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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1권(15화)
제4화 황실 풍운(7)
딜란은 어느 틈에 자신의 손에 든 지팡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호손 제국과의 전쟁, 지금의 올란 제국의 형편으로는 전혀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더구나 황도에는 4명의 공작들이 아직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황제가 많은 병력을 아르테미르에게 내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이것은 호손 제국의 손을 빌어 아르테미르를 제거하겠다는 발상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르테미르가 냉정을 되찾은 듯 차분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얼마의 병력을 제게 주시겠습니까?”
이 대목에서 딜란은 또 한 번 대답을 망설였다. 하지만 이내 아르테미르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황실은 그대에게 어떠한 병력도, 어떠한 군량도 지원하지 않을 작정이네.”
이런 딜란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다소 멍한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딜란이 그런 아르테미르를 향해 말했다.
“경을 따르는 많은 귀족들이 있다고 들었네. 이번 전쟁은 그들과 함께 하시게.”
아르테미르는 마치 또 한 번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듯 다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큭큭큭, 그래서 그렇게 지켜만 보고 있었는가? 큭큭큭.”
아르테미르는 한동안 실성한 사람처럼 그렇게 웃고 있었다.
다소 무례해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황제도 딜란도 감히 그런 아르테미르에게 어떠한 제지의 말도 내뱉지 못했다.
잠시 후 아르테미르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황제와 딜란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말했다.
“내가 전쟁터로 나간다면 4명의 공작들이 선선히 동쪽을 맡아 주겠습니까?”
딜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쉽지는 않겠지. 하지만…….”
아르테미르가 단호한 표정으로 딜란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하지만?”
딜란 역시 차가운 표정으로 아르테미르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서쪽으로 가 주기만 한다면 그들 역시 결코 쉽게는 거절하지 못할 것이네.”
아르테미르가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결국 아르테미르는 미끼에 불과했다.
저들은 아마 4명의 공작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국가를 위해 아르테미르 공작은 사지[死地]인 서쪽도 마다하지 않았다. 허니 너희들은 국가를 위해 동쪽을 맡아라.
하지만 그 역시 성공은 미지수였다.
아르테미르가 딜란을 향해 말했다.
“성공하리라고 보십니까? 당신의 이번 계책이?”
딜란이 어느 정도는 확신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도와준다면 가능하리라 생각하네.”
하지만 아르테미르에게는 이런 딜란의 대답이 가식으로 느껴졌다. 그런 아르테미르를 향해 딜란이 정중하게 말했다.
“올란 제국의 황실은 물론, 제국의 역사가 자네의 충정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네.”
아르테미르가 다시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재미있군요.”
이런 아르테미르의 묘한 표정과 말에 딜란이 조금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10년 충성의 대가가 고작 미끼였다. 지금 이 자리에서 흥분을 한다고 해도, 아니 광분을 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아르테미르의 태도는 딜란의 생각보다 훨씬 차분했다.
딜란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딜란이 묘한 눈초리로 아르테미르를 관찰했다.
그 순간 황제가 차분한 어조로 딜란을 향해 말했다.
“노마법사께서는 잠시 자리를 좀 비켜 주시겠소?”
황제의 말에 딜란이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아르테미르를 살피면서 침실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딜란이 밖으로 나가자 황제가 그윽한 시선으로 아르테미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난 십 년 저는 경을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의지했습니다.”
황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정말 뜻밖이었다.
아마도 딜란이나 여타의 신하들이 있었다면 대경하여 황제에게 따지고 들었을지도 모를 발언이었다. 하지만 아르테미르는 그런 황제의 말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면서 말했다.
“그랬습니까? 신도 역시 폐하를 자식처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황제가 이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경도 역시 그랬군요.”
아르테미르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르테미르가 묘한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헌데 어이해 신을 밖으로 내치시려 하십니까?”
황제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머금었다.
“모든 것은 아버님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지요.”
황제의 존대,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상황에서 황제의 존대는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말하는 황제는 물론 듣고 있는 아르테미르에게도 말이다. 그리고 황제는 계속해서 아르테미르를 향해 말했다.
“기억하십니까? 어린 시절 제게 자주 하셨던 말씀을?”
황제의 뜬금없는 질문에 아르테미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순간 황제가 단호한 표정으로 아르테미르를 바라보았다.
“아린 공작이 폭정을 일삼으면서 저를 위협하던 당시 경은 내게 수도 없이 말했지요. 이 땅의 주인은 오직 하나, 바로 나 황제뿐이라고.”
황제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하하하. 과연, 과연 총명하구나. 과연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는 않았구나. 과연.”
무례한 아르테미르의 태도, 하지만 황제는 아무 말도 없이 지그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어쩌면 너에게는 내가 가장 큰 짐일 수도 있겠지.”
황제의 어린 시절부터 그의 옆에 있었던 아르테미르, 그는 황제의 모든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심지어 만인의 존경을 받으며 만인 위에 군림해야 할 황제의 나약한 모습마저도, 그런 아르테미르가 옆에 있는 것은 황제가 앞으로 자신의 정사를 펼치는 데 확실히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황제는 그런 아르테미르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이내 아르테미르의 얼굴에 장난기가 떠올랐다.
“폐하, 신이 가지 않겠다면 어찌하실 요량입니까?”
조금은 건방진 태도에 건방진 말투였다.
어찌 보면 막가자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만한 태도였다.
아르테미르의 말에 황제가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아마도 경은 반드시 가실 겁니다.”
황제의 말에 아르테미르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아르테미르를 바라보는 황제의 표정에는 그 어떤 때보다도 신뢰를 가득 담고 있었다.
“그렇군. 하긴 자식이 아버지를 버린다고 해서 어찌 아버지가 자식을 버리겠는가? 허면 이것이 너와 나의 마지막 만남인가?”
아르테미르의 말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테미르는 천천히 황제의 곁으로 다가갔다.
황제와 아르테미르 단둘만이 이 자리에 있었고,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능히 황제를 시해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 자리에서 일체의 미동도 없었고, 오히려 친근한 표정으로 아르테미르를 지켜보고 있었다.
황제의 곁에 다가선 아르테미르, 그는 피식 미소를 머금으면서 황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아버지가 대견하다며 자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처럼, 그리고 황제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잘 자라 주었구나. 헨리.”
아르테미르의 말에 헨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황제의 표정 역시 아버지에게 칭찬을 받는 아들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잠시 후, 아르테미르는 침실 밖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자세한 것은 딜란과 협의하면 되겠는가?”
이렇게 말하는 아르테미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황제가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황제의 대답과 동시에 아르테미르는 빠르게 밖으로 향했다.
“그동안 함께 해서 즐거웠다. 부디 성군이 되어라.”
아르테미르의 말이 황제의 귓전을 울렸다.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르테미르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고개 숙인 황제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였다.
“녀석.”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눈시울을 적시는 황제의 모습을 아는 것일까?
아르테미르의 어깨에 잔떨림이 일었다.
황제는 고개를 들어 아르테미르가 사라진 침실의 문을 바라보았다.
“안녕히 가십시오. 부디 안녕히…….”
황제의 표정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르테미르가 가야 하는 길, 그 길은 누가 보아도 결코 살아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이었기에…….
제5화 전쟁인가? 동맹인가?(1)
아르테미르는 씁쓸한 표정으로 황제의 침전을 벗어났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법이었다.
황제의 침전을 떠나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는 동안 지난 10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아르테미르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의 거처에 도착하는 즉시 그의 표정은 바뀌고 있었다.
과거는 단지 과거일 뿐이라는 의미일까?
그는 곧장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고, 서재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그곳에 비치된 대륙의 지도를 탁자 위에 펼쳐 놓았다.
‘호손 제국이라.’
지도 위에 호손 제국의 크기가 가장 컸다.
당연히 호손 제국의 영토가 현재 가장 넓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올란 제국으로부터 빼앗은 영지를 제외해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사 또한 결코 짧지 않았다.
쉽게 말해 호손 제국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그리고 오랜 세월 대륙 최강의 제국으로 군림해 왔다는 뜻이었다.
묵묵히 지도를 지켜보던 아르테미르가 마치 음미하듯 중얼거렸다.
“호손 제국이라.”
그 순간 누군가가 요란하게 문을 두드리며 그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공작 전하. 공작 전하.”
다급한 목소리만으로도 그가 누구인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새 소문이 퍼졌는가? 하긴…….”
그가 황제의 침전에서 벗어난 지 아직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린 후작이 이렇게 헐레벌떡 달려왔다는 것은 아마도 누군가 이 사실을 의도적으로 흘렸다는 뜻이었다. 아르테미르는 그 누군가를 궁정 마법사인 딜란이라고 생각했다.
‘진행을 서두르라는 재촉인가?’
아르테미르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
찾아온 것은 아르테미르의 예상대로 역시 그린 후작이었다.
대체 얼마나 서둘러 달려온 것일까?
그는 계속해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르테미르를 향해 말했다.
“헉, 헉, 헉, 공작 전하.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다짜고짜 이렇게 묻는 그린 후작. 아르테미르가 그런 그린 후작을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진정하고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게.”
그린 후작이 일단 아르테미르의 말대로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다급하게 아르테미르에게 물었다.
“공작 전하, 진정 제가 들은 그 말이 사실입니까?”
아르테미르가 능청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가?”
그린 후작은 여전히 숨을 헐떡거리면서 아르테미르에게 마치 다그치듯 물었다.
“지금 황도에는 전하께서 서쪽의 호손 제국과 전쟁을 치른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이것이 진정 사실이냐는 말입니다.”
그린 후작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그린 후작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점차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그린 후작은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결국 내가 줄을 잘못 섰단 말인가? 이제 겨우 한 고비를 넘겼다 싶었더니 결국 나는 사지로 끌려가는 것인가?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페드로 공작이라도 찾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황제에게 무릎이라도 꿇고 사정이라도 해야 하는가?’
본시 그린 후작은 자신의 마음을 잘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는 그의 모습이 지금 그의 답답한 심경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아르테미르가 그런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 건드렸다.
무언가를 훔쳐 먹다 걸린 도둑고양이처럼 그린 후작이 화들짝 놀라며 아르테미르를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의 생각을 들키기라도 한 사람처럼 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런 그린 후작을 바라보면서 아르테미르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이 사람 참, 카멜레온도 아니고…… 쯧쯧쯧.”
아르테미르가 이렇게 한심하다는 듯 그린 공작을 향해 혀를 찼다.
그리고 차분한 표정으로 그린 후작에게 자리를 권했다.
“우선 진정하고 자리에 앉으시게.”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런 아르테미르의 차분한 모습에 그린 후작이 언짢은 표정을 지으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했는데.’
그린 후작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거실의 의자에 몸을 맡겼다.
그린 후작의 엉덩이가 의자에 닿기도 전에 아르테미르가 대뜸 그린 후작에게 물었다.
“전쟁에 나가는 것이 그토록 두려운가?”
아르테미르의 말에 그린 후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우물거렸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였다. 하지만 차마 그 말을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아르테미르가 그런 그린 후작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부드러운 미소는 그린 후작이 아르테미르의 휘하에 들어온 이후에 단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한 것이었다.
“이보게, 그린.”
너무나 진지한 아르테미르의 모습에 그린 후작이 살며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공작 전하.”
아르테미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전쟁에 나가면 우리는 생사를 같이해야 할 사람들, 할 말이 있으면 이 자리에서 기탄없이 이야기해 보게.”
확실히 부드러운 어조는 친근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요는 결국 자신도 전쟁에 참가해야 한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