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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1권(20화)
제6화 출정 준비(1)


그렇게 빅터가 방문한 지 보름이 지났다.
그 보름의 기간 동안 그린 후작의 말처럼 곳곳에서 속속 병력들이 집결하고 있었다.
아린 공작의 저택이 비록 크다고는 하지만 2만 5천의 병력을 수용하기는 무리였고, 또한 어차피 이들 모두가 얼마 후 전쟁에 투입될 병력이었기에, 아르테미르는 굳이 이들을 위해 따로 숙소를 마련하지 않았다.
대신 모여드는 병력을 수용하기 위해 연병장 곳곳에 막사가 들어서고 있었다.
그렇게 막사가 하나씩 늘어 갈 때마다 자이 백작과 그린 후작의 표정은 일그러지고 있었고, 아르테미르의 표정 역시도 그다지 밝지 않았다.
얼마 전 아르테미르가 모두가 자이 백작과 같다면 이번 전쟁은 아마도 재미있어질 것 같다고 말했던가?
그러나 불행히도 모두가 자이 백작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대부분이 그린 후작의 예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린 후작이 500이라는 숫자를 강조했기 때문일까?
확실히 귀족들이 보내온 병사들의 숫자는 대부분 거의 정확하게 500에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이 보내온 병사들을 세세히 살펴보면 솔직히 이들을 병사라고 부르기도 곤란한 지경이었다. 거기에는 이제 갓 17세를 넘긴 듯 보이는 소년도 있었고, 심지어 50을 훌쩍 넘겨 60을 바라보는 노인들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 중 많은 숫자가 범죄자와 노예들이었다.
심지어는 사형수들까지도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있을 정도였다.
이런 사람들에게 군율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고, 훈련을 생각하기도 힘들었으며, 무질서가 연병장에 판을 치고 있었다. 그나마 억지로 무장은 시켜 보냈기에 말 그대로 무늬만 병사라 할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을 인솔해 온 사람들 역시 지난번 회합에 참석한 귀족들이 아니었다.
대부분이 그들 휘하의 기사들 중에서 가장 쓸모없다고 생각되는 기사들이 이들을 이곳까지 인솔해 왔던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의 영지에서 가장 쓸모없는 사람들을 모아서 머릿수를 맞춘 것에 불과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지금쯤 그들은 다른 살길을 찾느라 여념이 없을 것이다.
결국 자신의 병사들을 직접 이끌고 온 것은 자이 백작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비록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지는 그린 후작도 생각하지 못한 듯 표정이 많이 굳어져 있었다. 자이 백작 역시 다소 멍한 상태에서 이런 연병장을 응시하면서 그린 후작에게 말했다.
“정말 이대로 전쟁이 가능하겠습니까?”
자이 백작의 말에 그린 후작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그린 후작을 향해 자이 백작이 물었다.
“이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린 후작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글쎄, 내가 더 이상 무엇을 어쩌겠는가? 일단은 모두 모였으니 공작님께 보고는 드려야겠지. 그리고 그분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자이 백작이 이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저택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일단 함께 전하를 뵙도록 하지요.”
그린 후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이 백작과 함께 몸을 움직였다.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가는 두 사람의 발걸음이 너무나 무거워 보였다.
그들이 이렇게 보고를 위해 저택으로 걸어갈 때, 때마침 아르테미르가 저택에서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두 사람의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이 고개를 숙이면서 예를 갖췄다.
“전하를 뵙습니다.”
두 사람의 인사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르테미르의 시선이 연병장을 향했다. 그리고 비록 실망은 했지만 두 사람보다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모두 모인 것인가?”
두 사람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아르테미르가 두 사람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그럼 대충 숫자는 맞춰진 셈이군.”
이런 아르테미르의 말에 그린 후작이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전하, 기어이 전쟁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린 후작의 불만 섞인 목소리에 아르테미르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허면 내가 저들을 모아 두고 전쟁 말고 무엇을 하겠는가?”
이에 자이 백작마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전하, 전쟁은 숫자로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질 않습니까? 아니, 단순히 숫자로도 호손 제국의 병력은 저들의 몇 배는 될 것입니다. 전하, 저들을 한번 보십시오. 제가 감히 전하께 이런 말씀을 드려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저들은 군대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지경입니다. 그러니 부디 한 번쯤 재고해 주십시오.”
자이 백작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마치 아르테미르의 이런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그린 후작이 나서며 말했다.
“전하, 지금이라도 다시 빅터 백작을 만나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린 후작의 말에 아르테미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자네는 지금 그것을 말이라고 하는가?”
이렇듯 아르테미르의 노한 반응에 그린 후작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이내 아르테미르는 천천히 그린 후작과 자이 백작 사이를 지나쳐 걸어가면서 다시 한 번 찬찬히 연병장을 살폈다.
연병장은 마치 시골 장터를 연상시키듯 시끌벅적했다.
대충 살펴보아도 제대로 검을 잡아 본 사람이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음, 오합지졸이라…….”
아르테미르의 말 그대로 오합지졸이었다.
아르테미르는 한동안 착잡한 표정으로 묵묵히 연병장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후 아르테미르의 시선이 뒤에 있는 그린 후작에게 향했다.
“이보게, 그린.”
아르테미르의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그린 후작이 무언가 결심을 굳힌 듯한 아르테미르의 모습에 반색하며 옆으로 다가섰다.
“네. 전하.”
그런 그린 후작에게 아르테미르가 담담히 말했다.
“군량 문제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것은 확실히 그린 후작이 기대했던 질문이 아니었다.
이렇게 군량을 묻는 아르테미르의 말에 그린 후작의 얼굴이 또다시 일그러졌다. 하지만 공손히 아르테미르에게 말했다.
“일단은 저들이 가져온 군량과 제가 준비한 것으로 일주일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그린 후작이 말끝을 흐리자 아르테미르가 그런 그린 후작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말했다.
“허면 그 이후에는?”
그린 후작의 얼굴에 난감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실은 그것이…….”
그린 후작이 계속해서 말을 얼버무리자 아르테미르가 답답하다는 듯 다소 높은 언성으로 그린 후작에게 말했다.
“어서 말해 보게, 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가?”
아르테미르의 언성이 이렇듯 다소 높아지자 그린 후작이 꺼림칙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실은 전쟁상인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어려울 듯싶습니다.”
아르테미르는 전쟁상인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기에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린 후작을 향해 말했다.
“전쟁상인?”
그러자 그린 후작의 옆에 있던 자이 백작이 대답했다.
“그들은 한마디로 전쟁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상인들이지요.”
아르테미르가 다소 껄끄러운 표정으로 자이 백작을 향해 말했다.
“전쟁을 이용해서 돈을 번다고?”
자이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비록 최근에 큰 전쟁은 없었지만 영지 간의 다툼이란 언제나 있는 법이지요. 그리고 작은 다툼이지만 확실히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귀족들은 이런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전쟁상인들에게서 돈을 구하곤 합니다. 그러면 전쟁상인들은 그들 나름대로 상황을 파악하고 이길 만한 가능성이 있는 쪽에 돈을 투자하지요. 그리고 다툼이 끝나면 그 이상의 보상을 챙기는 것이지요.”
아르테미르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상인에게 전쟁만큼 돈이 되는 것이 있겠는가?”
자이 백작 역시 이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다소 부정적인 표정으로 아르테미르를 향해 말했다.
“그러나 국가 간의 전쟁은 근 십 년 만인지라 아무리 생각해도 선뜻 나설 만한 인물이 있을지 솔직히 의문입니다.”
자이 백작의 말에 그린 후작이 대답했다.
“아마도 힘들 것입니다. 저들을 보십시오.”
그린 후작이 이렇게 연병장의 병사들을 가리키며 계속해서 말했다.
“본시 상인이란 돈을 생명처럼 여기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계산이 누구보다 철저한 자들이지요. 그들이 저런 오합지졸을 보고 과연 돈을 투자하려 하겠습니까?”
아르테미르가 이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린 후작을 향해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어찌 되었건 자네는 돈을 댈 만한 전쟁상인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그린 후작이 솔직하게 이를 인정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제가 아는 사람 중에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전쟁상인인 킹죠라는 인물이 있긴 합니다만…….”
그린 후작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반색하면서 말했다.
“그가 확실히 돈을 댈 만한 여력은 있는가?”
그린 후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확실히 돈을 댈 만한 여력은 있을 것입니다. 실은 과거 아린 공작을 모실 당시 몇 번 접촉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이런 그린 후작의 말에 아르테미르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발칙하군, 감히 그들이 황실의 역모에까지 관여하려 했단 말인가?”
그린 후작은 그 역모에 자신도 관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소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실제로 당시 그들에게 적지 않은 돈을 원조받았습니다.”
아르테미르가 궁금증 어린 표정으로 그린 후작을 향해 말했다.
“적지 않은 돈이라면 얼마를 말하는가?”
이에 그린 후작이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당시 아린 공작은 5만의 병력을 무장시킬 생각이었습니다. 황실에 버티고 계신 전하와 외부의 10명의 공작들을 생각한다면 그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이지요. 그때 킹죠는 흔쾌히 아린 공작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일부를 먼저 선금으로 보내왔습니다. 그러니 2만 5천의 병력을 위한 군량 정도는 크게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린 후작의 말에 아르테미르는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괜찮군, 그렇다면 자네는 아직도 그들과 연락이 가능하다는 말이지?”
그린 후작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아르테미르가 재빨리 그린 후작을 향해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자네는 그를 이곳으로 데려오는 데 총력을 기울이게.”
아르테미르의 말에 그린 후작이 다시 조심스레 말했다.
“전하, 진정으로 저들을 이끌고 호손 제국과 전쟁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르테미르는 이런 그린 후작의 말에 더 이상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곧장 자이 백작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에 그린 후작이 마지못해 허리를 숙이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자 아르테미르가 자이 백작을 불렀다.
“이보게, 자이.”
아르테미르가 자신을 찾자 자이 백작이 공손히 대답했다.
“네, 전하. 하명하시지요.”
아르테미르는 이미 모든 생각을 정리한 듯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는 일단 저들을 인솔해 온 기사들을 회의실로 모아 주게.”
이런 아르테미르의 언행에 자이 백작 역시 결심을 굳힌 듯 결연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전하.”
자이 백작의 대답을 듣자마자 아르테미르는 저택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자이 백작 역시도 대답과 동시에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연병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잠시 후, 자이 백작을 포함한 45명의 기사들이 회의실에 모였다.
이들은 회의실에 모이기가 무섭게 자이 백작에게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의 질문은 자이 백작이 아르테미르에게 했던 질문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백작님, 진정 저들을 이끌고 전쟁이 가능하리라 생각하십니까?”
기사들은 이곳저곳에서 자이 백작에게 이렇게 따지듯 묻고 있었다.
자이 백작이 그러했듯이 기사들 대부분이, 아니 전부가 이번 전쟁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자이 백작 스스로도 이번 전쟁에 다소 회의적인 입장이었기에 이들에게 이렇다 할 대답을 줄 수 없었다.
그때 스르륵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아르테미르가 모습을 드러내자 일순간 회의실에 침묵이 흘렀다.
자이 백작이 먼저 아르테미르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아르테미르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실제로 이곳에서 아르테미르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자이 백작이었다.
이곳의 기사들은 대부분이 하급 기사들, 아르테미르를 한 번도 볼 기회가 없었기에 자이 백작이 인사를 하자 비로소 등장한 사람이 공작임을 알고는 허리를 숙였다.
“아르테미르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이렇게 기사들의 인사를 받으면서 아르테미르는 천천히 중앙에 마련된 탁자에 함께 비치된 자신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쓱 자신을 바라보는 기사들을 훑어보면서 말했다.
“제장들을 만나게 되어 기쁘네. 앞으로 제장들이 나를 많이들 도와주시게.”
아르테미르의 인사말에 기사들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기사들은 나름대로 주의 깊게 아르테미르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아르테미르는 이제 갓 30을 넘긴 나이로 알려져 있었다.
또한 현재 제국에서 가장 명망 높은 기사로 알려져 있기도 했다.
친정 의례 당시에 보였던 그의 신위는 부풀려질 대로 부풀려졌고, 젊은 기사들 중에서 아르테미르를 우상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때문에 그를 향하는 기사들의 눈빛에는 호기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외양에서는 크게 자신들과 다른 점을 쉽게 발견할 수는 없었다.
대체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었다.
이내 몇몇 사람들의 눈에 실망의 기색이 엿보이고 있었다.
그런 시선 속에서 아르테미르는 자신이 가져온 문서를 천천히 탁자 위에 펼쳤다.
자이 백작이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한 듯 아르테미르에게 물었다.
“전하, 그것이 무엇입니까?”
아르테미르는 다시 한 번 기사들을 스∼윽 훑어보면서 말했다.
“이것은 앞으로 일주일간 자네들이 병사들에게 알리고, 또한 자네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네.”
아르테미르는 펼쳐진 문서를 자이 백작에게 전했고, 자이 백작이 가장 먼저 그 문서를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계속해서 문서는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옮겨졌다. 그사이 아르테미르가 자이 백작을 향해 말했다.
“자네가 앞으로 이 모든 것을 관리해 주게.”
자이 백작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전하.”
그런 와중에 문서를 읽어 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실로 심상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