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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영웅 폴 1(6화)
2장. 사냥꾼이 용병이 된 까닭(3)


영주성에 도착해서 보니 아주 가관이었다. 성 주변에는 이번 징집 대상이 된 사람들이 천막도 없이 노숙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모닥불 근처에 모여 근심 어린 한숨을 내쉬는 것뿐이었다.
몇몇 마을 사람을 발견한 나는 그들에게 아는 척이라도 해 주고 싶었지만 지금 나는 이 마을 사람이 되어서는 곤란했기에 애써 그들을 외면하고 지나쳤다.
성문에서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신분 검사가 철저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행여나 이곳 영지 출신인 자가 발각되면 그 즉시 징병 대상자로 간주되어 어딘가로 끌려갔다.
“역시…….”
나는 그 모습에 짙은 한숨을 내쉬며 그들의 눈을 피해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
용병이 되기 위해서는 성안으로 들어가 용병 길드의 정식 허가를 받아야 했기에 조금 난감한 일이었다. 그러나 마음먹고 성안으로 들어가고자 한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내가 이곳에서 지낸 것만 20년이다. 여태 비밀 루트 하나 모른다면 말도 안 되지.
사실 비밀 루트라고 할 것도 없다. 성 주위의 개울을 통해 뚫린 하수구를 통한다면 쉽게 성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만일 이곳이 수도 근처의 성이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이런 벽촌의 성에 뭐 하나 온전한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악취를 참아 가며 겨우겨우 성 내부로 들어온 나는 병사들의 눈을 피해 가죽을 처분한 뒤 그 즉시 용병 길드로 향했다.
“호오! 의외로 사람이 많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기가 폐가인지 사람 사는 곳인지 의심이 들 정도의 있으나 마나 한 곳이 바로 이 용병 길드라는 건물이었지만, 여기저기서 파병한다는 소문이 돌았는지 꽤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
나는 그들의 틈을 뚫고 들어가 이곳 지부장인 파커슨 아저씨를 찾았다.
“야, 거기! 싸우려면 나가서 싸워!”
“이 자식들, 여기가 무슨 술집인 줄 알아!”
늘 백수 저리 가라 할 만큼 빈둥빈둥 놀기만 하던 파커슨 아저씨는 몰려든 용병들로 인해 정신이 없어 보였다. 본인은 멋지다고 생각하는 덥수룩한 턱수염이 휘날릴 정도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용병들과 실랑이를 벌이던 그는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내 모습을 확인했는지 깜짝 놀란 표정이 되어 다가왔다.
“폴 아니냐! 대체 여기는 어떻게?”
“아하하. 뭐, 운이 좋았지요.”
아저씨는 반갑다는 듯 내 손을 잡아 왔다.
파커슨 아저씨는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시다. 우리 아버지가 왕년에 이름을 날릴 적에 잠시 용병의 길로 접어든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우리 아버지가 목숨을 구해 준 인연으로 결국 아버지를 따라 이곳으로 와 정착한 분이다.
지금 내 사냥 기술을 비롯한 각종 잡기는 거의 이 아저씨한테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하수구의 비밀 루트도 이 아저씨가 알려 주신 거다.
아무튼 그런 반가움도 잠시, 아저씨는 주위의 눈을 살피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 영지의 남자라는 남자는 전부 다 잡혀 가고 있다는 거 알고 있지? 네 녀석 말대로 운이 좋았다만 언제까지 그럴 순 없지 않겠느냐?”
아저씨는 몸을 숨길 것을 권유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 사실 저 용병이 되려고 왔어요.”
“뭐어?”
난데없는 내 말에 턱이 빠져라 입을 쩍 벌리던 아저씨는 이내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이런 개죽음에 널 끼어들게 할 순 없다. 그냥 어디 얌전히 있어라.”
“아저씨, 저 못 믿어요? 이것 보세요.”
나는 그러면서 내가 입고 있던 조끼를 보여 주었다.
“이게 뭔데 그러냐?”
전혀 짐작조차 못하시는 아저씨에게 나는 놀랄 만한 말을 전해 주었다.
“이거 학살자 녀석의 가죽이에요. 물론 제가 잡았죠.”
“저, 정말이냐?”
못 믿겠다는 아저씨에게 나는 단검을 꺼내 조끼를 한번 베어 보였다. 역시나 예상대로 흠집조차 남지 않았다. 그제서야 아저씨는 내 말이 사실임을 알았는지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네가 학살자를 잡을 만큼 뛰어난 실력이라는 것은 인정하마. 하지만 전쟁은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너 같은 애송이는 언제 어디서 날아드는 눈먼 칼에 맞아 목이 날아가는 곳이 바로 전쟁터라는 곳이다. 네가 나 몰래 학살자를 잡은 것도 용서가 안 되는 일이지만 그것은 이미 지난 일이니 넘어간다 쳐도 이번만큼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하아.”
나는 절로 한숨을 내쉬었다. 날 위하는 아저씨의 마음에 사실 반발은 예상한 바지만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다 날 생각하기에 이런 거지 만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었다면 관심도 없었을 터였다.
“아저씨, 잠깐만.”
나는 아저씨를 이끌고 용병 길드 안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런 갑작스러운 내 태도에 아저씨는 당황스러워하시면서도 별다른 저항 없이 날 따라 사무실로 들어섰다.
행여 소리가 새어 나가기라도 할까 봐 단단히 문을 틀어막은 후에야 나는 아저씨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아저씨, 지금부터 들은 이야기는 절대로 함부로 입 밖에 꺼내서는 안 돼요.”
“뭐, 뭐냐? 갑자기 분위기 잡고?”
내 모습에 적잖이 당황한 듯 말까지 더듬는 아저씨였다. 하지만 나는 답을 듣겠다는 듯 계속해서 아저씨를 바라볼 뿐이었다.
모든 것은 아저씨를 위해서였다. 아저씨를 설득시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꺼낸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자칫 이게 소문이라도 날 경우에 커질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사실 여부를 떠나 분란을 일으킨 죄로 목이 달아나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런 내 모습에 비로소 지금부터 내가 할 이야기가 결코 허투루 들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깨달았는지 아저씨 역시 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알았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발설치 않으마.”
그때부터 나는 내가 겪은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학살자가 죽고 몬스터가 갑자기 늘어나 무슨 일인지 조사를 해 보기로 했다는 이야기부터 조사하면서 발견한 얀 제국의 군대와 그들의 숨겨진 목적까지.
물론 어디까지나 내 사견을 덧대 놓은 것이긴 했지만 아저씨도 그런 내 말에 크게 공감하는 듯 한동안 말이 없으셨다.
“흐으음,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큰일이구나. 자칫 그들이 발견하는 것을 찾지 못한다면 이곳까지 넘보려 할 것이 아니냐.”
“제 말이 그 말이에요. 이제 제가 용병이 되려는 이유를 아셨겠죠? 저 역시 개죽음 따윈 사양이에요. 그러니까 더더욱 용병이 되어 남작을 만나야 하는 거라고요. 남작을 만나 이 상황을 잘 설명한다면 분명 파병을 취소할 거라고 봐요. 그도 생각이 있다면 이대로 턱 밑에 적을 두고 떠나지는 않겠죠.”
“후우, 그 말대로만 된다면야 다행일 텐데…….”
뭔가가 꺼려지는지 한참 동안이나 생각을 거듭한 끝에야 아저씨는 어렵사리 허락을 해 주셨다.
“좋다. 네 계획을 한번 믿어 보마. 그나저나 용병 등급은 어느 정도가 적당할 것 같으냐?”
보통 이런 전쟁 시 찾아오는 용병들 대부분은 시험이고 뭐고 C급을 매기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발언권을 얻기 위해서는 너무 평범해서는 곤란하다.
“B급 정도가 괜찮을 듯싶네요. 어차피 쓸 일도 없을 테니.”
“그럼 잠시만 기다리고 있거라.”
그렇게 해서 나는 B급 용병이란 타이틀을 하나 걸게 되었다.
아저씨의 신신당부를 들으며 용병 길드를 나온 나는 그 즉시 용병 모집을 담당하는 곳을 찾아갔다. 영주의 저택 앞에서 기사 차림의 사내가 용병들을 일일이 접수하고 있었는데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 앞에 섰다.
“이름?”
듣는 것만으로도 지겨움이 물씬 풍겨 나는 무미건조한 목소리. 내 딴에는 조금 있어 보이려 잔뜩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폴.”
“폴이라……. 훗.”
기사 녀석은 내 목소리에 가볍게 웃음을 머금었다. 하나 그건 누가 봐도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제길, 조금 어색했나?’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등급은?”
“B급.”
하지만 이어지는 내 말에 꽤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는 녀석. 생긴 것답지 않다, 이거지. 보통의 용병이라면 우락부락한 것이 사실이지만 나는 겉으로 봐서는 툭 치면 날아갈 듯 호리호리하게 생겼다. 다시 말하지만 얼굴 역시 어디 가서 빠지는 것도 아니고.
거짓으로 만든 용병패이니만큼 찔리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그만큼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더욱이 녀석에게 작게나마 한 방 먹여 줬다는 생각에 아까의 비웃음은 잊기로 했다.
게다가 지금 나는 아쉬운 소리를 할 입장이었다.
여기까지 왔다면 높으신 분을 만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일단 B급 용병이라는 게 흔하지는 않지만 적잖이 있는 것도 사실. 나는 이번 전쟁에서 용병들을 이끌 임시 단장이 되길 원한다는 설정으로 접근하려 했다.
한마디로 로비를 하겠다는 거지.
나는 주저하듯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이봅시다, 기사 양반.”
“무슨 일인가.”
“이번 전쟁에서…… 거, 뭐…… 있잖수? 그래도 용병들끼리 서열을 매겨야 하는데……. 크흠흠.”
그렇게 말한 나는 가죽을 판 돈의 절반을 슬쩍 건네며 말을 이었다.
“기왕 이렇게 찾아온 거, 높으신 분께 직접 인사를 드리는 게 또 예의지 않소.”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아무 반응이 없다면 그건 둘 중의 하나다. 하나는 눈앞의 기사가 말 그대로 기사도에 충실한 기사 중의 기사이거나 아니면 그냥 말귀도 못 알아 처먹는 등신.
다행히도 녀석은 둘 다 아닌 듯, 이내 내가 건넨 돈을 슬쩍 살펴보는 듯하더니 자연스럽게 품속으로 집어넣으며 입을 열었다.
“내 특별히 자리를 마련할 터이니 잠시만 기다려 보게나. 커험험.”
그렇게 말하며 이내 어딘가로 사라지는 녀석. 사실 녀석이 아쉬울 것은 없었다. 녀석이야 자리만 마련하면 그걸로 된 거다. 내가 임시 단장이 되건 말건 그건 내 능력 나름이었다.
물론 여기서의 능력은 용병으로서의 그것이 아닌 얼마나 이빨을 잘 까느냐, 뭐 그런 종류의 능력이었다.
잠시 뒤 기사의 안내를 받아 저택 내부로 들어간 나는 한 방문을 앞에 두고 기사 녀석으로부터 신신당부의 말을 들어야 했다.
“이 안에 들어가면 입단속을 잘해야 할 거다.”
한마디로 여기저기 까발리고 다니지 말라는 얘기. 물론 나도 생각이 있는지라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내 대답에 만족스럽다는 듯 한차례 고개를 끄덕인 그는 곧 문 안쪽에 있는 누군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집행관님, 좀 전에 이야기했던 자가 집행관님을 뵙길 청합니다.”
순간 나는 기사 녀석의 말에 인상을 팍 구겼다.
‘집행관이라니. 제길, 남작이 아니었던가.’
집행관 쿠시오스. 준남작의 신분으로 밀자크 남작의 가신 중 한 명이었다. 영지 내의 대소사를 관리하는 인물인데 그다지 평이 좋지 않은 인물로 유명했다. 돈이 되는 거라면 뭐든 마다하지 않는 악독한 심보를 가졌다던데, 하긴 그러니까 이런 로비가 될 수 있는 거겠지만 그래도 솔직히 불안하다. 과연 이자가 내 말을 듣고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들라 하라.”
쿠시오스의 대답이 들려오고, 나는 그런 불길한 마음을 안은 채 녀석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이렇게 인사드리게 되어 영광입니다. 폴이라 합니다.”
나는 최대한 잘 보일 필요가 있었기에 딴에는 제법 멋들어진 인사를 건넸다. 그것이 만족스러웠는지 쿠시오스는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허허허. 그래, 무슨 일로 나를 보자고 한 것인가.”
“다름이 아니오라, 이번 용병들의 임시 단장 건에 대해서 저를 단장으로 써 주십사 하여 뵙기를 청한 것입니다.”
“임시 단장이라……. 허허.”
곤란하다는 듯 몇 가닥 되지도 않는 염소수염을 쓰다듬는 쿠시오스. 눈은 쫙 찢어지고 입은 일전에 내가 쑤셔 놓았던 학살자 녀석의 항문처럼 잔뜩 오므라져 있는 게 딱 쥐의 면상처럼 생겼다. 괜히 밉상인 얼굴이다.
‘쥐새끼 같은 놈. 내가 네 속을 모를 리가 있겠냐.’
나는 속으로 오만가지 욕을 다 퍼부으며 배낭에서 보자기로 싼 뭔가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대번 눈을 빛내는 쿠시오스. 녀석에게 이런 것까지 건네야 하나 짐짓 속이 쓰라려 왔지만 그래도 모두를 위한 길. 나 하나 희생한다면 남는 장사지.
“작은 성의입니다.”
나는 보자기를 열고 그것을 녀석에게 가져다주었다. 녀석은 잠시 살펴보는 듯하더니 대번 그것의 정체를 알고는 감탄성을 발했다.
“호오, 이것은 오우거의 가죽이 아니더냐! 이 귀한 것을 어찌!”
다행히도 마음에 든 듯 녀석의 입가엔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