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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1권(11화)
제4화 황실 풍운(3)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젊은 위글 공작만은 사정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는 정말 그저 순수하게 아린 공작의 폭정에 반발해 이들의 무리에 가담한 것입니다. 덕분에 지금 그의 입장이 다소 묘한 상태가 되었지요.”
순간 딜란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묘한 상태라니?”
아르테미르가 이런 딜란의 질문에 화답했다.
“지금 저들의 힘은 확실히 황실의 우위에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언제까지 저들이 계속해서 황실의 우위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지금은 저들의 방해로 황실의 권위가 무너진 상황이지만 저들 역시도 언제까지 이런 현상이 계속될지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황제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아르테미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요?”
아르테미르 역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럼에도 어째서 저들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일까요?”
아르테미르의 말에 딜란이 조심스레 말했다.
“설마 위글 공작이?”
아르테미르가 이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지난번 친정 의례 이후로 위글 공작은 적지 않은 마음의 갈등을 보이고 있습니다. 심지어 역모 자체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뜻이지요.”
그러자 황제가 아르테미르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위글 공작에게 먼저 청혼을 신청해야 하지를 않겠소.”
황제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한다면 아마도 위글 공작은 그 청혼을 거절할 것입니다.”
딜란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르테미르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아르테미르가 이들 두 사람을 향해 확신하듯 말했다.
“위글 공작은 어떠한 이유에서건 이미 한 배를 탄 이들을 먼저 배신할 만한 위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르테미르의 설명에 딜란이 그럴 수도 있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소 난감한 표정으로 아르테미르를 향해 말했다.
“그렇다면?”
아르테미르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우선 우리가 위글 공작에게 명분을 주어야겠지요.”
아르테미르의 말에 황제가 그를 향해 말했다.
“명분을 준다니?”
아르테미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위글 공작을 위해서 먼저 그들의 결속을 어느 정도 깨어 놔야겠지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아르테미르의 말에 딜란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지금 우리가 의논하고 있는 것이 그들의 결속을 깨는 방법이 아닌가?”
노마법사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빙긋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래서 우리에게 알렌 공작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원래 목표가 무엇이었습니까?”
황제가 무심결에 아르테미르의 질문에 대답했다.
“2인자의 자리, 그리고 자신의 딸을 황후로 만든다는 것. 아…….”
황제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아르테미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황제를 향해 아르테미르가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때문에 위글 공작이 아닌 알렌 공작의 딸을 제1황후로 삼는 것이지요.”
아르테미르의 말에 딜란이 다소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과연 그가 그렇게 쉽게 승낙하겠는가?”
아르테미르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2인자의 자리와 자신의 딸을 황후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가 황실의 편에 서게 된다면 노마법사님을 제외하고 누가 있어 그의 위에 설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굳이 위험한 역모라는 수단을 통하지 않고서도 자신의 딸을 황후로 만들 수 있는데, 대체 그가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딜란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으로 아르테미르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알렌 공작 역시 저들과 한 배를 탄 사람이 아니던가? 쉽게 허락하겠는가?”
아르테미르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지요. 그런데 막강한 페드로가 버티고 있는 빅터 황실의 2인자 자리와 노마법사님을 제외하고는 그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는 현 황실의 2인자 자리 중 어느 쪽이 그에게 더 매력이 있겠습니까?”
딜란이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한 탄성을 내뱉었다.
“음.”
그런 딜란을 향해 아르테미르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알렌 공작은 분명히 황후의 자리를 승낙할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그가 황실의 편으로 돌아선다면 우선은 한고비를 넘긴 셈이지요. 황실과 7명의 공작과의 싸움은 그나마 해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3명의 공작이 우리 편인 상황에서 말입니다.”
황제가 그런 아르테미르를 향해 말했다.
“허면 위글 공작은?”
아르테미르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어디까지나 7명의 공작들과의 싸움은 만약의 경우입니다. 알렌 공작과의 일이 잘 매듭지어지면 그때 위글 공작에게 제2황후의 자리를 제안하는 것입니다.”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는 듯 이제는 황제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때는 위글 공작이 청혼을 수락하겠는가?”
이런 황제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적어도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아르테미르의 대답에 딜란 역시 차분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위글 공작은 의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했거늘,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가?”
아르테미르가 이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확실히 의리가 있는 인물이지요. 그러나 일단 그들의 결속은 무너졌습니다. 그만큼 그들의 명분 역시도 희미해져 가겠지요.”
아르테미르의 설명에 딜란이 물었다.
“어째서 그들의 명분이 희미해져 간다고 생각하는가?”
아르테미르가 기다렸다는 듯 이에 화답했다.
“당연하지를 않습니까? 그때는 이미 알렌 공작이 황실의 편이 아닙니까? 지금 황실의 정책이 바로 서지 못하는 것은 저들 10명의 공작들 때문인데 그중 3명의 공작이 황실의 편에 선다면 황실의 정책이 그나마 좀 더 잘 실현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그만큼의 폭정이 줄어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결국 제국 내의 인심 또한 그만큼 폐하께로 돌아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아르테미르의 설명에 황제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래서?”
아르테미르가 공손히 그런 황제를 향해 말했다.
“위글 공작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명분은 점차 사라져 가고 다른 이가 먼저 결속을 배신했습니다. 의당 그 역시도 발을 빼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황실에서 그에게 손을 내민다면 그 역시 이를 마다할 명분도 이유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이전에 그들에게서 발을 뺀 알렌 공작과 동등한 조건으로 말입니다.”
황제와 딜란이 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딜란이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아르테미르에게 말했다.
“허면 이후 나머지 4명의 공작들은 어찌할 생각인가?”
이런 딜란의 질문에 아르테미르가 입가에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글쎄요. 일단 6명의 공작들이 황실의 편이 된다면 4명의 공작들이야 굳이 우리의 몫이 아니지를 않겠습니까?”
딜란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우리의 몫이 아니라?”
아르테미르가 여전히 묘한 미소를 머금으면서 말했다.
“황실의 편에 선 6명의 공작들, 그들이 과연 함께 역모를 도모했던 4명의 공작들을 가만히 두고만 보겠습니까?”
아르테미르의 말을 황제가 곱씹었다.
“우리의 몫이 아니라…… 과연…….”
황제 역시 이제는 모든 것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왠지 이런 아르테미르의 이야기가 실현 가능한 일처럼 생각되었다. 순간 아르테미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모든 것은 폐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아르테미르의 말에 황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혼사를 승낙한다는 뜻이었다.
딜란은 그런 황제와 아르테미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제 고작 30을 넘겼을까?
적어도 딜란의 눈에 보이는 아르테미르의 외관상 모습은 그러했다.
그리고 친정 의례가 끝날 당시 아르테미르가 했던 ‘재미있군.’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딜란은 어쩌면 아르테미르가 이미 그때 당시 이런 일련의 일들을 계획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르테미르가 황실에서 보낸 10년의 기간은 확실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이전의 아르테미르의 모습을 딱히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아르테미르가 자신도 쉽게 생각하지 못했던 이런 일들을 구상한다는 것은, 그리고 이를 위해 세세한 조사까지도 빠뜨리지 않았다는 것은 도무지 이제 갓 30을 넘긴 사람의 경륜으로는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이런 생각이 들자 딜란은 의심의 눈초리로 회의 석상을 떠나는 아르테미르를 바라보았다.

***

한 달 뒤, 올란 제국의 황궁에서 성대한 결혼식이 열렸다.
4명의 공작을 제외한 7명의 공작이 참석, 그들을 따르는 마법사들과 궁정 마법사 딜란, 그리고 제국의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모두 참석한 성대한 행사였다.
확실히 식장의 분위기는 친정 의례와는 사뭇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제국 최강의 세력인 10명의 공작들 중 6명의 공작이 결혼식에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이 결혼식으로 황실의 뒤에는 6명의 공작이 버티고 서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린 셈이었다.
때문에 이를 계기로 황실의 위상이 한껏 치솟았다.
물론 아르테미르가 예상했듯이 일단의 소요 사태 역시 다소 잠잠해졌다.
그러나 모든 것이 아르테미르의 생각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었다.
이후 뜻밖의 사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아르테미르 역시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황실의 혼사가 끝나고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신혼의 단꿈을 꾸기도 전에, 황제는 급히 어전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아르테미르는 그 어전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어전회의의 참석자는 황제와 딜란 그리고 새로이 황실의 편에 선 6명의 공작들이었다.
이에 분노한 그린 후작이 황급히 아르테미르를 찾았다.
“공작 전하, 이것은 명백한 배신입니다. 어찌 폐하께서 이러실 수 있단 말씀이십니까?”
흥분한 그린 후작에게 아르테미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읽고 있던 책을 차분히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이렇게 아르테미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린 후작이 더더욱 흥분하며 말했다.
“진정 폐하께서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어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공작 전하를,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일심으로 폐하를 보필해 오신 공작 전하께 진정 이래서는 안 됩니다. 전하, 속히 어전으로 가시지요.”
아르테미르가 천천히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린 후작의 말대로 일단 어전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들이 어전 앞에 도착하자 일단의 무리들이 그들의 앞을 막았다.
그들의 앞을 막아선 사람은 다름 아닌 신임 근위대장인 로이 백작의 휘하 근위병들이었다.
아르테미르의 앞길을 막아선 로이 백작은 실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아르테미르가 근위대장 직을 수행할 당시 아르테미르의 오른팔 역할을 해 왔던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르테미르는 여전히 차분한 표정으로 로이 백작을 향해 말했다.
“폐하께서 내가 왔음을 알고 계신가?”
아르테미르의 말에 로이 백작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확실히 알고 계십니다.”
아르테미르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어전을 바라보았다.
“그래, 알고 계신단 말이지.”
이런 아르테미르를 향해 로이 백작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 전하. 이것은 폐하께서 직접 하달하신 명이십니다. 그만 돌아가 주시지요.”
로이 백작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허탈한 표정으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그래, 그랬단 말이지.”
버럭 화를 내도 모자랄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르테미르는 화를 내기보다는 이렇게 허탈한 웃음으로 이를 대신했다.
그리고 로이 백작의 어깨를 토닥거리면서 말했다.
“괜히 찾아와서 자네만 힘들게 했구먼, 그럼 수고하시게.”
그렇게 돌아서는 아르테미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로이 백작의 얼굴에 착잡한 표정이 드리우고 있었다.
‘어이해 폐하께서는 아르테미르 공작 전하를 이렇게 대하시는가?’
로이 백작 역시도 지금의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눈치였다.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는 아르테미르의 뒤를 그린 후작이 졸졸졸 따라오면서 말했다.
“전하, 진정 이대로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
이렇게 말하는 그린 후작을 향해 아르테미르가 빙긋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허면, 어찌하겠는가? 모든 것이 폐하의 뜻인 것을.”
그린 후작이 살짝 입술을 깨물면서 말했다.
“하지만…… 이대로 당하고 계실 작정이십니까?”
아르테미르는 그린 후작의 말에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고 그대로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지금 아르테미르의 처소는 이전에 아린 공작이 사용했던 장소이기도 했다.
아린 공작이 게놈으로 화해 달아난 이후 황제는 그의 지위와 더불어 황궁 내의 그가 이용하던 모든 것을 아르테미르에게 하사했다.
아린 공작의 본모습이 마물이었기 때문일까?
실내는 다소 어두운 감이 없지 않았고,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되어 있지도 않았다. 기실 이런 점이 아르테미르의 마음에 들었다.
어전에서 돌아온 아르테미르는 그대로 곧장 다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느긋하게 서재의 의자에 몸을 맡긴 채 조금 전 덮었던 책을 다시 펼쳤다.
그런 와중에도 그린 후작은 계속해서 아르테미르의 뒤를 따르면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린 후작이 옆에 있음에도 아르테미르는 전혀 그에 개의치 않고 책을 다 읽고는 다시 문서를 뒤척이기 시작했다. 참다못한 그린 후작이 아르테미르를 향해 말했다.
“전하, 제게 달리 지시하실 사항은 없으십니까?”
아르테미르가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는 그만 돌아가서 자네 일이나 보시게.”
이런 아르테미르의 말에 그린 후작이 적지 않게 실망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아르테미르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그럼 전 이만.”
그린 후작은 아르테미르에게 이렇게 예의를 갖추고 그의 서재를 벗어났다.
그러나 그렇게 돌아선 그린 후작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린 후작은 무언가 결심을 굳힌 듯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그날 이후 아르테미르는 대부분의 일상을 자신의 서재에서 보내고 있었다. 반대로 그린 후작은 매우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