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이방인 1권(14화)
제4화 황실 풍운(6)


4명의 공작 중에 2인자인 케론 공작이 빅터를 향해 물었다.
“중요한 사안?”
하지만 이런 케론 공작의 질문에도 빅터는 곧장 대답하지 않고 아버지인 페드로 공작과 케론 공작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렇게 지나치게 신중한 빅터의 모습에 페드로 공작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들의 거의 모든 면이 마음에 들었지만 이럴 때마다 조금 답답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페드로 공작이 자신을 바라보는 빅터를 향해 말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두가 우리와 생사를 같이하는 분들인데 여기서 무슨 눈치를 살피느냐, 어서 썩 말해 보거라.”
이런 페드로 공작의 말에 비로소 빅터가 대답했다.
“어르신들께서 회의 도중에 황궁에 파견한 밀정이 도착했습니다. 헌데 그것이 너무나 뜻밖의 소식인지라.”
페드로 공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뜻밖의 소식이라? 음, 그래 그것이 대체 무엇이더냐.”
페드로 공작의 물음에 빅터가 기다렸다는 듯 화답했다.
“아무래도 아르테미르 공작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 하옵니다.”
페드로 공작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태가 심상치 않다? 자세히 말해 보아라.”
빅터가 그런 페드로 공작을 향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얼마 전 황제가 6명의 공작들과 어전회의를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미 보고드린 바와 같이 그 회의에 아르테미르 공작은 소외되었습니다.”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페드로는 물론 다른 3명의 공작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성미 급한 볼드릭 공작이 빅터에게 다그치듯 말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더냐. 그래서 대체 뭐가 어찌 되었다는 것이냐?”
빅터가 그런 볼드릭 공작을 향해 공손히 말했다.
“그것이 아무래도 뜻밖의 상황을 야기한 것 같습니다.”
빅터의 말에 페드로 공작이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뜻밖의 상황이라니, 그러니까 대체 그것이 무엇이더냐?”
솔직히 앞으로 황제로 추대할 아들이 아니라면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거사의 중심에 서 있는 아들이었기에 다른 사람들의 앞에서 체면을 깎아내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런 페드로 공작의 모습에 비로소 빅터가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아르테미르 공작이 은밀하게 과거 아린 공작의 휘하에 있었던 귀족들을 만나고 왔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아르테미르 공작이 그들의 세력과 연계를 꾀할 모양입니다.”
볼드릭 공작이 그다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참, 그까짓 쓰레기들 몇몇이 연계하는 것이 무슨 큰일이라고.”
볼드릭 공작의 말에 케론 공작이 끼어들며 말했다.
“모두가 쓰레기는 아니지, 적어도 아르테미르는.”
케론 공작의 말에 페드로 공작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빅터를 향해 확인하듯 물었다.
“진정 그 말이 사실이더냐?”
빅터가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몇 번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사실임이 분명합니다.”
이렇듯 빅터가 확신할 정도라면 거의 기정사실로 생각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페드로 공작은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이상하군. 황제가 이렇듯 갑작스레 아르테미르를 멀리할 까닭이 있는가? 그리고 그토록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던 아르테미르가 설마 그 짧은 시간에 황제에게서 등을 돌리려 한다는 것인가?”
페드로 공작은 연방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아들 빅터의 눈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그러자 케론 공작이 환한 표정으로 페드로 공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황제의 수족 중에 하나가 떨어져 나가는 것이니 이는 하늘이 우리에게 주신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페드로 공작이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상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황제가 그를 멀리할 이유가 없어. 그는 10년을 한결같이 자신의 옆을 지켜 왔던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 사람을, 아무래도 이상해.”
페드로 공작의 말을 듣고 있던 네 사람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이상하기는 했다.
지금은 황제가 결혼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런 짧은 시간 만에 10년을 한결같이 자신과 보낸 분신과도 같은 사람을 버리고, 이제 새로이 한편이 된 6명의 공작을 택하기에는 그 시간이 너무나 짧았다. 그것은 어떤 냉정한 황제라도 쉽게 취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또한 지난 10년을 한결같이 황제를 모시던 사람이 그렇게 갑자기 배신한다는 것도 확실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임이 분명했다.
페드로 공작이 진지한 표정으로 빅터를 향해 말했다.
“빅터, 너는 계속해서 사람을 늘려 한시도 빠짐없이 황궁의 동태를 살피도록 해라. 또한 아르테미르 공작과 관련된 사안이라면 아무리 작은 사안도 그 즉시 나에게 보고하도록 하여라.”
빅터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회의 석상을 벗어났다.
빅터가 밖으로 나가자 페드로가 묘한 시선으로 중얼거렸다.
“이것이 황제와 아르테미르의 대립인가? 아니면 6명의 공작들과 아르테미르의 대립인가?”
정확한 사정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 소식만으로도 4명의 공작들의 표정은 한결 밝아져 있었다.
실상 그것이 누구와 누구의 대립이든지 이들에게는 하등 손해날 것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이들의 계획은 대폭 수정되고 있었다.

***

어전회의가 시작된 지 어느덧 한 달여가 지났다.
그동안에 아르테미르는 그린 후작의 집을 방문했던 그 한 번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서재의 책들과 문서들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과거 아린 공작의 서재에는 아르테미르가 생각하지 못했던 방대한 분량의 서적과 문서들이 수집되어 있었다.
대륙의 역사부터 시작해서 각국의 지도는 물론, 과거의 정세와 현재에 이르는 정세까지,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모든 것이 비교적 자세하게 망라되어 있었다.
그 대부분을 읽은 지금, 아르테미르는 막연하지만 오메가하임 대륙 전반의 형세가 조금씩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태양이 따사로이 비추는 한낮의 한때, 아르테미르는 정말 모처럼만에 햇볕을 쬐기 위해 서재를 벗어나 밖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따사로운 햇살이 그의 눈을 어지럽혔다. 그리고 그 따사로운 햇살 아래 한 사람이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로이 백작이었다.
인사를 마치고 고개를 든 로이 백작이 아르테미르를 보면서 빙긋이 미소를 머금었다.
“마침 자리에 계셨군요.”
로이 백작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미소로 화답했다.
“좋은 날씨지 않은가?”
아르테미르의 말에 로이 백작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폐하께서 공작 전하를 찾아계십니다.”
이렇게 말하는 로이 백작은 진심으로 이를 기뻐하는 눈치였다. 그런 로이 백작을 향해 아르테미르가 알았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제야 회의가 끝이 났는가 보군.”
로이 백작은 대답 대신 이를 인정하듯 가볍게 고개를 숙였고, 아르테미르가 그런 로이 백작의 어깨를 가볍게 툭, 툭 두드렸다.
“그나저나 그동안 자네와 나 사이도 제법 소원해진 것 같군.”
아르테미르의 이 같은 말에 로이 백작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아르테미르가 그런 로이 백작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게 어찌 자네의 탓이겠는가? 이 사람, 소심하기는. 어서 앞장이나 서시게.”
그렇게 로이 백작의 안내를 받으며 아르테미르는 어전으로 향했다.
그러나 로이 백작이 그를 안내한 곳은 정무를 논의하는 어전이 아니었다.
로이 백작은 어전이 아닌 황제의 침전으로 아르테미르를 안내하고 있었다. 침전 앞에 도착한 아르테미르가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정 폐하께서 이곳으로 나를 데려오라 했는가?”
아르테미르의 말에 로이 백작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르테미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성큼성큼 침전을 향해 걸어갔다. 순간 침전을 지키는 근위병들이 그런 아르테미르의 앞을 막아섰다.
“검을 주시지요.”
막아선 근위병 중의 한 명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아르테미르는 아무 말 없이 근위병에게 검을 건네고 안으로 들어갔다.
검을 받아 든 병사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아르테미르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상관이요, 또한 자신이 가장 존경하던 인물이었으며, 언제나 황제의 곁에서 유일하게 검을 소지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앞을 제지하는 것이, 그리고 감히 그의 검을 빼앗는 것이 근위병에게는 결코 탐탁지는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물론 근처의 대다수의 근위병들이 아르테미르가 지나간 길을 바라보면서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로이 백작의 표정 역시도 그런 병사들의 표정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제발 두 분의 사이가 예전처럼 돌아와야 할 텐데.’
로이 백작의 표정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황제의 침실, 그곳에는 황제 이외에도 한 명이 더 있었다.
궁정 마법사 딜란, 그가 황제의 옆에서 아르테미르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는 자신의 침상에 걸터앉아 있었고, 딜란은 그런 그의 옆에 서서 아르테미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테미르가 먼저 황제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폐하, 찾아계십니까?”
아르테미르의 인사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침실에는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얼마 후 황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가 경을 처음 대한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던가?”
과거를 회상하는 듯 황제는 묘한 표정으로 아르테미르를 바라보았고, 그런 황제를 향해 아르테미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입이 움찔움찔거렸다.
무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음이 분명했지만, 황제는 그 말을 꺼내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결국 황제는 착잡한 표정으로 딜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딜란 역시 쉽게는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두 사람의 모습에 아르테미르가 가벼운 미소를 머금었다.
“두 분께서 이토록 바쁜 와중에 단순히 사담이나 하자고 신을 부르신 것은 아닐 테지요. 그것이 무엇이든 신은 이미 경청할 준비가 되었으니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아르테미르의 말에 딜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전쟁을 하려고 하네.”
딜란이 이렇듯 갑자기 전쟁을 언급했음에도 아르테미르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결국은 전쟁을 통해 내란을 무마하기로 하셨습니까?”
딜란이 이를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4명의 공작들과의 내란은 국가적인 손실이 아니겠는가? 또한 그들은 수 대째 제국을 위해 헌신한 가문이 아니던가? 그래서 차라리 그들의 세력을 외부로 내보낼까 하네.”
아르테미르가 이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명분은 있습니까?”
아르테미르의 말에 딜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10년 전 아린 공작의 조약으로 억울하게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는 것이지.”
아르테미르는 여기에도 역시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좋은 명분입니다.”
아르테미르의 긍정적인 반응에 딜란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저들에게 동쪽을 맡길 생각이네.”
딜란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오메가하임 대륙의 지도를 떠올렸다.
“르안 왕국 쪽입니까?”
딜란이 다소 의외라는 표정으로 아르테미르를 바라보았다. 아르테미르가 내정은 물론 이렇게 오메가하임 대륙 전반의 상황을 인식하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아르테미르의 말을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네, 르안 왕국이라면 아마도 4명의 공작들의 좋은 적수가 될 수 있을 것이네.”
딜란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르안 왕국이라, 과연 좋은 생각이군요. 그런데 저를 찾으신 이유는?”
딜란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부득불 자네가 서쪽을 맡아 주어야겠네.”
이런 딜란의 말에 아르테미르의 표정이 굳어졌다.
한편으로는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인가?’라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란 제국의 서쪽 영토, 그곳에는 호손 제국이 위치하고 있었다.
아르테미르는 빠르게 얼마 전 아린 공작의 서재에서 보았던 호손 제국의 자료를 떠올렸다.
현재의 호손 제국은 이미 그레고리 3세가 대륙 정벌을 단행하던 올란 제국의 10년 전 군세를 훨씬 더 능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 올란 제국 전체가 힘을 합쳐도 승산이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는 뜻이었다.
아르테미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딜란과 황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확인하듯 물었다.
“진정으로 제가 서쪽이란 말입니까?”
딜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잠시 어두워졌던 아르테미르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어리었다. 그리고 찬찬히 황제의 침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폐하와 만난 지도 벌써 10년의 세월이 지났군요.”
아르테미르의 말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르테미르가 차분한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역시 이 일은 제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겠지요?”
이런 아르테미르의 질문에 황제의 얼굴이 다소 붉어졌다. 그런 황제를 대신해서 딜란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보시게, 아르테미르 공작. 대륙 전체의 사정을 살펴본다면 전쟁은 언젠가 터지게 되어 있는 일일세. 그렇다면 우리의 생각으로는 지금이 가장 적기인 듯하네.”
딜란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돌연 매서운 눈초리로 딜란을 노려보며 말했다.
“우리라…… 궁정 마법사께서 말씀하시는 그 우리는 누구를 지칭하시는 것입니까?”
갑작스런 아르테미르의 단호한 반응에 딜란이 조금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리자 아르테미르는 계속해서 위협적인 시선으로 딜란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만약 내가 가지 않겠다면?”
이렇게 말하면서 아르테미르가 천천히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 역시 아르테미르의 이런 반응에 당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순간 아르테미르가 다시 얼굴에 씨∼익 미소를 머금었다.
“설마 죽이기라도 하시겠다는 뜻입니까?”
장난기를 머금은 듯한 그의 표정과는 달리 그의 몸에서는 위협적인 기운이 느껴지는 듯싶고, 그런 그의 행동에 침실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