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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1권(17화)
제5화 전쟁인가? 동맹인가?(3)


밖으로 나온 딜란 역시 하늘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제 마검을 세상에 보내나니 마검을 중심으로 이 땅에 혼돈의 역사가 시작되리라.”
그리고 앉아 있던 아르테미르의 모습을 떠올리며 또한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르테미르…… 그는 이방인인가? 충신인가?”
그리고 이내 혼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바야흐로 혼돈의 시대, 더 이상 그가 누군지는 중요치 않다. 어차피 불확실한 것은 모두 버릴 수밖에…….”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딜란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아르테미르의 허리에 찬 마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섬뜩한 마기, 그것은 대륙 최고의 장인이라는 드워프가 아스릴로 덧씌웠지만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마검을 떠올린 딜란이 이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역시 인력으로는 감출 수 없는 것인가?’

***

한 달 전 딜란은 드워프 최고의 장인인 올란도를 찾았다.
딜란은 올란도에게 마검의 마기를 숨겨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마검을 대한 올란도는 딜란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리한 주문이라는 뜻이었다.
딜란은 그가 아니라면 대륙에서 누구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에게 마검을 맡길 수밖에는 없었고, 올란도는 부러진 마검에 아스릴을 입혔던 것이다.
올란도는 검에서 일어나는 마의 기운을 최대한 잠재우고, 새로이 검신을 만들었다.
하지만 결국 드워프 최고의 장인인 올란도 역시 마검의 기운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기껏해야 일반인이 쉽게 마검의 기운을 느낄 수 없을 정도에 불과했다.
이렇게 되리라는 것은 어차피 처음부터 딜란 역시도 알고 있었다.
딜란이 알고 있는 이 세상의 어떠한 금속도 마검의 기운을 완벽하게 차단할 수 없음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마검이 아스릴로 덮이고 완벽히 새로운 모양을 갖추었다.
딜란은 그 검을 아르테미르에게 건네주었다.
확실히 명목상은 성검 더글러스를 회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딜란의 진정한 목적은 마검을 아르테미르에게 전해 그것을 다시 세상으로 내보내는 것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마검의 주인인 이계의 지배자, 그리고 그를 경계하면서 대륙 어디엔가 숨어 있을 마왕을 밖으로 끌어내기 위한 하나의 포석이었다.
그리고 역시 그 중심에 아르테미르가 있었다.
왜 하필 아르테미르였을까?
우선은 불확실한 그의 신분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이답지 않은 경륜, 나이답지 않은 실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10년 전 갑작스런 그의 부상, 또한 숨겨진 그의 그 이전의 행적들, 결국 그만한 실력을 가진 자가 세상에 드러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충분한 의심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었다.
친정 의례 당시의 대전의 분리 마법, 그것은 단순히 게놈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는 아르테미르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빛의 분리 마법은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적어도 마왕의 수하는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렇다고 이계의 지배자와의 연관성을 지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도 아니라면 그는 세상에 드러난, 지금 보이는 그대로 갑자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신성이었다.
현재의 시점에서 딜란에게 있어 그가 어느 쪽이든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가 강하다는 것만은 사실이었기에…….
하지만 적잖게 신경 쓰이는 일은 있었다.
딜란은 지금 황궁의 성문 위에서 떠나는 아르테미르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딜란의 한쪽 옆에는 아르테미르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소년이 있었다. 바로 황제였다.
이제 고작 15세의 소년, 앞으로 국정을 이끌어 나갈 그에게 아르테미르를 떼어 놓는 것은 적잖은 부담이었다. 만약 이계의 지배자와 연관이 없다면 딜란은 그런 황제의 곁에서 그야말로 실력이 출중한 충신을 떼어 놓은 것이었다.
아르테미르가 보인 황제에 대한 충성, 적어도 그것만은 진실이었기에 한때 딜란 역시도 그를 황궁을 이끌어 나갈 동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황제의 안타까운 표정에서 그가 얼마나 아르테미르에게 의지했는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황제를 위해서라면, 아니 올란 제국 자체만을 위해서라면, 아르테미르를 황실에 붙잡아 두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하지만 딜란에게 황실의 문제는, 그리고 올란 제국의 문제는 실로 작은 일이었다.
대륙의 위기, 숨죽이며 대륙을 노리는 이계의 지배자와 마왕, 그들이 좀 더 단단한 세력을 일구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을 밖으로 끌어내야만 했다.
그들을 끌어내기 위해서 마검과 전쟁은 없어서는 안 될 요소였다.
딜란이 전쟁을 결심한 진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또한 아르테미르 이상의 적격자를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 될 것이야.”
아르테미르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딜란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바라보는 시선은 각기 달랐지만, 아르테미르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황제와 딜란은 황궁의 성문 위에서 그렇게 서 있었다.
그렇게 딜란의 주사위는 던져지고 있었다.
그렇게 대륙의 운명을 건 한판의 승부가 시작되고 있었다.

황궁을 벗어난 아르테미르는 황궁이 보이는 언덕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돌아서서 황궁을 바라보니 지난 10년의 세월 동안 함께 했던 황제와 근위병들의 모습이 또 한 번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마침내 황궁 밖으로 나왔는가?”
시원섭섭하다고 해야 할까?
이렇게 말하는 아르테미르의 표정이 또한 묘했다.
그리고 딜란이 그에게 건네준 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검날이 태양빛을 반사시키면서 한껏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아르테미르가 검날을 쓰윽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검날의 감촉을 음미하며 말했다.
“아스릴이라고 했던가? 제법 좋은 금속이로군.”
한동안 검날의 차가운 감촉을 음미하면서 황궁을 바라보던 아르테미르가 마침내 모든 상념을 끝내고 결심을 굳힌 듯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면서 천천히 말고삐를 움직여 말을 돌려세웠다.
“이랴.”
아르테미르가 말에 채찍질을 가하자 말이 요란하게 화답하며 지면을 박차고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마상의 아르테미르는 당당히 가슴을 펴고 정면을 주시하며 중얼거렸다.
“이제 시작인가?”
그렇게 정면을 주시하는 그의 눈빛이 섬뜩한 느낌으로 번뜩였다.
대체 무엇이 시작이라는 뜻일까?
전쟁? 아니면 또 다른 그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다는 뜻일까?
아르테미르는 그 길로 그린 후작의 집으로 말을 몰았다.
이미 그의 도착 소식을 접한 듯 그린 후작의 집 앞에는 그린 후작을 비롯한 그의 휘하 기사들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르테미르가 잠시 황궁을 바라보면서 상념에 빠진 시간 동안 혹시나 아르테미르의 안전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르테미르가 모습을 드러내자 그린 후작을 비롯한 기사들이 안도하는 표정으로 재빨리 허리를 숙였다.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고개 숙인 그린 후작의 얼굴에 다시 안타까운 기색이 스치듯 지나갔다.
설마, 설마 했던 일이 마침내 현실로 그의 앞에 다가온 것이다.
아르테미르가 황궁을 떠나 이곳에 도착했다는 것이 아르테미르가 황실에서 버림을 받았다는 것을, 그리고 앞으로 그들이 호손 제국과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 현실로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이런 그린 후작에게 그 사실을 확인이라도 시켜 주려는 듯 아르테미르가 그린 후작을 향해 대뜸 이렇게 물었다.
“준비는 잘되어 가고 있는가?”
물론 전쟁 준비를 묻는 것이었다.
그린 후작은 그런 아르테미르를 바라보면서 참 성격도 급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르테미르는 이제 그와 제법 많은 시간을 함께 한 상관이었다. 때문에 그린 후작은 이제는 이런 아르테미르의 태도에 제법 적응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예상하고 있었고, 재빨리 아르테미르에게 화답했다.
“이미 각지에 서신을 보냈습니다. 늦어도 보름 이내로는 모두 집결할 것입니다.”
아르테미르가 지시를 내린 것은 고작해야 5시간 전이었다.
그린 후작은 그 즉시 과거 모임에 참여했던 45명의 귀족들에게 연락을 보냈다. 물론 그동안 그들과 지속적인 연락을 취해 왔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렇게 발 빠른 그린 후작의 대처에 아르테미르 역시 만족하는 표정이었다.
아르테미르는 그린 후작의 옆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정말 수고했네.”
이런 아르테미르의 칭찬에 그린 후작이 살짝 어깨를 들어 화답하며 말했다.
“전하께서 출궁을 하신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미 2시간 전에 전하의 거처로 하인 몇을 보내 두었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대충 그곳의 정리도 끝나 있을 것입니다.”
그린 후작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그리고 천천히 그린 후작의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마도 잠시 쉬어 갈 요량인 듯했다.
그린 후작이 그런 아르테미르의 뒤를 따르면서 아르테미르의 귀에다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린 후작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르테미르의 표정이 살며시 굳어지고 있었다.
“음, 그래, 그들이 나를 찾아왔단 말이지.”
아르테미르의 이런 표정과 반응으로 보아 다소 예상밖의 인물인 듯했다. 그리고 갑자기 아르테미르가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린 후작이 아르테미르를 향해 말했다.
“지금 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린 후작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린 후작이 그런 아르테미르를 향해 공손히 말했다.
“하오나 전하, 그들과는 내일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습니다. 허니 굳이 이렇게 서두르시지 않으셔도…….”
그린 후작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지, 손님을 기다리게 해서야 되겠는가?”
아르테미르가 이곳에서 잠시 쉬어 갈 것을 대비해 저택 안에 무언가를 준비해 두었던 그린 후작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지 마시고 오늘은 이곳에서 쉬었다 가시지요. 그들은 내일까지 그곳에서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이런 그린 후작의 말에도 아르테미르는 곧장 마상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마상에서 그린 후작을 향해 말했다.
“손님이 기다리고 계시다는데 내가 어찌 여기서 마음 편히 쉴 수가 있겠는가?”
말과 동시에 아르테미르의 손에 들린 채찍이 움직였고, 말이 지면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그러자 그린 후작이 서둘러 휘하 기사들을 향해 외쳤다.
“뭣들 하느냐, 어서 공작 전하의 뒤를 따르지 않고.”
그린 후작의 외침에 주변에 서 있던 기사 5명이 황급히 말을 타고 재빨리 아르테미르의 뒤를 쫓았다. 그린 후작은 그렇게 사라지는 아르테미르를 향해 고개를 숙인 채로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젠장, 뭐 하나 되는 일이 없군. 쩝.”
그린 후작에게는 딸이 없었다.
하지만 조카들이 몇 명 있었고, 나름대로 그 미모가 괜찮은 편이었다.
그린 후작은 오늘 그 조카들을 저택으로 불러들였다.
물론 그것은 아르테미르를 겨냥한 것이었고, 가능하면 그들 중 한 사람을 아르테미르와 맺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른바 혈맹을 맺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빌어먹을 뜻밖의 손님들 때문에 이런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그린 후작은 그다지 크게 실망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아르테미르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린 후작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든 그린 후작의 얼굴에는 새로운 희망이 담겨 있었다.
‘어찌 되었건 이번 일이 잘만 되면 이것으로 살길이 열릴지도 모르겠군.’
그린 후작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모처럼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확실히 무언가를 한껏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아르테미르는 서둘러 과거 아린 공작의 저택으로 말을 몰았다.
그런 아르테미르의 뒤를 그린 후작의 휘하 5명의 기사가 호위하며 따랐다.
십 년 세월을 북적이던 아린 공작의 저택은 그가 게놈으로 탈바꿈해 떠난 지 6개월도 채 되지 않았건만 극도로 황폐해져 있었다. 심지어 그곳으로 이르는 도로는 물론, 그 주변의 인적도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권력이란 이렇듯 허망한 것인가?’
아린 공작의 저택으로 향하는 아르테미르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