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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영웅 폴 1(8화)
3장.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 차이(2)
나는 어떻게든 녀석의 틈으로 파고들며 한 방을 노리려 했지만 덩치만큼이나 긴 리치가 그것을 허락지 않았다. 아무리 행동이 굼뜨다고는 해도 이미 내가 다가가려 하면 다른 손이 날아드니 나는 섣불리 공격을 감행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쫓기듯 녀석의 주위를 빙빙 돌 수밖에 없었다.
“워! 워! 애송이, 뭐 하는 거냐?”
“무섭다고 엄마를 찾아봐야 소용없다고! 하하하하!”
그런 내 모습에 주위에서는 온통 날 향한 조롱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긴 그들이 보기에는 내가 저 엄청나게 커다란 주먹에 맞아 금방이라도 나가떨어질 것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나는 그런 녀석들의 말소리는 모두 무시했다.
‘싸움은 지금부터다. 멍청한 녀석들, 덩치가 크고 힘이 세다고 다가 아님을 알게 될 거다.’
맞는 말이다. 그건 사냥꾼으로서 살아오면서 내가 터득한 일종의 진리와도 같았다. 생각해 보라. 내가 학살자를 잡았을 때 나는 결코 녀석을 힘으로 잡지 않았다. 순수한 힘에서 나는 녀석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비단 학살자뿐만이 아니다. 오크나 오우거 모두 나보다 덩치도 크고 힘도 강한 녀석들이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녀석들을 사냥했다. 그 말인즉, 힘이라는 부분이 사냥꾼의 모든 것을 결정짓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사냥꾼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은 바로 이 두 가지. 인내와 체력이다.
한번 정한 목표가 빈틈을 보일 때까지 결코 한눈을 팔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인내. 또한 몇 날 며칠 밤을 지새우더라도 목표를 뒤쫓아 녀석을 지치게 만든다. 그것이 바로 체력.
비록 난 힘이 강하지는 않지만 인내와 체력에 있어서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덩치는 내 사냥감. 나는 내 체력을 믿고 참고 또 기다릴 뿐이다.
녀석이 지칠 때, 그때야 비로소 나의 진정한 사냥이 시작될 것이다.
삼십여 분이 지났지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덩치는 날 잡기 위해 주먹을 뻗어 왔고, 나는 그것을 피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큰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덩치의 상태였다.
“훅, 훅…….”
거칠게 내뿜는 숨결에 맞춰 그 지붕만 한 어깨가 크게 들썩거렸다. 좀 전부터 녀석은 그저 제자리에 서서 날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지친 녀석과는 달리 나는 여전히 생생한 상태였다. 가벼운 비웃음을 매단 채 나는 녀석을 향해 입을 열었다.
“덩치만 크고 힘만 셌지, 이거 원 형편없구만. 그래서야 어디 전쟁에 나가서 제대로 싸우기나 할 수 있겠어?”
“…….”
에르손이라 했던가. 덩치는 그런 내 조롱에도 분하다는 듯 아랫입술만을 깨물 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구구절절 내 말이 옳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비단 녀석뿐만이 아니었다. 지켜보던 모두는 처음 날 조롱하던 얼굴에서 ‘뭐 저런 괴물이 다 있지’ 하는 표정이 되어 날 바라보고 있었다.
“하는 짓이 불쌍해서 내 이쯤에서 용서해 줄 수도 있는데.”
“흥, 어림없는 소리! 난 아직 더 싸울 수 있다!”
콧김을 뿜어내며 말하는 에르손. 미안하지만 나도 예의상 해 본 말이었다.
더 싸울 수 있다는데 굳이 말릴 필요는 없지.
“네 녀석들이 무시했던 애송이의 실력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도록.”
그렇게 선언한 나는 일순간 자세가 흐트러져 있던 에르손을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헛!”
헛바람과 함께 뒤늦게 주먹을 휘둘렀지만 이미 나는 녀석의 무릎 관절을 차고 빠진 뒤였다.
“이게 무슨 짓이냐!”
뭔가 본격적인 것을 기대한 것인지 분노한 표정을 짓는 에르손에게 나는 손가락 하나를 까딱거리며 말을 이었다.
“무슨 짓이기는, 아마 두고 보면 무슨 짓인지 알게 될 거다.”
그 뒤부터는 또다시 일방적인 구도가 연출되었다. 빈틈이 보이면 나는 어김없이 달려들어 에르손의 무릎을 찼고, 녀석은 계속해서 그런 내 행동에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잠시 뒤, 모두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툭!
가볍게 발을 가져다 댄 듯 녀석의 무릎을 차고 빠지는 나를 잡기 위해 녀석이 순간 몸을 크게 이동시켰다. 하지만 녀석은 갑자기 급하게 설사라도 나올 것 같은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리더니 크게 몸을 휘청거렸다.
‘옳지! 걸렸다!’
속으로 쾌재를 부른 나는 그때부터는 더욱더 집요하게 녀석의 아픈 부위만을 노렸다. 인내와 끈기, 그리고 내 괴물 같은 체력이 만들어 낸 기회.
털썩!
“크윽! 빌어먹을!”
결국 덩치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세, 세상에! 에르손이 저런 애송이한테 지다니!”
“마, 말도 안 돼!”
모두가 원하던 결과와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지자 다들 입을 쩍 벌린 채 경악했다. 아마 녀석들은 왜 에르손이 졌는지 알지도 못할 게다.
본인을 제외하고는 말이지.
나는 허탈하게 주저앉아 있는 에르손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에르손은 그렇게 다가오는 날 바라보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었다. 분하지만 내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네. 애송이라 한 것을 취소하지.”
의외의 말이었다. 하지만 용병들의 생리를 생각해 보면 이해하지 못할 말도 아니었다. 그들로서는 어찌 되었든 자신의 목숨을 맡겨야 할 단장인 나인데 딱 봐도 애송이처럼 보였으니 불안함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시비를 가장하여 내 실력을 시험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이래서야 원, 몇 곱으로 갚아 주겠다는 말도 못하겠군. 쳇.’
나는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취소할 필요는 없어. 사실 네 말이 맞으니까. 용병으로 참전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니까 애송이 맞지.”
“애송이치고는 대단한 실력이었는데……?”
“훗, 그거야 네 녀석이 방심했으니까 그렇지. 사실 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냥꾼이었다.”
“사냥꾼? 그렇군. 역시 그런 거였어. 크하하하하하!”
에르손은 내 말에 비로소 뭔가를 깨달았는지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비단 녀석뿐만이 아니라 지켜보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를 그렇게 웃었을까? 잠시 뒤, 겨우겨우 웃음을 진정시킨 에르손은 그 커다란 손을 불쑥 내밀었다.
“애송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이렇게 날 이겼으면 된 거지. 전쟁, 까짓것 별거 아니야.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 나만 믿으라고.”
녀석은 내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었는지를 알고 있었던 듯 그렇게 내 불안을 달래 주었다. 생긴 것답지 않게 날 배려해 주는 모습이 잠시 동안이나마 쌓아 왔던 그의 이미지를 많이 희석시켜 주었다.
‘어쩌면 괜찮은 녀석인지도.’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한다.”
나는 내 머리통만 한 녀석의 손을 굳게 움켜잡았다.
단순한 남자들이란 표현을 써야 할까? 언제 다퉜냐는 듯 금방 친해져서 어울리는 우리들. 죽이네 살리네 할 때는 언제고 금방 말을 트고 친구가 되었다. 비록 에르손이 나보다 8살이나 더 많았지만 녀석은 나이 따위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부터 형님 대접해 줄 생각도 없었기에 나야 아쉬울 것 없이 그렇게 녀석과 친구가 되었다.
싸움의 열기도 식고 내일의 출발을 위해 용병들은 하나 둘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그렇게 태평히 잠에 빠져드는 사람들의 모습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너무나도 태평하다고 할까? 내일이면 기나긴 행군이, 그리고 그 행군 끝에는 아비규환의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건만, 마치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행동하는 그 모습들이 너무나도 낯설게만 느껴졌다.
“뭐 해, 안 자고?”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며 에르손이 다가와 물었다.
“아니, 그냥 신기해서.”
“뭐가 신기한데?”
나는 잠시 에르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역시 긴장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졸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 녀석도 그렇고 다른 녀석들도 그래. 전쟁터에 나간다고 하는데도 너무나도 태평하잖아.”
“아, 그거? 훗.”
내 물음에 그 큰 덩치에 맞지 않게 씁쓸한 미소를 짓는 녀석.
“너는 정말로 저 모습이 태평한 걸로 보이냐?”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나는 다시금 물끄러미 녀석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징그럽다. 그만 쳐다봐라. 확 뽀뽀해 버리는 수가 있다.”
“죽고 싶으면 해 봐.”
“크흠, 흠. 아무튼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많이 달라. 나나 저기 있는 녀석들 모두 태평한 게 아니야. 실제로는 모두 너처럼 걱정되고 불안해.”
“하지만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당장 네 녀석만 해도 그 눈곱이나 떼고 그런 말을 하시지?”
황급히 눈곱을 뗀 녀석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이었다.
“사실 우리는 태평한 것이 아니라 무감각해져 있을 뿐이야. 나도 실은 처음 용병을 시작할 땐 너처럼 하루하루를 걱정으로 밤을 지새웠지.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얼마나 쓸데없는 짓이었는지를 깨달았어. 미리 걱정해 봐야 소용없는 것을. 차라리 그렇게 걱정할 시간에 잠이라도 한숨 더 자 두는 것이 다음 날을 위해서는 더 현명한 일이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쉽게 무감각해질 수 있을까? 내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고민에 찬 내 말에 녀석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후우. 너는 용병을 뭐라 생각하는 거냐? 우리는 용병이 되는 순간부터 돈에 목숨을 팔아넘긴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용병을 그만두는 그 순간까지 계속되겠지.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는 게 바로 우리 용병의 삶이야. 죽음과 함께 하는 삶.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에 지금 이 한순간 한순간이 더 소중하고, 그 삶에 더 충실할 수 있다고 말이야. 어차피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운명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더 속 편할지도 모르지.”
“…….”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라. 간단한 거야. 누군가가 말했잖냐. 죽기를 각오한다면 반드시 살길이 열린다고. 단순히 그런 자세면 되는 거야.”
‘죽기를 각오한다라…….’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 어차피 꼬이고 꼬여서 포기한 인생. 죽을 때 죽더라도 멋있게 싸워 주마.
두서없이 나오는 대로 지껄인 듯한 녀석의 위로와 충고였지만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훌륭한 교훈이 되었다.
“고맙다.”
“뭘, 그냥 선배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을 뿐이다.”
그렇게 밤은 지나갔다.
다음 날 아침. 출정을 위한 준비로 성안은 이른 새벽부터 분주했다.
용병들과 밀자크 남작의 사병, 그리고 영지의 남자들로 이루어진 병력이 처음으로 모두 한곳에 모였다.
“이거 꽤나 무리하는군.”
사열식을 위해 모인 병력을 둘러보더니 에르손이 혀를 차며 말했다. 확실히 밀자크 남작은 무리를 하고 있었다. 일일이 세어 보지 않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대략 눈에 띄는 규모만 해도 천여 명은 넘어 보였다.
나는 혀를 차며 말했다.
“미친놈이지.”
단 한마디로 정리된 내 평가에 에르손은 껄껄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네 말대로 미친놈이지만 덕분에 우리에게 일거리가 돌아왔으니 우리로서는 손해가 아니지.”
“…….”
나는 그런 에르손의 말에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긴 이야기가 될 듯하여 그냥 입을 다물었다. 에르손과는 관계도 없는 일일뿐더러 어차피 이들은 나와는 다르게 처음부터 용병이었으니 구구절절 설명해 봐야 입만 아픈 일이었다.
“우리 하인스 왕국은 로이어 제국의 제일 동맹국으로서…….”
대충 대오를 갖추고 서 있으려니 어느새 나타난 밀자크 남작이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내용은 잘 듣지 않아 모르겠지만 대충 하는 소리가 ‘옆집이 털렸으니 도와주는 게 이웃으로 당연하다’ 뭐, 그런 말인 듯했다.
‘빌어먹을. 이웃도 이웃 나름이어야지, 씁.’
아마도 모두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을지.
슬슬 밀자크 남작의 연설이 길어지고, 가만히 듣고 서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일 때가 되어서야 밀자크 남작의 연설은 그 끝이 보이고 있었다.
“……이로써 우리는 악을 징벌할 평화의 사자로서 이 전쟁에 임하게 될 것이다. 이상.”
짝짝짝짝.
그야말로 억지로, 하기 싫다는 투가 물씬 풍겨 나오는 박수 소리를 끝으로 남작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말을 타고 선두에 나섰다.
그 육중한 몸을 말에 실으려니 말이 한차례 휘청거리는 것이 안쓰러웠지만 이내 누구는 말을 타야 하고 누구는 발에 땀나도록 걸어야 한다는 사실에 좌절하며 나 역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겨야 했다.
‘괜찮겠지?’
나는 점점 멀어져 가는 밀자크 영지를 바라보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남아 있는 마을 사람들이 걱정이었지만 나는 파커슨 아저씨를 믿었다. 아저씨라면 큰일이 벌어져도 당황하지 않고 마을 사람들을 지켜 줄 것이다.
‘그래, 난 나만 걱정하면 되는 거야.’
지금은 그것 하나에만 집중하자.
행군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었다. 체력을 아끼기 위함인지 누구 하나 농담하는 이도 없이 그저 들리는 소리라고는 발걸음 소리, 무기 부딪치는 소리뿐이었다. 간간이 말의 투레질 소리도 들려오는 게 어지간히 말들도 지겨운 모양이다.
나야 체력 빼면 남는 게 없긴 했지만 이 행군은 나로서도 고행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대충 식사를 때우고 걷고, 또 걷고 걸어 점심까지 거르고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쉴 수 있었다.
물론 육체적으로 그렇게까지 피곤한 여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신적인 피로는 상당했다.
‘훗, 너무나도 당연한 건지도.’
이 험난한 고생의 끝이 안락한 집이라면 더더욱 힘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불행히도 이 고생이 끝나면 더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 힘이 나려야 날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