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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1권(16화)
제5화 전쟁인가? 동맹인가?(2)


문득 그린 후작은 이쯤 되면 막나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 내친김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제대로 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린 후작이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공작님께서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겨우 세력을 좀 모아 숨을 쉴 만하니까 대뜸 호손 제국과의 전쟁이 웬 말입니까? 호손 제국이 아닌, 4명의 공작들이 간다는 르안 왕국이라면 제가 이런 말도 안 합니다. 대체 쥐뿔도 없는 우리가 무슨 힘으로 호손 제국과 전쟁을 한다는 겁니다. 공작님이 가신다고 말씀만 하시면 얼마 전 모였던 귀족들이 ‘아∼ 예, 그럼 당연히 저희들도 함께 가야죠.’ 하면서 선뜻 따라나설 것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그리고 설사 그들이 따라나선다 하더라도 이건 무슨 상대가 되는 싸움이라야 시비라도 한번 걸어 보지, 괜히 갔다가 쌍코피만 터지고 올 것이 뻔한데 미쳤다고 이런 전쟁에 나서냐고요, 나서시기를.”
그린 후작은 지금 아르테미르에게 제정신이냐고 따져 묻고 있었다.
이것은 그린 후작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르테미르에게, 아니 자신의 상관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항변이었다. 하지만 일단 이렇게 속에 있는 말을 밖으로 쏟아 내고 나니 다소 뒤가 두려운 듯 조심스럽게 아르테미르의 눈치를 살폈다.
뜻밖에 아르테미르의 표정은 분노하기보다는 오히려 만족에 가까웠다.
아르테미르는 솔직한 사람을 좋아했고, 이런 그린 후작의 태도가 진정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로 아르테미르가 부드럽게 그린 후작을 향해 말했다.
“이보게, 후작. 전쟁이란 말일세, 해보지 않고서는 누구도 그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법이라네.”
무심결에 그린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해보지 않고서는…….”
언제나 그래 왔듯이,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 왔던 그린 후작이 습관처럼 무심결에 아르테미르의 말에 동조하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내친걸음 또 한 번 용기를 내어 말했다.
“전하. 하지만 세상에는 상식이라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단언하건대 우리는 결코 호손 제국의 적수가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린 후작의 확신에 찬 말에도 불구하고, 아르테미르는 그런 그린 후작의 말을 무시하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자네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얼마나 되는가?”
그린 후작 역시 이런 아르테미르의 말을 무시하며 반문했다.
“진정 가실 생각이십니까?”
아르테미르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린 후작은 행여나 이것이 꿈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도 이것이 사실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기껏해야 4명의 공작들을 르안 왕국으로 보내기 위한 일종의 속임수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믿을 만한 소식통에게서 나온 정보인지라, 이렇게 서둘러 확인하러 온 것이었다.
진정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벼락을 피할 만한 장소마저 지금 그의 머리에는 떠오르지 않는 상황이었다. 멍청하게 앉아 있는 그린 후작을 향해 아르테미르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자네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얼마나 되는가?”
그린 후작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그리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 대답했다.
“기껏해야 한 일만쯤 되지 않을까요.”
아르테미르가 그린 후작을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
“작아, 최소한 이만은 모아야 될 것이야.”
순간 그린 후작은 힐끗 아르테미르를 쳐다보면서 ‘미친놈, 어느 미친놈이 네놈처럼 스스로 사지에 가려고 나서겠는가? 그나마 일만도 최대한 많이 잡은 숫자이거늘.’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르테미르는 ‘자네라면 가능하네.’라는 표정으로 그린 후작을 바라보았고,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리 적어도 이만은 되어야 하네, 필시 자네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아르테미르가 보여 주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신뢰, 이런 아르테미르의 모습에 그린 후작의 마음이 살짝 동요되었다. 그린 후작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2만이라면 과연 승산이 있을까요?”
아르테미르가 피식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글쎄, 아까도 말했듯이 전쟁이란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지, 그러나 2만이라면 설사 호손 제국이라도 어느 정도 해볼 만한 싸움이 되리라고 생각하네만.”
듣기에 따라서는 승산이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이런 아르테미르의 말에 그린 후작은 왠지 모를 편안함을 느꼈다.
그렇지만 내심 이런 생각도 들었다.
‘정말 해볼 만한 싸움인가?’
지난 10년, 그린 후작은 적으로서 아르테미르를 지켜봐 왔다.
아린 공작을 상대로, 고작 300명의 근위병으로 10년 동안 황제를 지켜온 아르테미르가 아니었던가?
아르테미르의 실력은 누구보다 그린 후작이 잘 알고 있었다.
적으로서 그린 후작이 지켜본 남자, 아르테미르는 정말 한 치의 빈틈도 찾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아르테미르의 말이었기에 ‘혹시나 가능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은 그의 바람일 뿐이었다.
그것과 전쟁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그린 후작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최선을 다할 수밖에는 없었기에 그린 후작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군량은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르테미르는 똑같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것 역시도 자네가 알아서 해 주게.”
그린 후작이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린 후작은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르테미르가 그런 그린 후작을 위로하듯 말했다.
“앞으로 힘든 여정이 될 것이야. 하지만 그린, 어쩌면 이것은 우리에게 하늘이 내려 준 기회일지도 모를 일이네. 앞으로 수복하는 모든 영토는 우리의 관할하에 놓이게 될 것이야. 이는 폐하께서 직접 내게 약속하신 것이네. 어려운 만큼 돌아올 대가는 확실히 크다는 것을 명심하시게.”
이것은 욕심을 자극하는 한마디였다.
그리고 그나마 그린 후작에게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덕분에 그린 후작의 떨떠름한 표정이 조금은 펴진 듯했다. 하지만 솔직히 한편으로는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의 심정이기도 했다. 이렇게 ‘에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린 후작이 아르테미르를 향해 넙죽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저는 병사 이만과 군량만 모으면 되는 것이지요.”
아르테미르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네, 그린. 그럼 서둘러 주시게.”
아르테미르의 말에 그린 후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아르테미르는 직접 그린 후작을 문 앞까지 배웅해 주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서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결심은 굳힌 것인가?”
불현듯 거실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아르테미르는 흠칫 놀라면서 재빨리 상대를 확인했다.
대체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일까?
그곳에는 궁정 마법사 딜란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렇게 딜란을 확인한 아르테미르의 얼굴에는 놀람과 함께 감탄의 기색이 역력했다.
“노마법사께서는 사람을 놀래게 만드는 다양한 재주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다소 빈정대는 듯한 아르테미르의 말에 딜란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칭찬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지.”
아르테미르는 딜란에게 조금 전 그린 후작이 앉았던 자리를 권했다.
딜란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자리에 앉았다. 순간 아르테미르의 눈동자가 묘하게 일렁였다.
‘설마 이 정도의 인물이었는가?’
아르테미르는 이런 생각으로 딜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테미르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가 자신의 이목을 속이고 집 안까지 들어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설사 전설의 대마법사인 딜란일지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아르테미르의 자만심이 지금 한순간에 무너지고 있었다.
‘역시 이 세상도 넓군.’
아르테미르는 딜란의 등장에 가장 먼저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런 아르테미르를 향해 딜란이 먼저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진정 되찾은 영토를 자네의 관할하에 주신다고 하셨는가?”
아르테미르의 표정이 다소 일그러졌다.
그가 자신과 그린 후작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숨어 들어온 것뿐만 아니라, 상당한 시간 동안 이곳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아르테미르의 불쾌한 표정에 딜란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네, 지도를 너무 유심히 보고 있어서 차마 기척을 내지 못했네.”
딜란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입가에 살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그때부터 이미 나를 지켜보고 있었는가?’
이렇게 아르테미르는 놀람을 미소로 대신했다.
그리고 딜란을 향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노마법사께서도 아시고 계시겠지만 폐하께서 제게 그런 조건을 말씀하셨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폐하께서는 그저 모든 것을 노마법사님과 의논하라고 하시더군요. 하지만 그 정도 조건은 노마법사께서도 수용해 주시리라 믿습니다만.”
아르테미르의 말에 딜란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치 선심이라도 쓰는 사람처럼 아르테미르를 향해 말했다.
“조건은 그것밖에는 없는가?”
딜란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물론 많습니다만 그 외의 조건까지 들어주실 의향은 있으십니까?”
아르테미르의 말에 딜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더 바라는 것이 있는가?”
딜란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되었습니다. 그 정도면 되었습니다.”
딜란이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딱히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 데려갈 수 있도록 해 주겠네.”
딜란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딜란의 이런 제안은 로이 백작과 근위병들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아르테미르 역시 딜란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딜란을 향해 말했다.
“그들과 함께 지낸 것은 10년으로 충분합니다. 그들은 의당 폐하의 곁에 있어야지요. 그리고 그들에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지를 않습니까?”
딜란이 다소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르테미르가 황제를 그렇게까지 생각했는가? 아니면 근위병들을 위해서인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아르테미르가 조련한 근위병들은 제국 최고의 정예라 불리기 손색이 없었다.
전쟁에 나간다면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런 그들을 마다하는 것이 황제를 위해서 일 수도 있고, 10년을 동고동락한 근위병들을 위해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딜란을 향해 아르테미르가 공손히 말했다.
“설마 그것 때문에 이 누추한 저의 처소를 방문하셨습니까?”
이런 아르테미르의 말에 딜란은 마치 그제야 용무가 생각이 났다는 듯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아르테미르를 향해 말했다.
“아참, 내 정신 좀 보게, 내 자네에게 줄 선물을 하나 가져왔네.”
선물이라는 말에 아르테미르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딜란은 조심스럽게 서재의 탁자 위에 한 자루의 검을 올려놓았다.
검집은 물론 손잡이까지 아스릴이라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검이었다.
아르테미르가 탁자 위에서 조심스럽게 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뽑아 든 검날에 얼굴이 비치고, 순간 딜란과 아르테미르의 시선이 교차했다. 그리고 동시에 두 사람의 눈동자가 묘하게 일렁거렸다.
“좋은 검이로군요.”
아르테미르의 말에 동의하듯 딜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아는 드워프 장인에게 부탁해 만든 최고의 검이라네.”
딜란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검을 검집으로 집어넣으면서 대답했다.
“허나 제게는 이미 검이 있습니다만.”
딜란이 당연히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알고 있네, 확실히 폐하께서도 성검 더글러스를 자네에게 주라 하셨지. 하지만 그것은 황실을 상징하는 검이라네, 그런 검을 어찌 황궁을 벗어나도록 할 수 있겠는가?”
아르테미르가 이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허면 오늘 이 검을 가져오신 뜻 또한.”
그것은 일종의 축객령이었다.
오늘 바로 황궁을 떠나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딜란이 이를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지금 자네는 황궁 밖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이 아니던가?”
아르테미르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요?”
그러자 딜란이 쓱 집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따로 챙겨갈 것이 있으면 며칠 말미를 줄 수도 있네만.”
딜란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빈손으로 이곳에 들어왔거늘 가져갈 것이 뭐 있겠습니까?”
이런 아르테미르의 대답에 딜란은 자신이 이곳에 온 모든 용무를 끝냈다는 듯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아르테미르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건승하시게. 자네의 황궁 밖 거처는 과거 아린 공작이 쓰던 곳을 이용하면 될 것이네. 이미 사람들을 보네 그곳에 모든 준비를 해 두었네.”
이렇게 말하면서 딜란이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르테미르는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앉아서 말했다.
“정리할 것들이 좀 있어서 멀리 나가지는 못하겠습니다.”
딜란은 그런 아르테미르에게 더 이상의 용무는 없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 딜란의 손에는 어느 틈에 성검 더글러스가 쥐어져 있었다.
“역시 제법 재미있는 노인네로군.”
아르테미르는 자신의 손에 움켜쥔 검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