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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1권(19화)
제5화 전쟁인가? 동맹인가?(5)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아린 공작의 귀빈실이 모처럼 사람의 열기로 북적였다.
그리고 그곳에 모여 있는 도합 20여 명의 사람들 사이에는 전쟁을 방불케 하는 팽팽한 긴장감마저 감돌고 있었다.
아르테미르를 찾아온 손님은 다름 아닌 황실과 대립 중인 4명의 공작들의 수장인 페드로의 아들 빅터였다. 그리고 지금 귀빈실의 대기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것은 바로 협상에 임하기 전에 벌어지는 일종의 신경전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중앙에 마련된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아르테미르와 빅터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며 않아 있었다.
웃음 속에 칼이 있다고 했던가?
마주 보는 두 사람의 미소는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기사들의 긴장감과는 비교할 수 없는 치열한 신경전의 일환이기도 했다.
긴장과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아르테미르였다.
“자네가 빅터인가?”
빅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말로만 전해 듣던 아르테미르 공작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빅터의 입에 발린 인사치레에 아르테미르가 팔짱을 끼면서 가벼운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아르테미르의 행동은 확실히 다소 건방져 보였고, 마치 빅터를 아랫사람처럼 대하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빅터를 바라보는 아르테미르의 시선은 마치 ‘애송이’라고 말하는 듯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아르테미르의 이 모든 행동이 빅터의 심경을 긁고 있었다.
그러나 빅터는 그런 내심을 감추며 아르테미르를 향해 애써 차분히 말했다.
“궁지에 몰리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만.”
빅터의 음성은 다소 가벼웠고, 그것은 확실히 일종의 조롱처럼 느껴졌다.
‘궁지에 몰린 주제에 건방 떨지 마라.’ 이런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아르테미르가 능청스럽게 한 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런 아르테미르의 능청스러운 태도에 비로소 빅터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빅터의 이런 반응에도 불구하고 아르테미르는 잠시 그렇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갑작스레 빅터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면서 말했다.
“설마 조금 전 그 말 내게 한 말인가?”
지금은 서로 마주 본 두 사람 사이의 대화였다.
빅터의 말이 아르테미르를 향한 것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를 향해서 한 말이겠는가?
빅터는 이렇게 딴청을 피우는 아르테미르의 태도를 단순한 허세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자니 조금 불쌍하게 생각되기까지 했다.
대륙 최강의 세력인 호손 제국과의 전쟁을 앞둔 상황, 그 길이 죽으러 가는 길임을 이미 길가는 어린아이들조차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허세라니.’
빅터는 이런 생각으로 무심결에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마치 이런 아르테미르의 말에 대답할 가치조차도 없다는 듯 고개를 까딱까딱 아래위로 끄덕이고 있었다.
이렇듯 건방진 빅터의 태도에 결국 자이 백작이 먼저 참지 못하고 나서며 말했다.
“건방지다, 어디 일개 백작 나부랭이가 공작님의 면전에서…….”
흥분한 나머지 자이 백작의 손은 검으로 향해 있었다.
순간 아르테미르가 천천히 손을 들어 자이 백작의 행동을 제지했다.
아르테미르의 제지로 검을 뽑지 못한 자이 백작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고 심호흡을 하면서 말했다.
“빌어먹을.”
이런 자이 백작의 행동에 빅터는 오히려 여유 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상대가 먼저 흥분한다는 것, 그것은 그만큼 다급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르테미르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역시 아직은 어리군.”
여전히 빅터를 아랫사람을 대하듯 하는 아르테미르, 그러나 빅터는 여전히 냉정을 잃지 않고 있었다. 내심 아르테미르의 허세를 비웃으면서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그다지 오래 가지 못했다.
아르테미르가 그런 빅터를 향해 담담히 말했다.
“자네는 그만 돌아가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작 자네 따위와 협상을 할 만큼 이 아르테미르는 궁색하지 않다네.”
너무나 담담한 축객령, 이것은 빅터가 자신과 대화를 하기에는 도무지 격이 맞지 않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빅터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지금 아르테미르는 너무나 어려운 상황이었다.
황실로 칼을 돌리기에도, 호손 제국과 전쟁을 하기에도 확실히 힘에 부친 상황이었다.
빅터는 이렇게 아르테미르가 딱히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자신들이 내미는 손길을 거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계속되는 아르테미르의 다소 건방진 태도는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려는 안타까운 몸부림 정도로 보이고 있었다.
‘그래도 확실히 대단하기는 하군,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는 것인가?’
빅터는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빅터의 생각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르테미르는 더 이상의 용무가 없다는 듯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귀빈실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가면서 여유 있게 빅터에게 인사말을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럼 멀리 나가지 않겠네. 잘 가시게.”
그렇게 아르테미르가 귀빈실 밖으로 사라지자, 빅터뿐만 아니라 귀빈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멍한 표정을 지으면서 서 있었다. 심지어 자이 백작마저도 아르테미르의 이런 행동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당황한 빅터가 귀빈실 문을 향해 외쳤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요, 아르테미르 공작.”
빅터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귀빈실의 문은 조용히 닫혔다.
무시당한 것은 둘째 치고라도 제대로 아무런 말조차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빅터가 비로소 불쾌한 표정을 드러내며 버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외쳤다.
“이런 빌어먹을, 궁지에 몰리니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인가? 그래, 어디 언제까지 그렇게 오만할 수 있는지 내 두고 보마.”
이런 빅터의 언행에 그때까지 귀빈실에 남아 있던 자이 백작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조금 전 참았던 분통을 터트렸다.
“이런 건방진, 일개 백작 따위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이렇게 말하는 동시에 자이 백작이 검을 뽑아 들자, 그의 휘하 기사들 역시 재빨리 검을 뽑아 들었다. 빅터 역시 얼굴을 붉히면서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참는 눈치였다. 그런 빅터를 대신해서 그의 뒤를 지키던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며 자이 백작 등을 견제했다.
다시 양자 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빅터는 그야말로 난감한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협상을 하러 왔건만 협상은커녕 협상의 당사자는 나가 버리고 그의 수하들과 다투는 상황이 벌어졌으니 어찌 난감하지 않겠는가?
그 순간 귀빈실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문으로 아르테미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천천히 빅터를 향해 걸어가는 아르테미르, 그가 한 발짝씩 빅터를 향해 걸어갈 때마다 빅터는 마치 태산이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고, 아르테미르가 그의 코앞에 당도하자 빅터는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기백이었다.
그 상태에서 아르테미르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면서 빅터를 노려보며 말했다.
“조금 전 내게 뭐라고 말했는가?”
아르테미르의 음성은 그렇게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빅터에게는 충분히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순간 당황한 빅터가 얼굴을 붉히면서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바로 그 순간 아르테미르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아르테미르가 허리에 찬 검을 들어 검집째로 탁자를 내려쳤다.
쫘∼악∼
검집째로 탁자를 후려쳤음에도 탁자는 그대로 두 쪽으로 갈라졌다.
그와 동시에 아르테미르의 몸에서 마치 빅터를 위협하듯 이전과 비할 수 없는 엄청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빅터가 얼떨결에 다시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
빅터가 의자에 주저앉음과 동시에 아르테미르의 주변에 흐르던 강렬한 기세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피∼식∼
아르테미르는 이렇게 비웃음을 흘리면서 빅터의 코앞까지 얼굴을 갖다 대고 말했다.
“역시 아직 어리군.”
이런 아르테미르의 말에 빅터는 더 이상 이렇다 할 대꾸도, 심지어 지금까지 열심히 얼굴에 떠올렸던 미소마저도 지을 수 없었다.
이미 완벽하게 아르테미르의 기세에 억눌린 상황이었다.
그것은 빅터의 뒤에 선 기사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검을 뽑아 들고 있었음에도 아르테미르의 기세에 눌려 아무런 행동조차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르테미르는 빅터에게 또박또박 천천히 말했다.
“어디서 너 따위가 감히 이 아르테미르와 협상을 하려는 것이냐? 정히 그렇게 협상을 하고 싶거든 네놈의 아비에게 직접 오라고 전해라. 어디서 감히 너 따위가.”
이런 아르테미르의 행동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었다.
아르테미르의 목소리는 빅터뿐만 아니라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또렷하게 들렸고, 이미 한풀 기세가 꺾인 빅터 일행은 얼굴을 붉히면서 그저 멍하니 아르테미르를 쳐다만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르테미르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빅터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럼 이만 가 보게. 배웅은 하지 않겠네.”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유유히 귀빈실을 벗어났다.
빅터는 또다시 멍청히 그런 아르테미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감히 이전과 같은 망발을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이를 지켜보던 자이 백작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번졌다. 지금 이 자리를 통해서 자신의 선택이 결코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자이 백작은 뽑아 든 검을 검집에 넣고 멍청히 앉아 있는 빅터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런 와중에 자이 백작의 표정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애송이.’
그러나 자이 백작은 자못 정중하게 빅터를 향해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 주시지요.”
빅터가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자이 백작이 다시 공손히 허리를 굽히면서 길을 안내하듯 손을 내밀었다.
“이쪽입니다.”
빅터가 어찌 나가는 길을 모르겠는가?
지금 자이 백작의 행동이 다분히 자신을 우롱하는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기세가 꺾일 대로 꺾인 상태인지라 빅터는 그저 얼굴을 붉히면서 자이 백작의 안내대로 저택의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빅터가 불쾌한 표정으로 휘하의 기사들을 이끌고 저택을 떠나자, 자이 백작은 이를 보고하기 위해 아르테미르의 방을 찾았다.
“전하, 자이입니다.”
“들어오게.”
자이 백작이 방으로 들어갔을 때 아르테미르는 흔들의자에 몸을 맡긴 채 느긋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자이 백작은 그런 아르테미르의 옆으로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막 빅터 백작 일행이 떠났습니다.”
아르테미르는 눈을 감은 채로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자이 백작이 다소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이대로 괜찮겠습니까?”
이런 자이 백작의 말에 비로소 아르테미르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자이 백작을 향해 말했다.
“자네는 어찌 생각하는가?”
순간 자이 백작이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무엇을 어찌 생각하느냐는 뜻인가?’
이런 생각으로 난감한 표정을 짓던 자이 백작은 아르테미르의 질문이 4명의 공작들과 동맹에 대한 물음이라는 결론을 내리며 대답했다.
“글쎄요. 현시점에서 저들과의 동맹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자이 백작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무슨 소린가? 동맹이라니?”
이런 아르테미르의 말에 자이 백작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허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그러자 아르테미르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이번 전쟁에서 과연 우리에게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제야 아르테미르의 의도를 알았다는 듯이 자이 백작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글쎄요. 결코 쉽지는 않겠지요.”
아르테미르가 이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가, 자네가 그렇다면 역시 그렇겠지. 알았네, 그럼 자네는 이만 물러가 보게.”
자이 백작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예, 그럼 저는 이만…….”
그렇게 자이 백작이 물러가자 아르테미르는 그가 사라진 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동맹이라…… 동맹이라…….”
사실 아르테미르가 자이 백작에게 한 질문은 그의 생각처럼 동맹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동맹이 좋고 나쁘냐는 물음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자이 백작이 동맹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들을 이리로 안내한 그린 후작은 무조건 동맹파에 속할 것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 보았듯이 자이 백작의 경우도 분명 동맹 쪽에 무게를 두는 듯했다.
그만큼 호손 제국이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전쟁이라…… 전쟁이라…….”
이 순간에도 아르테미르는 이런저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 동맹과 전쟁을 이렇듯 번갈아 가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