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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1권(12화)
제4화 황실 풍운(4)


그렇게 일주일의 시간이 흘러갔다.
어전회의는 그때까지도 연일 계속되었고, 황제는 여전히 아르테미르를 찾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테미르는 여전히 느긋하게 서재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반대로 그린 후작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매일 로이 백작을 찾아가 회의의 소식을 물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소식은 여전히 황제는 아르테미르 공작을 찾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이렇듯 그린 후작은 아르테미르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린 후작의 이런 행동은 아린 공작에게도 그랬던 것처럼, 아르테미르와 자신을 공동의 운명체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또다시 일주일의 시간이 흘러갔다.
그럼에도 황제는 여전히 아르테미르를 찾지 않았다.
결국 그린 후작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마침내 준비한 한 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늦은 시각에 그린 후작이 은밀하게 아르테미르의 처소를 찾았다.
늦은 밤 때아닌 노크 소리에 막 잠을 청하려던 아르테미르가 문을 열었다. 순간 그를 향해 그린 후작이 재빨리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공작 전하, 그린입니다.”
이렇게 고개를 숙이는 그린 후작의 모습에는 비장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그린 후작의 모습에 아르테미르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자네가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인가?”
아르테미르의 질문에 그린 후작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공작 전하, 저와 함께 어디를 좀 가 주셔야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린 후작은 조심스레 주위를 살폈다.
그린 후작의 조심스런 행동에 아르테미르가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무얼 그리 걱정하시는가? 그렇게 밖에 서 있지 말고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게.”
그린 후작이 재빨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전하, 한시가 급합니다. 서둘러 의복을 갖추시지요.”
그린 후작의 조급한 표정에 아르테미르가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쯧, 무엇을 그리 서두르는가?”
하지만 그린 후작은 여전히 다급한 표정으로 연방 주위를 살피면서 말했다.
“전하, 제발 서둘러 주십시오.”
아르테미르가 그런 그린 후작을 딱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이내 그의 뜻대로 안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아르테미르가 다시 밖으로 나오자 그린 후작은 그 즉시 그를 황궁의 정문으로 안내했다.
황궁의 정문에 도착한 아르테미르는 다소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그린 후작을 바라보았다.
“설마 이 늦은 시각에 나더러 황궁 밖으로 나가자는 것인가?”
아르테미르의 말에 그린 후작이 이를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아르테미르가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린 후작에게 말했다.
“음. 이토록 늦은 야밤에, 그것도 남몰래 황궁을 벗어난다……. 참, 오해를 사기 좋은 일이 아닌지, 그렇지 않은가?”
이렇게 말하면서 아르테미르가 뒤쪽에 서 있는 나무로 시선을 돌렸다.
아르테미르의 말에 그린 후작은 얼굴을 붉히면서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하, 제발. 화급을 다투는 일입니다.”
아르테미르가 느긋한 표정으로 그린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래. 여기까지 왔으니 내친걸음, 일단 어디 가 보세.”
아르테미르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린 후작이 재빨리 들고 있던 막대기에 불을 붙여 흔들었다. 그의 신호와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이 황궁의 문이 열렸고 그린 후작은 재빨리 막대기의 불을 껐다.
그렇게 그린 후작의 안내로 아르테미르는 황궁의 문을 나섰다.
황궁의 문 앞에는 이미 한 대의 마차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린 후작의 안내로 아르테미르가 마차에 오르자 마차는 서둘러 출발했다.
그리고 그들이 출발함과 동시에 황궁의 문이 닫혔다.
그렇게 그들이 떠나자 황궁의 문 앞에서 아르테미르가 힐끔 시선을 던졌던 바로 그 나무의 뒤에서 로이 백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는가?”
조금 전 아르테미르의 시선이 갑자기 자신에게 향하자 로이 백작은 화들짝 놀랐었다. 그리고 황궁을 떠나는 아르테미르를 확인하면서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몰래 지켜보고 있음을 알면서도 저렇듯 당당하게 황궁을 벗어나다니? 거리낄 것이 없다는 뜻인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 것인가?”
한동안 고민하던 로이 백작이 이내 어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찌 되었건 일단 보고는 해야겠지.”
이렇게 돌아가는 내내 로이 백작은 계속해서 아르테미르의 의도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

황제가 주관하는 어전회의는 연일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바쁜 나날을 보내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상대인 4공작들 역시 향후의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회의 역시도 페드로 공작의 사저에서 연일 계속되고 있었다.
자신의 아들인 빅터를 황제로 만들고자 했던 사나이 페드로, 그는 확실히 그에 걸맞은 힘을 갖추고 있었고, 그 힘은 10명의 공작들 중에서도 단연 최강이었다.
회의가 벌어지는 그의 저택 주변으로는 황실을 방불케 하는 삼엄한 경비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런 페드로를 따르는 3공작들의 무력 역시도 여타의 다른 공작들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것은 이들이 페드로 공작과 함께 오래전부터 거사를 준비해 온 덕분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쉽사리 결론을 도출할 수는 없었다.
황실과 6명의 공작들의 힘이 합쳐진 상황이었기에 이들로서도 쉽게 힘의 우위를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황실의 혼인 정책이 이들에게 그만큼 거대한 타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대세는 이제 황제와 6명의 공작 쪽으로 기울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때문에 연일 계속되는 회의에도 이렇다 할 대책을 찾을 수 없었다.
힘으로도, 그리고 명분으로도 그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호락호락 물러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황제와 그 일당들이 결코 자신들을 그대로 방치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들에게 상황이 불리해지는 것 또한 기정사실이었다.
상황은 확실히 이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4공작 중 가장 호전적인 인물은 볼드릭 공작이었다.
그는 시종일관 강경책을 주장하고 있었다.
“까짓것 그냥 밀어 버립시다. 황제건 배신자건 그냥 밀어 버리면 되는 것 아닙니까?”
볼드릭 공작의 말에 케론 공작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당장은 승산이 없는 싸움이야, 아직은 참고 때를 기다려야 해.”
케론 공작의 말에 4공작 중 막내인 에릭 공작이 반박하며 말했다.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진작 볼드릭 형님의 말처럼 그냥 밀어붙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비록 늦었다고는 하지만 지금이라도 한번 시도는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케론 공작이 계속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아직은…….”
볼드릭 공작이 답답하다는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체 언제까지 그놈의 때를 기다리자는 말씀이십니까? 이대로 가다가는 한번 발버둥 칠 기회조차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렇듯 갑론을박으로 회의 석상의 목소리가 다소 높아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페드로는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이렇게 이들 네 명의 공작들은 무기는 얼마나 모여 있는지, 병사들의 사기는 어떠한지, 시작을 한다면 어디서 시작할 것인지,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를 보면서 며칠을 머리를 싸매고 의논들을 하고 있었다.
이렇듯 황실과 4공작들 사이의 권력 투쟁, 그 힘의 저울추는 어느 정도 황실 쪽으로 기울어져 가는 듯했다. 하지만 여기에도 뜻밖의 변수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황궁을 벗어난 마차는 그린 후작의 집 앞에 멈춰 섰다.
아르테미르가 입가에 실소를 지으며 그린 후작에게 말했다.
“그토록 은밀하게 움직이려 하더니 고작 자네 집인가?”
아르테미르의 말처럼 그린 후작이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면서 이렇게 주의를 기울일 필요는 그다지 없었다. 그러나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바로 사람이 문제였다.
그린 후작의 집에서 아르테미르는 뜻밖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아르테미르를 기다린 사람들은 도합 45인, 모두가 바로 과거 아린 공작을 따랐던 귀족들이었다. 엄밀해 말해서 이들은 아린 공작을 등에 업고 지금까지 성장한 세력들이었다.
제국의 초창기 때부터 아린 공작이 집권하기 전까지 올란 제국의 대부분의 귀족들은 10명의 공작들과 황제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다.
그런 와중에 아린 공작이 제국의 정점에 자리 잡았다.
이것은 그동안 황제와 10명의 공작들의 눈에 들지 못했던 군소 귀족들에게는 새로운 기회로 다가왔다.
이들을 굳이 표현하자면 제국의 신흥 귀족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들은 아린 공작과 함께 제국의 중심에 서려 했다.
지금까지 소외된 이들에게는 어찌 보면 당연한 야심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이들의 꿈은 그다지 길지 못했다.
고작 십 년, 그들의 구심점이 되었던 아린 공작은 뜻밖에도 인간이 아닌 마물이었고, 결국 그런 아린 공작을 중심축으로 한 결속은 무너질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모든 것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던 차에 그들에게 다가온 또 다른 손길이 있었으니 바로 아르테미르 공작이었다.
물론 아르테미르가 직접 이들에게 연락을 취한 것은 아니었다.
과거 아린 공작의 심복이었던, 그리고 지금은 아르테미르의 심복인 그린 후작이 그들에게 연락을 취해 왔던 것이다.
갑작스레 황제가 아르테미르를 멀리한 결과가 아르테미르와 6명의 공작의 대립이라는 소문을 낳았고, 이 대립이 이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준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과는 달리 이 모임을 주도한 것은 아르테미르가 아닌 그린 후작이었다. 그리고 물론 그린 후작은 아르테미르에게서 어떠한 명령도 받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린 후작이 이렇듯 독단으로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은 그만의 생존 방법이었다.
그린 후작은 6명의 공작들과 아무런 면식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6명의 공작들에게는 오랜 세월 그의 가문에 충성한 뛰어난 가신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 어디에도 그린 후작이 설 자리가 없다는 뜻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비록 황제가 아르테미르에게서 등을 돌렸다고는 하지만, 그린 후작이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아르테미르가 유일했다.
그런 아르테미르가 지금은 완전히 고립된 상황이었다.
그린 후작은 아르테미르의 실각을 자신의 실각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 아린 공작의 실각, 그때 그는 자신의 운이 다했다고 생각했었다.
아린 공작은 인간이 아니었기에 뚜렷한 대안조차 세울 수 없었다.
그러나 아르테미르는 그런 아린 공작의 경우와는 확실히 달랐다.
지난 10년 동안 아르테미르는 일심으로 황제를 보위해 온, 그야말로 자타가 인정하는 충신임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소위 말하는 명분이라는 것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린 후작은 황제가 6명의 공작들을 등용하는 이유를 아르테미르에게는 없는 그들만이 가진 바로 세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결론에 도달한 그린 후작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아르테미르에게 걸었다.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한 아르테미르를 위해 제대로 된 세력을 만들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이렇게 세력이 갖춰진다면 6명의 공작들은 물론, 황제조차도 아르테미르에게 지금과 같은 푸대접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아르테미르가 제국의 중심에 우뚝 서는 날, 그린 후작 자신 역시도 그 옆에서 아르테미르가 주도하는 그 제국의 중심에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라는 야심찬 꿈까지도 꾸고 있었다.
그린 후작에게 있어서 지금 이 자리는 그의 인생에 마지막 승부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렇게 45명의 귀족들을 대한 아르테미르는 진정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자리에 모인 45인의 귀족들의 영지는 대륙 곳곳에 분포되어 있었다.
우선 이들이 이렇듯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그린 후작이 움직인 시간은 고작 2주일, 아르테미르가 알고 있는 그린 후작의 능력으로는 대륙 곳곳에 퍼져 있는 이들 귀족들을 고작 2주일 만에 한자리에 모이도록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설사 자신이 직접 주도했다고 할지라도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확실히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임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