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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1권(22화)
제6화 출정 준비(3)


연병장에 도착한 아르테미르는 조콜 남작이 훈련을 지휘하는 병사들 앞에서 멈춰 섰다.
병사들의 시선이 아르테미르에게 향했고, 비로소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을 느낀 조콜 남작이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아르테미르 공작이었다.
무언가 섬뜩한 느낌이 조콜 남작의 가슴을 스치듯 지나갔다.
조콜 남작, 그는 어려서부터 검술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인물이었다.
한때 검술의 신동이라며 주변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고, 그 스스로도 자신이 천재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때로는 그 뛰어난 재능이 오히려 자신을 망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콜 남작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조콜 남작은 노력이란 모자란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더구나 조콜 남작이 살았던 작은 시골구석에서는 그런 그의 망상을 깨어 줄 적수조차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그가 추구하는 검은 사람들의 눈에 띄기 좋은 화려한 동작 일색이었다.
그 덕분에 그는 그곳 영주의 눈에 들어 기사가 되었지만, 그 이후 그를 제대로 인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사가 된 이후, 그는 자신의 재능에 스스로 심취해 난봉꾼의 길을 걸었고, 자신에게 돌아오는 비난을 자신의 재능을 시기한 다른 기사들의 탓으로 돌렸다.
그 결과로 지금 이곳까지 쫓겨 온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 역시도 조콜 남작의 생각으로는 결코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곳에 도착한 이후 그의 불만은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일단 승산이 없는 전쟁에 자신과 같은 천재가 참여한다는 것부터가 불만이었다.
또한 이런 쓰레기 같은 병사들에게, 이런 쓰레기 같은 동작을 훈련시키는 자체가 한심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심지어 아르테미르에 대한 시각 역시도 부정적이었다.
자신과 비슷한 연배, 능력도 없이 황제의 뒷배를 봐 주다가 운 좋게 출세한 인물, 그가 느낀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그런 자가 감히 지금 자신을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결국 조콜은 아르테미르를 향해 피식 비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역시 어디에든 천재를 시기하는 무리는 있기 마련이지, 그렇게 나를 째려보면 어쩌겠다는 것인가?’
가뜩이나 전쟁을 수행할 기사가 부족한 상황, 이런 상황에서 아르테미르가 감히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조콜 남작은 이렇게 아르테미르를 삐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르테미르가 그런 그를 향해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두 번째의 군율이 무엇인가?”
아르테미르의 말에 조콜 남작의 눈빛이 묘하게 일렁거렸다.
‘꼴에 지금 나를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조콜 남작은 아르테미르를 향해 이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절대 아르테미르가 자신을 죽이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지금 이곳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는 기사는 60명 남짓이었다. 한마디로 지휘관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유능한 자신을 죽이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조콜 남작에게 아르테미르는 그런 바보였다.
“나를 이겨라, 허면 살려 주겠다.”
이런 아르테미르의 말에 조콜 남작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어디를 가나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인간은 있기 마련이지.’
조콜 남작은 이렇게 생각했다.
고작 병사들에게 어줍지 않은 동작이나 훈련시키는, 운이 좋아 공작이 된 이름뿐인 기사 따위가 결코 자신의 적수는 될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진정이십니까?”
조콜 남작이 확인하듯 아르테미르에 물었다.
아르테미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조콜 남작이 기다렸다는 듯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보란 듯 자신의 화려한 검 실력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조잡한 아르테미르의 칼질에 대한, 그리고 아르테미르의 어쭙잖은 도전에 대한 그 나름의 경고였다. 이런 조콜 남작의 현란한 움직임에 연병장 병사들의 이목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조콜 남작이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이야말로 자신을 알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조콜 남작의 움직임은 더욱 화려해졌고, 이를 지켜보던 몇몇 병사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혼자 한바탕 검무를 선보인 조콜 남작은 이래도 덤빌 테냐, 라는 표정으로 아르테미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테미르는 한바탕 광대놀음을 본 사람처럼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렇듯 자신의 실력을 선보였음에도 너무나 담담한 아르테미르의 태도에 조콜 남작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가?’
조콜 남작이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아르테미르의 검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설마 보검을 믿고 허세를 부리는 것인가?’
얼마 전 목각 인형을 베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런 어설픈 동작에도 너무나 깔끔하게 베어진 목각 인형, 조콜 남작은 아마도 그것이 보검의 위력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마치 이런 그의 마음을 아는 듯 아르테미르가 한 병사의 앞으로 다가갔다.
“검을 좀 빌려 주게.”
갑작스레 공작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자 그 병사는 얼떨결에 들고 있던 자신의 검을 아르테미르에게 내밀었다.
아르테미르가 검을 쥐며 조콜 남작에게 말했다.
“이제 준비는 다 끝났는가?”
아르테미르가 기다리기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자, 조콜 남작이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어리석은, 결국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파는구나.’
이제 꺼리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의 화려한 실력을 모두에게 보여 주는 일만 남은 것이다.
그런 와중에 조콜 남작은 상대에게 주의를 주며 상대를 배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검에는 눈이 없으니 부디 조심하시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조콜의 검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허공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확실히 병사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반면에 아르테미르는 담담히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지척에 이르는 순간 아르테미르의 검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간 병사들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아르테미르의 동작은 그들이 여태껏 훈련해 왔던 바로 그 평범한 동작이었다.
그리고 그 단순한 동작에 조콜 남작의 화려하던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고 이내 조콜 남작의 머리가 얼마 전 목각 인형과 마찬가지로 바닥으로 떨어졌고, 머리와 분리된 그의 목이 마지막까지 화려하게 피 분수로 장식하고 있었다. 아르테미르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손에 든 검을 병사에게 돌려주면서 말했다.
“일 검에 혼을 실어라, 연습에서 흘린 한 방울의 땀이 훗날 수십 방울의 피가 되리니 단 한 번을 휘두르더라도 최선을 다하라. 허면 언젠가 너희들이 나와 영광을 함께 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아르테미르에게서 검을 받아 든 병사는 아르테미르와 자신의 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순간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솟구쳐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그 병사는 자신의 검을 하늘로 높이 치켜들었다.
“아르테미르 공작 전하 만세, 만세.”
그 병사를 시작으로 전염병처럼 만세의 물결이 퍼지기 시작했다.
군중심리란 참 묘한 것이었다.
연병장의 병사들 모두가, 심지어 멀리 떨어져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병사들마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모두가 힘껏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이런 병사들의 함성 속에서 아르테미르는 자신의 뒤에 선 쇼트닝 남작을 바라보았다.
쇼트닝 남작이 다소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병사들이 훈련을 게을리한 것에는 자신의 책임도 적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 아르테미르가 처벌한 조콜 남작을 자신이 처벌했어야 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르테미르는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쇼트닝 남작에게 말했다.
“쇼트닝 남작, 저자의 목을 연병장 중앙에 걸어 군율의 지엄함을 병사들에게 각인시키시오. 그리고 차후 또다시 내게 이런 모습이 보인다면 그때는 쇼트닝 남작 자네 역시도 그 책임을 면치는 못할 것이오.”
아르테미르의 말에 쇼트닝 남작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한동안 계속되는 병사들의 함성 속에서 아르테미르는 연병장 전면에 마련된 단상에 올랐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역시 병사들이 훈련하던 단순한 동작이었다.
이런 아르테미르의 움직임이 계속되자 병사들의 함성이 점차 사그라졌다.
지켜보는 병사들에게도 지휘하는 기사들에게도 지금 단상에서 검을 휘두르는 아르테미르의 기백이 충분히 전해지고 있었다.
아르테미르는 그렇게 검을 휘두르면서 쇼트닝 남작을 향해 말했다.
“훈련을 시작하시오.”
아르테미르의 말에 쇼트닝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변의 기사들을 향해 손짓을 보냈다.
하지만 이미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검을 휘두르기 시작한 상태였다.
검을 휘두르는 병사들은 순간순간 아르테미르의 움직임을 힐끗힐끗 쳐다보면서, 그의 동작 하나하나를, 그의 기백 하나하나를 닮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마차에서 이를 지켜보던 뚱뚱한 마부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졌다.
“저자가 아르테미르인가?”
그의 혼잣말이었다.
하지만 앞에서 말을 탄 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에 화답했다.
“저분이 바로 아르테미르 공작 전하이십니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기사는 다름 아닌 그린 후작이었다.
한동안 아르테미르는 연병장에서 병사들과 호흡을 같이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일까?
그린 후작이 그의 뒤에 다가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전하, 손님을 모셔 왔습니다.”
그린 후작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움직이던 검을 멈추었다.
이미 아르테미르의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그가 얼마나 혼신의 힘을 기울여 검을 휘둘렀는지를 보여 주는 장면이었다.
아르테미르가 쇼트닝 남작을 향해 손짓하자 쇼트닝 남작이 단상으로 올라왔다. 아르테미르는 그의 어깨를 토닥거리면서 말했다.
“지금부터는 이 자리에서 자네가 나를 대신해 계속해서 지휘를 하게.”
쇼트닝 남작이 그야말로 공손히 허리를 굽히자, 비로소 아르테미르가 그린 후작과 함께 저택으로 향했다.
아르테미르가 떠나고 난 빈자리, 그곳에선 쇼트닝 남작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병사들의 뜨거운 열기를, 그리고 단상 아래 흥건하게 고인 땀 또한 직접 볼 수 있었다.
쇼트닝 남작이 고개를 돌려 아르테미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람은 분명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왠지 그의 등이 거대해 보였다.
얼마 전까지 그가 보아 왔던, 이전의 아르테미르와는 분명 또 다른 느낌이었다.
‘기사로서도 나는 아직 멀었는가?’
흥건하게 고인 땀을 바라보면서 쇼트닝 남작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이내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그런 그의 모습 역시도 지금까지 보였던 그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그들이 도착한 지 얼마나 됐는가?”
아르테미르의 물음에 그린 후작이 대답했다.
“한 두어 시간 정도 된 듯합니다.”
그린 후작의 말에 아르테미르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어렵게 모신 귀한 손님들을 이토록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다니? 왜 그것을 이제야 내게 알렸는가?”
그린 후작이 자신의 실수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전하, 이것은 제 뜻이 아니었습니다. 손님께서 절대로 훈련을 방해하지 말라시며 애써 저를 막았습니다.”
아르테미르가 다소 의외라는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가?”
그린 후작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훈련이 지나치게 길어지는지라, 어쩔 수 없이 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렇게 전하를 찾았습니다.”
아르테미르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손님들은 어디에 계신가?”
그린 후작이 공손히 대답했다.
“지금 자이 백작이 귀빈실에서 차를 대접하고 있습니다. 곧장 가시겠습니까?”
아르테미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
“아닐세, 이렇게 땀에 젖은 몸으로 손님들을 맞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일단 손님들을 밀실로 모시도록 하게, 내 곧 그리로 가겠네.”
그린 후작이 고개를 숙이고 재빨리 저택으로 달렸다.
잠시 후 아르테미르가 저택에 있는 작은 밀실에 도착했다.
밀실은 사방이 완전히 밀폐되어 있었고, 천장에 작은 공기구멍만이 존재했다. 그 작은 공기구멍은 아르테미르의 방으로 통하는 것이었다. 오로지 아르테미르의 방에서만 이들의 대화를 엿들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
더불어 등불이 없다면 서로의 얼굴조차 확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아르테미르가 보안에 신경을 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우선 전쟁상인들과의 접촉 자체가 그다지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었다.
더불어 이곳에서 진행되는 대화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