 있던 남자들이 금세 자리를 떠난 것은 다행히라고 할 수 있었다.
최소한 그녀와 마주하고 있는데 부담은 덜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얼추 편의점 내부를 정리한 다음에야 나는 풀던 기세를 슬그머니 회수했다.
‘혹시 냉장 식품 중에 상한 건 없겠지?’
나름 약하게 한다고는 했지만 예상 밖으로 높은 효율을 보여 준 기운 탓에 평소라면 굳이 신경 쓸 필요 없는 냉장 식품까지 검사를 했지만 방금 있던 상황을 계속 몸으로 때우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쉽고 마음 편한 일이었다.
상한 물건을 찾다 보니 조금 녹은 초콜릿이 만져져서 흠칫하긴 했지만 다행히 많이 녹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하며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내가 그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은빛은 이내 내가 자리에 돌아오자 싱글벙글하며 내 앞에 과자며 음료수를 내려놓았다.
“헤헤, 오빠. 일 열심히 하네?”
“응? 으응…….”
결단코 내가 더위를 불러일으켜서 물건이 상했을까 봐 걱정스러워서 그런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어차피 말해도 안 믿을 테지만.’
“헤헤, 편의점 알바도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 오빠.”
“그, 그래?”
“우선 이거 계산해 줘.”
나는 그녀가 물건을 받아 계산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야?”
“응? 아까 말했잖아. 오빠 보려고 왔어.”
“……그래?”
“응! 오빠, 오늘 알바 끝나면 같이 시원하게 맥주 한잔 어때?”
“시원하게 맥주?”
한여름 밤, 열대야 속에 몸을 누이면 생각나는 시원한 맥주라는 마법의 단어가 나의 이성을 뒤흔들었지만 나의 이상과 달리 내 주머니 속 지갑과 그녀와의 관계는 현실이었기에 승낙할 수 없었다.
사실 요 이틀간 그녀와 한 점심 식사도 상당히 무리한 지출이었으니 이 이상의 낭비는 위험했다.
“아, 아냐. 됐어.”
“엥? 왜?”
왜냐고 묻는 물음에 차마 돈이 없어서 라고 답을 못한 이유는, 돈이 없다는 게 부끄럽다든지 하는 것을 떠나 내가 돈이 없다고 하면 카드를 꺼내 들 은빛의 성격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 그래서 그런 거다.
순간 기가 막힌 변명거리가 떠올랐다.
“그, 그래! 오늘 새벽에 또 알바 가야 하거든.”
“에? 무슨. 아! 그거?”
“그래! 그거!”
주어가 없는 우리의 대화였지만 서로가 잘 알아들었고 상대 역시 납득하는 듯했다.
“우웅, 그건 어쩔 수가 없네…….”
“그래! 아무래도 일이니까.”
“그럼. 오늘 일하는 거 보러 가면 안 돼?”
“안 돼! 절대! 네버!”
내 3단 절대 부정어 콤보에 울상짓는 은빛을 보면서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게. 아무래도 위험하고…….”
“위험한 일 하는 거야?”
“아니, 일이 위험한 거라기보다……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거지. 아, 그리고 아무래도 보안도 중요한 일이다 보니까…….”
“흐응…….”
이어지는 내 변명에 잠시 내 눈을 바라보던 은빛은 이내 수긍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휴우, 그래, 잘 생각했어.”
“응? 뭐야, 그 안도의 한숨은?”
순식간에 눈을 치켜뜨며 나를 노려보는 은빛의 모습에 나는 재빨리 변명을 끄집어냈다.
“아니야, 안도라니? 그냥 네가 위험한 일을 하려고 할까 봐…….”
“그으래?”
다시 한 번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던 은빛은 이내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네. 오늘은 먼저 가야겠다.”
‘됐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목표 말을 끄집어 낸 기쁨에 작게 주먹을 움켜쥔 나는 계산대 밑에 가려진 리액션과 달리 정말 아쉽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이거 정말 아쉽네, 일부러 찾아와 줬는데…….”
“정말 아쉬워?”
“그럼 물론이지.”
“그으래? 그렇단 말이지?”
내 대답에 묘한 반응을 보이는 그녀를 보며 실수한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지만 이내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생각은 계속되지 못했다.
“자, 이거.”
그녀는 방금 내가 담아 준 물건 속에서 에너지 드링크 두 캔을 찾아서 나와 상원 앞에 하나씩 놓고 말했다.
“매일 밤에 일하느라 힘들잖아. 마셔, 같이 알바 하시는 거죠? 하나 드세요.”
“……네? 아, 아닙니다.”
혼자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상원은 갑작스런 은빛의 말에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지만 막무가내로 그의 손에 음료수를 쥐어 주는 은빛 덕에 결국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먼저 갈게.”
한 손에 과자가 잔뜩 담긴 봉투를 들고 활기찬 모습으로 편의점을 나서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조심히 가라고 배웅해 준 뒤 한숨을 쉬며 자리로 돌아왔다.
“……저기. 누구시죠?”
“응? 아, 학교 후배…… 요.”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곧장 질문을 던진 상원은 내 대답에 기묘한 것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여자 친구 같아 보였는데…….”
“그게. 후, 말하자면 긴 사정이라. 아, 그 음료수 안 마실거면 억지로 마시지 않아도 돼요. 취향을 고려하지 않은 선택이니까.”
“네? 아니요. 그런 건 아니지만 지금은 별로 마시고 싶지 않으니 가지고 가죠 뭐.”
그 말을 끝으로 우리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좀 전의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후 편의점은 그야말로 고요에 잠겨 있는 상태였다.
나는 지친 정신을 달래기 위해 계산대 뒤에 마련된 의자에 기대어 앉아 눈을 감고 있었고 상원은 무슨 생각이 그리도 많은지 팔짱을 낀 채 미동도 없이 생각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까의 소동 탓인지 사람도 없고 고요한 가운데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새 12시, 퇴근 시간이 돌아왔다.
‘음, 매장 정리는 이만하면 된 거 같네.’
사람에 비해 팔린 물건이 적은 탓에 크게 진열할 물품이 없어서 매장 정리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다음 알바생이 오기 전까지 지저분하던 매장을 깔끔하게 치우고 정산한 나는 오늘도 무사히 업무 인계를 할 수 있었다.
“오늘도 수고했어요. 내일 뵈요.”
“네, 수고하셨어요.”
그렇게 상원과 헤어지는 것을 끝으로 길었던 하루 일과를 마친 나는 다시 시작한 하루의 시작을 위해 골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저 녀석, 대체 뭐하는 녀석이지?’
집으로 향하는 태일의 뒤를 미행하는 상원, 아니, 장원삼은 고민했음에도 답을 도출하지 못한 질문은 다시 한 번 속으로 떠올렸다.
오늘 알바를 하면서 물어봤던 것에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진짜로 완벽하게 교육받은 첩자이거나 혹은 멍청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까 일어난 괴현상―상원 효과―에 대처하기 위해 녀석이 사용한 그것은…… 분명 녀석의 능력, 불을 다루는 특성에 의한 능력일 것이다.
녀석은 결국 대놓고 자신의 능력을 사용한 것이다.
녀석이 자신을 얕잡아 본 건지는 몰라도 대놓고 사용한 탓에 놈이 사용하는 기운을 정확히 포착했고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일정 공간을 점거해 버리는 기세, 약하긴 했지만 분명하게 특성을 드러내며 공기 중에 퍼져 나가던 그 기운, 그럼에도 자신 주변만을 완벽하게 피해서 기운을 퍼트리는 섬세한 컨트롤, 그것은 결코 C급의 히어로가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는 A급 히어로들이라도 특성에 따라 어려울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본인의 기세, 기운을 퍼뜨리는 것은 숙달된 능력자들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 기세를 끌어올리는 것은 일종의 기합이었고 그것을 터뜨리는 것은 상대를 위협하거나 상대를 흔드는 데 있어 효과적인 기술이기에 보통 C급의 숙달된 히어로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기합, 위협, 흔들기에 적합한 기술이지 결코 오늘의 태일과 같이 주변에 쏟아 내어 천천히 압도하거나 특수한 효과를 만들어 내는 그런 기술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한 기술은 A급 전투 요원들에게 조차도 어려운 기술임에 틀림없었다.
애당초 강한 힘을 더욱 강하게 사용하는 것에 혈안이 된 그들이 저토록 섬세한 능력의 활용을 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물론 이 역시도 능력이나 조건에 따라 개인 편차가 많이 있겠지만 최소한 장원삼, 그가 봐 온 A급 능력자들은 단 한 번도 그런 식으로 능력을 활용하지 않았다.
전투 요원들에게 있어 기세는 한 번에, 강하게 뿜어내는 것이라는 상식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 고도의 기술을 사용하는 태일의 모습은 결코 멍청하지 않았다.
아니, 천재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엄청난 능력자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아까 그 여자는…….’
장원삼은 손에 든 에너지 드링크를 바라보면서 오늘 들이닥친 여자들 속에서도 단연 눈에 띄던 그녀를 생각해 냈다.
정확한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여자였지만 그녀의 미모는 물론이고 오늘의 행동을 통해 대략 성격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충분히 활달하고, 행동을 보아 하니 그녀는 적극적으로 태일에게 다가가고 있었으며 옆에서 본 바로는 태일 역시 마음이 없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리고 장원삼의 고민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녀석, 첩자잖아?’
명색이 첩자 임무를 받은 녀석이 여대생과 짝짜꿍 연애를 한다?
물론 아직 연애를 하는 단계는 아닌 것 같았지만 둘이 하는 모습을 보건대 그 일이 멀지 않은 미래에 있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 그녀가 나타나 느닷없이 태일과 접촉하는 모습을 보고 접선을 위해 나타난 또 다른 첩자는 아닌가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행동들에서 첩자라고 생각 여지는 부족했다. 나중에 혹시 서로 간에 수상한 말을 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자세히 들어 봤지만 남녀간 있을 수 있는 일상적인 대화 수준밖에는 되지 않았다.
‘중간에 그거라는 일을 한다는 수상한 말이 있기는 했지만…….’
내용 자체는 문제가 되는 것이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
‘그 여자, 민간인이잖아?’
그 역시 나름 오랜 경력을 지닌 히어로로서 그들 간에 통용되는 몇 가지 상식과 암묵적인 규칙에 관해 빠삭하게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리고 그중 히어로들의 연애에 관해서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히어로들은 결코 민간인을 애인으로 두고자 하지 않지, 본인 혹은 상대가 상처받기도 쉽고 위험할 뿐만 아니라 평생 비밀을 지키기 어렵다는 점도 있어.’
물론 예외도 언제나 존재하는 법이지만 최소한 태일이 첩자라면 이런 상황은 피하는 게 맞았다.
애당초 민간인 연인을 ‘등록’한다면 당연히 주목받을 수밖에 없고, 이는 첩자인 태일 본인의 발목을 잡는 행동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등록 자체가 눈에 띄는 행위이니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첩자로서 활동을 하는 거라면 당연하게도 회사 내부의 사람을 택해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장원삼은 태일이 이선영 본부장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한 바 있었다.
평소 지원 본부 사무실에서 두문불출하는 이선영 본부장이 그를 만나기 위해 최근 예정에 없는 외출을 몇 번 감행했을 뿐 아니라 근래에 전화 통화도 자주 있는 편이었다.
물론 이 부분에 관해서는 모두 이유가 있었고 통화 내용을 도청하지는 못했지만 모두 공적인 내용이었다고 연락받았지만 사실 누가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