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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1권(13화)
제4화 황실 풍운(5)
하지만 이들 45명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이들 모두가 바로 얼마 전 황제의 결혼식에 참여했던 귀족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황제의 결혼식이 끝나고 모두가 자신들의 영지로 돌아갔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다. 아니,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대로 이들이 돌아간다면 더 이상 자신들의 미래가, 그들이 꿈꿔 왔던 상황을 실현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올란 제국의 내부에서는 심상치 않은 흐름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런 불안정한 역사의 길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그들은 기댈 언덕을 찾아야 했다.
그것이 페드로를 비롯한 4명의 공작들이 되든지, 아니면 황제가 되든지 그것은 이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승자의 편에 서기만 한다면 아마도 다시 제국의 중심에 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물론 최악의 경우 패자의 쪽에 선다면 아마도 일순간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대로 돌아선다면 이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작금의 혼란한 시국에서 무엇 하나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어느 쪽도 그들을 반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페드로를 중심으로 한 4명의 공작들은 물론 황제의 편에 선 6명의 공작들과 접촉을 시도했다.
하지만 양쪽 모두가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다.
적이 되면 귀찮아지겠지만 설사 한편이 된다고 할지라도 그들에게는 이들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은 양쪽 어느 편에 서더라도 기껏해야 그들의 밑을 닦아 주고 버려질 운명일 거라고 느꼈다.
하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접촉을 시도하지 않고 귀향을 했다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생존에 대한 우려는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접촉을 시도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대로 포기하고 돌아간다면 어느 쪽이 이기던 이제는 그들의 생존마저 위태로운 상황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들의 이런 처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양쪽에서 그들을 이처럼 대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아린 공작의 폭정에 동참한 책임이 있었다.
때문에 이제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어느 쪽이든 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설사 그들의 뒤를 닦아 주고 그들에게 버려질지라도…….
이런 어이없는 상황에서 이들에게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바로 아르테미르 공작의 고립이었다.
과거 황제의 친정 의례, 그곳에서 보여 주었던 아르테미르의 모습이 아직도 그들의 뇌리에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결코 이대로 무너질 인물이 아니다.’
아르테미르의 고립 소식을 들은 이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아르테미르를 따르는 것, 그것은 확실히 이들에게도 커다란 모험이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다른 어느 편에 서는 것보다 분명히 클 수밖에는 없었다.
비록 운 좋게 다른 편에 서서, 그것도 승리하는 편에 선다면 생존은 가능하겠지만, 이들은 아마도 아린 공작이 등장하기 이전처럼 승자의 그늘에서 묵묵히 삶을 영위해 나갈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결국 인생은 도박이라고 했던가?
이들은 의논 끝에 그린 후작을 찾았다.
당시 황제가 계속해서 아르테미르를 푸대접하는 상황이었고, 이에 그린 후작은 매우 분노한 상태였다. 그리고 마침 그린 후작 역시 아르테미르에게 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 차에 자신을 찾아온 귀족들, 그린 후작은 이를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후 그린 후작은 이들과 함께 계속해서 사람을 모았다.
그리고 계속되는 황제의 푸대접, 그리고 침묵하는 아르테미르, 결국 그린 후작은 승부수를 띄울 수밖에는 없었다.
그야말로 모두의 이해관계가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장면이었다.
그린 후작의 안내로 아르테미르가 모두의 중앙에 위치했다.
그와 동시에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 허리를 숙였다.
“아르테미르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이들의 인사에 아르테미르는 살짝 목례로 화답했다.
아르테미르의 뒤에 선 그린 후작이 그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들은 모두 한 지방의 영주들입니다. 제가 전하를 위해 이들 모두를 이렇게 한자리에 불러들였습니다.”
그린 후작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그들을 둘러보았다.
순간 그린 후작이 아르테미르의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폐하께서 공작 전하를 멀리하시는 것은 분명 잘못된 처사입니다. 어찌 우리가 이를 그대로 묵고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대체 언제부터 이들이 ‘우리가’가 된 것일까?
다소 흥분 섞인 그린 후작의 말에 그 자리에 모인 모든 귀족들이 함께 흥분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이는 폐하께서 정말 너무하신 처사입니다.”
몇몇은 이렇게 소리 내어 황제를 비난했다.
아르테미르가 가만히 이들을 지켜보고 있자니 한편의 경극을 보는 듯했다.
이에 아르테미르가 묘한 미소를 머금자 그린 후작이 조심스레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아르테미르가 계속해서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린 후작이 다시 귀족들을 향해 소리 내어 외쳤다.
“우리가 이대로 물러설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도 힘이 있음을, 아르테미르 공작 전하의 뒤에도 사람이 있음을, 바로 우리가 있음을 온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린 후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동조하듯 외쳤다.
“옳소, 옳소.”
확실히 그 자리의 분위기는 말 그대로 우리는 하나였다.
그리고 모두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분노가 가득했다.
그 순간 또 그린 후작이 아닌 한 명의 귀족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이름은 자이였다.
알폰소 자이, 작위는 백작이었고, 그린 후작이 아닌 그가 실질적으로 이 자리에 참석한 귀족들을 모은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이 백작이 없었다면 오늘의 모임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눈도장이라도 찍고 싶었던 것일까?
아르테미르의 반응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자이 백작은 아르테미르를 힐끔 쳐다보면서 이렇게 소리 내어 외쳤다.
“6명의 공작들에게 우리의 힘을 보여 줍시다. 폐하와 공작 전하를 이간질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우리가 몸소 보여 줍시다. 공작 전하의 곁에 우리가 있음을 저들에게 반드시 알려 줍시다. 여러분…….”
그의 말에 호응하여 여러 귀족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질렀다.
“옳소, 옳소.”
귀족들의 함성은 그린 후작이 주도하던 당시와는 확실한 차이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한동안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계속되었다.
자이 백작이 손을 들어 흥분한 우리 귀족들을 진정시켰다.
그렇게 한편의 경극이 막을 내렸다.
그리고 다시 또 한편의 경극이 시작되었다.
그린 후작을 필두로 한 45인의 귀족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신들이 공작 전하를 보필하겠습니다. 부디 신들을 받아 주시옵소서.”
아르테미르는 여전히 묘한 시선으로 고개 숙인 이들을 바라보았다.
아르테미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사람들은 그렇게 한동안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린 후작이 조심스럽게 아르테미르를 바라보았다. 순간 아르테미르가 그런 그린 후작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
이런 아르테미르의 말에 주변의 분위기가 다소 묘하게 변했다.
무엇이 좋다는 것인가?
하지만 그린 후작은 얼굴에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린 후작은 이런 아르테미르의 반응을 승낙의 의사로 간주했던 것이다. 아니, 그것이 승낙의 의사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린 후작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자, 모두들 일어서시지요. 이렇게 좋은 날 술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문을 열어 그때까지 밖에서 대기 중이던 하인들에게 명했다.
“뭣들 하는 것이냐, 어서 준비한 술과 음식들을 내오지 않고.”
한결 밝아진 그린 후작의 표정과 태도, 그것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다른 귀족들의 표정을 밝게 만들고 있었다.
아르테미르의 이렇다 할 말은 없었지만, 지금의 그린 후작의 태도로 보아 아르테미르가 그들을 허락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다시 한편의 경극이 끝났다.
그리고 뒤풀이로 술판이 벌어졌다.
술자리의 분위기를 주도한 것은 역시 그린 후작이었다.
그는 이리저리 매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귀족들에게 작금의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공작께서는 원래 말씀이 없으신 분, 모든 것은 자신이 알아서 할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 그가 말하는 요지였다.
그리고 마치 이런 그린 후작의 말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아르테미르 역시 귀족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있었고,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마저 번지고 있었다.
말없이 미소 짓는 아르테미르의 태도, 해석은 가지가지라고 했던가?
몇몇 귀족들은 그런 아르테미르의 모습이 더욱더 신뢰가 가는 표정이었다.
그날 새벽 그들 ‘우리는’ 그렇게 흥겹게 술을 마셨다.
주연은 새벽녘까지 계속되었고, 아르테미르가 황궁으로 돌아온 것은 동틀 무렵이 되어서였다. 황궁에 도착한 아르테미르는 그곳까지 자신을 뒤따라온 그린 후작을 향해 가벼운 미소를 보냈다.
“덕분에 즐거웠네.”
무엇이 즐거웠다는 것일까?
오늘의 자리는 단순히 즐거움을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아무리 세상물정이 어둡다 하더라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는 오늘 모임의 의미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 그린 후작이 알고 있는 아르테미르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시종일관 알 수 없는 미소로 일관하는 아르테미르의 모습에 그린 후작은 그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사라지는 아르테미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린 후작 역시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그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미 우리는 한 배를 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당연히 아르테미르 역시도 그것을 알고 있으리라고 그린 후작은 확신했다.
어찌 되었건 그린 후작은 모든 일이 뜻대로 성사되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황궁을 벗어나는 순간까지도 그린 후작은 흐뭇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렇게 그린 후작마저 그 자리를 벗어나자 한 사람이 스르륵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로이 백작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이곳에서 그들을 기다린 것일까?
로이 백작은 다소 무거운 안색으로 어전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었다.
그렇게 로이 백작마저 사라지자 한 마리의 연락용 비둘기가 조용히 새벽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황제의 결혼식과 연이은 황실의 어전회의, 그것은 이렇듯 뜻밖의 파장을 불러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사건의 중심에는 아르테미르 공작이 서 있었다.
자신의 처소에 도착한 아르테미르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르테미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이용할 만큼 이용했으니 이제는 내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뜻인가? 헨리, 제법 많이 컸구나. 제법이야…….”
헨리는 그레고리 4세의 아명이었다.
아르테미르는 이렇게 말하고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 재미있군, 재미있어. 하지만 모든 것이 너의 뜻대로만 흐르는 것은 아니구나.”
이 말과 동시에 아르테미르의 눈빛이 번뜩였다.
너? 황제를 지칭하는 것일까?
그린 후작을 지칭하는 것일까?
아니면 궁정 마법사 딜란을 지칭하는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6명의 공작들을 지칭하는 것일까?
아르테미르는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은 단순한 가식이 아니라 실제로 지금의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
똑. 똑. 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페드로 공작을 비롯한 4명의 공작들이 회의를 멈췄다. 그리고 페드로 공작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면서 소리가 난 문 쪽을 바라보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누구냐?”
문 쪽에서 곧장 대답이 들려왔다.
“소자 빅터입니다.”
아들의 목소리에 페드로 공작이 인상을 펴며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이냐, 내 이곳에 아무도 들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이런 페드로 공작의 말에도 불구하고 빅터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그리고 공손한 자세로 안으로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워낙 급한 사안인지라 이렇게 아버님의 명을 거역하면서까지 이 자리를 찾았습니다.”
페드로 공작의 아들인 빅터는 매사에 신중한 인물이었다.
모두가 그런 빅터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급한 사안이라는 말이 나오자 회의 석상의 모두가 궁금증 어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