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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1권(18화)
제5화 전쟁인가? 동맹인가?(4)
그렇게 아르테미르가 저택 앞에 이르자 저택 앞의 드넓은 연병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만으로도 딜란이 왜 자신에게 이곳을 거처로 정해 주었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듯했다.
확실히 연병장은 무척이나 넓었다.
어림잡아 족히 5만의 병력은 수용할 수 있을 듯 보였다.
그리고 과거에는 이 드넓은 연병장이 사람으로 북적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곳에는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자연히 그 넓은 크기만큼이나 휑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자니 자연스레 다시 한 번 권력의 허망함이 느껴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 순간 연병장의 한 귀퉁이에서 500여 명의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중무장을 한 상태였다.
그렇게 연병장으로 모습을 드러낸 병사들은 어느새 대열을 갖추는가 싶더니 이내 훈련을 시작하고 있었다.
아르테미르의 묘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린 후작의 말에 따르면 이곳에는 그를 찾아온 손님과 그린 후작이 보낸 하인 몇몇이 전부여야만 했다. 아르테미르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뒤따르는 기사를 향해 말했다.
“하인 몇몇만 이곳으로 보냈다고 하지 않았는가?”
아르테미르의 질문에 뒤따르던 기사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러자 아르테미르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그들이 데려온 병사들인가?”
아르테미르가 언급한 그들은 찾아온 손님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사들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볼 때 그도 아닌 듯했다.
무엇보다도 저들이 찾아온 손님의 일행이라면 그린 후작이 고작 이들 5명만을 아르테미르와 대동시켰을 리가 없었다.
아르테미르는 곧장 연병장을 가로질러 저택으로 말을 몰았다.
연병장에서 훈련 중인 병사들은 분명 그런 아르테미르와 아르테미르를 따르는 5명의 기사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고 계속해서 훈련에 임하고 있었다.
‘적은 아닌 것 같은데. 설마 황제가 보냈는가?’
아르테미르는 이런 생각으로 하면서 저택의 대문 앞에 도착했다.
순간 연병장에서 훈련에 임하고 있는 병사들과 같은 복장의 병사 둘이 그런 아르테미르 일행의 앞을 막아서며 제지했다.
“누구십니까?”
병사 둘은 아르테미르를 향해 정중한 목소리로 말하면서도 창끝은 일행을 향하고 있었다. 이에 뒤따르던 기사 한 명이 재빨리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무엄하다. 감히 이분이 누구신 줄 알고 너 따위가 창끝을 들이미느냐?”
기사의 위협적인 어조에도 병사들은 창끝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
순간 조금 전 호통을 내질렀던 기사가 다시 한 번 그들을 향해 말했다.
“이런 건방진 놈들, 이분이 바로 아르테미르 공작 전하이시니라. 썩 창을 내리지 못하겠느냐?”
기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병사 둘이 아르테미르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한 병사는 이렇게 말하면서 황급히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리고 나머지 한 병사는 서둘러 대문을 열고 다시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이런 일련의 행동들은 매우 신속하고도 절도 있게 행해지고 있었다.
아르테미르는 이런 병사들의 차분하고 민첩한 대응에 적지 않게 감탄하며 천천히 안으로 말을 몰았다.
‘대체 이들은 누구의 병사들인가?’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아르테미르는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에도 여전히 그런 의문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아르테미르를 뒤따르는 기사들 역시도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어색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저택의 대문에서 현관까지는 대략 100미터 남짓의 거리였다.
이 거리만으로도 과거 아린 공작이 사용했던 저택의 규모를 능히 짐작케 했다.
아르테미르가 천천히 말을 몰아 현관을 향해 이동하고 있노라니 현관문이 열리고 조금 전 사라진 병사와 함께 누군가가 헐레벌떡 달려 나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아르테미르의 눈빛이 번뜩였다.
지금껏 품어 왔던 의문이 한꺼번에 해결된 것은 물론이었다.
등장한 인물은 그와 안면이 있었던 자이기 때문이었다.
헐레벌떡 달려 나온 그는 숨조차 고르지 않고 재빨리 허리를 숙였다.
“이제 오셨습니까? 공작 전하.”
아르테미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과연 자네였는가?”
아르테미르의 말에 그가 고개를 들면서 말했다.
“신 자이 백작, 전하의 부르심을 받고 한달음에 이곳으로 달려왔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자이 백작을 향해 아르테미르가 모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오랜만이군, 그래 그동안 잘 지내셨는가?”
아르테미르의 가벼운 인사말에 자이 백작이 공손히 대답했다.
“전하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에 신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듯 전하를 가까이서 모시게 되어 실로 영광입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르테미르가 가만히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나도 잘 부탁하네.”
아르테미르의 말에 자이 백작이 다시 재빨리 허리를 숙였다.
“신명을 다하겠습니다.”
문득 아르테미르가 연병장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저들은 자네의 병사들인가?”
자이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저들은 소신의 장남인 쿠조와 소신의 가병 500명입니다.”
아르테미르가 다소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500명이라…….”
아르테미르는 곧장 저택으로 들어가지 않고 발걸음을 돌려 연병장 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연병장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서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아르테미르는 그곳에서 병사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자이 백작은 그런 아르테미르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이내 아르테미르가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군. 좋아.”
이런 아르테미르의 반응에 당연하다는 듯 자이 백작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부족하나마 제 휘하의 병사들 중 최고의 정예를 고르고 골랐습니다. 어떻습니까? 전하의 마음에 드시는지요.”
아르테미르가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도의 병사들이라면 정말 해볼 만하겠군. 하지만 그 숫자가 너무 적어.’
이런 생각으로 아르테미르는 자이 백작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자이 백작이라면 적어도 형식적으로나마 1,500명 이상은 데려올 줄 알았건만.’
자이 백작은 45명의 귀족들 중 가장 영지가 넓었으며, 그 영지는 지리적으로도 황도에 가장 인접해 있었다. 때문에 아르테미르가 이런 기대를 가졌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아르테미르의 떨떠름한 표정에 자이 백작이 의아한 듯 물었다.
“전하,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르테미르가 이내 섭섭한 표정을 지우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
“아닐세. 그만 들어가도록 하지.”
아르테미르의 말에 자이 백작이 고개를 숙이며 뒤를 따랐다. 뒤따르는 동안 자이 백작이 묘한 시선으로 아르테미르를 바라보았다. 아니, 이를 정확히 표현하자면 무언가를 묻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한 사람처럼 아르테미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테미르는 이런 자이 백작의 시선이 조금 신경 쓰였다.
그래서 결국 아르테미르는 가던 길을 멈추고 자이 백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그런 아르테미르의 물음에 자이 백작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닙니다. 소신은 그저…….”
당황하는 자이 백작을 향해 아르테미르가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얼 그리 당황하시는가? 자네는 이미 내 사람이 아닌가? 우리 사이에 숨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궁금하면 뭐든지 물어보시게.”
그러자 비로소 자이 백작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전하, 제가 듣기에는 앞으로 저희들이 호손 제국과 전쟁을 한다고 합니다만…….”
아르테미르가 이를 인정하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네,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이미 이곳으로 소집시킬 당시 그렇게 연락한 사안이었기에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르테미르는 자이 백작이 새삼 이렇게 다시 묻는 의도가 궁금했다.
“헌데, 그것이…….”
잠시 망설이는 자이 백작을 향해 아르테미르가 추궁하듯 말했다.
“어서 말해 보시게.”
자이 백작이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고작 2만 5천의 병력으로 과연 그들과 전쟁이 가능하리라고 보십니까?”
이렇게 말하는 자이 백작의 얼굴에는 전쟁은 힘들다는 그의 생각이 그대로 내비치고 있었다. 이런 자이 백작의 태도에 아르테미르가 다소 언짢은 듯 살짝 얼굴을 붉혔다.
‘이런, 싸우기도 전에 지고 들어가는가?’
아르테미르는 과거 모임에 참여한 귀족 중에서 그나마 자이 백작이 가장 쓸 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이 백작이 이러하다면 다른 귀족들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순간 아르테미르가 자이 백작의 표정을 찬찬히 살폈다.
자신이 말하는 바와는 달리 걱정은 하되 두려워하는 기색은 찾을 수 없었다.
아르테미르가 문득 자이 백작을 처음 대했던 얼마 전 모임을 떠올렸다.
‘그날도 그랬던가?’
그린 후작의 집에 모였던 45명의 귀족들 중 자이 백작의 모습은 다른 귀족들과는 사뭇 달랐다. 그들 모두를 실질적으로 모은 사람은 자이 백작이었으나 자신의 공을 한껏 부풀리는 그린 후작과는 달리 자이 백작은 굳이 자신의 공을 내세우려 하지 않았다.
신흥 귀족 중에서 가장 명망이 높은 사람, 하지만 그 명망은 그의 신중함과 고지식함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번 결정하면 굽힐 줄 모르는 추진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과거 아린 공작을 따를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이들 대부분은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 아린 공작을 따랐지만, 자이 백작만은 과거 10명의 공작들에게 집중된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아린 공작을 따랐다.
실제로 아린 공작마저도 그런 자이 백작을 쉽게 대하지 못했고, 은연중에 자이 백작은 아린 공작의 외부 세력의 수장으로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 자이 백작의 모습도 여전히 과거와 다르지 않았다.
분명 승산이 없는 전쟁이었다.
그런 전쟁을 위해, 아니 이제는 자신의 주군인 아르테미르를 위해 자신이 가진 최고의 정예를, 그것도 자신이 직접 이끌고 온 것이었다. 더구나 자신의 후계자까지 대동한 채 누구보다 먼저 이곳에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이렇게 묻자 아르테미르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내친걸음 자이 백작이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전하, 그런데 어째서 꼭 2만 5천 명을 맞춰야 했습니까?”
아르테미르의 입장에서는 다소 뜬금없는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자이 백작은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아르테미르를 향해 말했다.
“신의 밑에는 2,000여 명의 병사들이 있습니다만, 그린 후작님께서 꼭 2만 5천 명을 맞춰야 한다고 제게 누차 강조하셨기에 이렇듯 500의 정예만을 추려서 데리고 왔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전쟁에 있어서 병사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이 백작의 말에 비로소 아르테미르는 그가 왜 병사 500명만을 데려왔는지, 그리고 왜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르테미르는 그린 후작을 떠올리며 빙긋이 미소를 머금었다.
얼마 전 아르테미르는 그린 후작에게 2만의 병력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린 후작의 생각으로는 이것은 결코 불가능한 숫자였다.
그린 후작이 생각하기에는 누구도 쉽게 병력을 내놓지 않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일단은 어떻게 해서든 아르테미르가 주문한 머리 숫자는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름 2만에 5천을 덧붙였다. 그리고 그중 2,500명은 자신이 책임지고 나머지 45명의 귀족들에게는 각기 500명의 정예병을 보낼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무엇보다도, 그린 후작이 무엇보다 강조했던 것이 바로 이 숫자 500이었다.
반드시 500명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지식한 자이 백작은 그런 그린 후작의 요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휘하 중 최고의 정예 500명을 엄선했고, 그 즉시 이곳으로 향했던 것이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바가 달랐기에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이었다.
아르테미르는 대답 대신 자이 백작에게 웃으면서 안으로 들어갈 것을 권했다.
“자자, 일단 안으로 들어가세.”
아르테미르는 굳이 자이 백작에게 그린 후작의 실수를 말할 생각이 없었다. 일단 그린 후작은 자이 백작의 상관이었고, 나름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배려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자이 백작은 여전히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전하, 진정 2만 5천으로 이번 전쟁이 가능하겠습니까? 지금이라도 제가…….”
아르테미르가 그런 자이 백작의 말을 막으면서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무튼 모두가 자네만 같다면 이번 전쟁이 더더욱 재미있어지겠군.”
이런 아르테미르의 말에 자이 백작은 더더욱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 자이 백작을 향해 아르테미르가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그렇고, 찾아오신 손님들은 어디에 계시는가?”
이렇게 아르테미르가 찾아온 손님들을 찾자 자이 백작의 표정이 다소 어두워졌다. 그리고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아르테미르를 향해 말했다.
“일단은 제가 임의로 귀빈실로 모셔 두었습니다. 지금 만나시겠습니까?”
아르테미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자이 백작이 그런 아르테미르를 향해 공손히 말했다.
“지금 만나시겠다면 전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렇게 말한 자이 백작은 곧장 헐레벌떡 연병장으로 달려 나갔다.
그렇게 달려 나간 자이 백작은 잠시 후 그의 아들인 쿠조와 그의 휘하 기사 5명을 대동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아르테미르를 향해 공손히 말했다.
“찾아온 손님이 10명이니 저희도 구색을 맞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자이 백작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감탄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이 백작의 모습에는 적어도 기세에서 지지는 않겠다는 의사가 드러나 있었고, 그런 자이 백작을 바라보는 아르테미르의 시선에는 어느덧 신뢰가 가득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왠지 모를 자신감마저 생기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