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이웃집 영웅 폴 1(9화)
3장.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 차이(3)


그렇게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모두들 기운 내라. 일차 목적지가 눈앞이다.”
앞에서 기운을 북돋는 기사의 목소리에 나는 땅만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과연 기사의 말대로 일차 목적지인 데론성이 지근에 자리하고 있었다.
데론성은 로이어와 얀 제국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지어진 성으로, 지금껏 우리가 지나쳐 왔던 몇 개의 성과는 과연 그 규모부터 남달랐다. 밀자크 남작의 그 담벼락 같은 성벽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탄탄한 성벽에서부터 그 주위를 따라 흐르는 해자까지.
하지만 성의 이 위압감 넘치는 모습보다 더 가슴에 와 닿는 것은 로이어와 얀 제국의 힘이었다. 과거 로이어와 얀 제국이 생기고 그 두 나라가 황금기를 보낼 때, 우리는 늘 침략을 당해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이 데론성은 늘 그들의 보기 좋은 먹잇감으로 전락되었다. 이곳에서 흘린 피의 양만 갖고도 강 하나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 했으니 하인스의 뼈아픈 역사가 스며든 곳이라 하겠다.
데론성으로 들어가니 나에게 기사의 지시가 내려왔다.
“당분간 이곳에서 머물며 중앙군을 기다릴 것이다. 다른 지시가 있을 때까지 휴식을 취하도록.”
그리고 기사는 밀자크 남작을 호위하여 성 안쪽에 마련된 저택으로 향했다. 같이 고생하고 누구는 편한 잠자리에서 잠을 잔다는 게 배알이 꼴렸지만 ‘귀족이 다 그렇지’ 하고 체념하며 나는 이 사실을 용병들에게 전했다.
“아이고, 죽겠네.”
“삭신이 다 쑤시는군.”
내 말에 용병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자리에 주저앉으며 고단했던 몸을 추슬렀다. 나 역시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그들과 함께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에르손은 그런 날 바라보더니 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체력 하나는 남다른 것 같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군.”
“아아, 말도 마라. 내가 바르데인 산맥을 며칠 밤낮으로 뛰어다녀도 봤지만 이건 체력이 문제가 아니라 아주 지겨워서 혼났다.”
“처음엔 다 그렇지. 그 짓도 하다 보면 익숙해진다.”
“글쎄. 이건 익숙이고 나발이고 전혀 친해질 것 같지가 않던데? 그러고 보니 너는 멀쩡하네?”
의외의 모습에 내가 놀라자 에르손은 자신의 가슴을 한차례 두드리더니 말했다.
“이 미친 오우거 에르손을 너무 물로 보지 말라고. 내가 네 녀석의 무식한 체력에 속절없이 당하기는 했지만 이래 봬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몸이시라, 이거야.”
“헛소리하지 말고, 방법이 뭐냐?”
“방법이랄 것도 없다. 말 그대로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지. 하지만 나름 요령이라면 자는 거?”
나는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지금 잠꼬대하냐?”
“아니,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뭐라고 할까? 반 제정신이 아니라고 할까, 일종의 자기최면이라고 할까? 비몽사몽? 흠, 그게 좋겠다. 한마디로 자면서 걷는다는 거지. 완전히 잠에 빠진 것도 아니고 깬 것도 아니고. 그런 식이면 하루가 금방 가거든.”
아무래도 내가 익히기에는 아직 고급 스킬인 듯했다.
“그런데 용병이 그런 자세로 용케도 잘 살아 있네?”
약간은 비꼬는 듯한 내 투에 에르손은 조금은 쑥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냥 짬밥이라고 해 둬라. 몬스터 걱정 없겠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아직 우리나라 안인데 괜히 신경 곤두세울 필요까지는 없잖아?”
녀석의 말을 들으니 괜히 이래저래 고민했던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데론성 안에는 우리 말고도 다른 영지에서 모여든 병력과 더불어 원래 이곳에 주둔해 있던 병력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애초에 도시로서 설계된 성이 아닌 오직 방어를 목적으로만 지어진 성이었기에 여관 같은 게 많이 있을 턱이 없었고, 때문에 사람들은 그냥 닥치는 대로 길가에다 천막을 치고 그곳에서 생활했다.
나로서는 이런 풍경이 익숙지 않았지만 에르손은 많이 경험한 듯 거침없이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니며 다른 용병들과 안면을 익혔다.
물론 나 역시 임시 단장으로서 그런 에르손을 따라다니며 타 영지 용병들의 단장들과 안면을 익힐 수 있었다.
모두와 만나면서 나는 늘 의외의 시선을 받아야 했는데 그것은 다들 에르손이 임시 단장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제 갓 용병이 된 애송이가 단장이라니, 그들의 그런 시선이 이해가 되었기에 나는 그저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이번 출정에 파병을 해 온 영지는 총 열 군데. 그들 영지에서 모은 용병의 숫자는 대략 2천여 명 정도로, 각 영지마다 많고 적음은 있었지만 200명 안팎으로 구성되었다.
‘이것 참, 새삼스럽게 그 200명의 목숨을 책임져야 한다니 부담감이 장난이 아니군.’
자칫 내가 잘못된 명령이라도 내릴 경우 떼죽음으로 연결될 수도 있었기에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릴 필요가 있었다.
“하하하,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게나. 우리는 공격을 하는 게 아니라 수성을 해야 하는 입장이니 크게 전술 명령이 이루어지지는 않을 걸세.”
바짝 긴장하는 날 보며 임시 단장 중의 한 명이 건넨 말이었다.
확실히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수성이라고 해 봐야 성벽을 기어 올라오는 적들을 상대로 알아서 싸우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으니 개개인이 유능한 전투 능력을 가진 용병들이라면 특별히 내 명이 없어도 잘들 싸울 것이다.
“그보다 이번 중앙군의 지휘관으로 임명된 분이 누군지 다들 아시는가?”
용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멋들어진 수염을 기른 사람의 말에 나를 비롯한 모두는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내가 뭐 귀족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게 있어야지.’
하지만 그래도 바람이라면 좀 유능한 사람이 왔으면 하는 것 정도.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말이 있듯 지휘관이 능력이 없다면 죽어나는 건 우리 같은 말단이다.
약간은 우려 섞인 시선들에 예의 그 수염의 단장은 안심하라는 듯 입을 열었다.
“이번 중앙군의 지휘관은 크리스 반 데실리안 자작이라고 하더군.”
“데실리안이라면 바로 그?”
누군가의 의문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맞네. 하이크론 폰 데실리안 공작님의 장남이시지.”
“오오.”
다들 감탄성을 내뱉는 가운데 나는 그러면 그렇지, 하고 생각했다.
‘과연 데실리안 가문이 출전한다니 그 욕심 많은 뚱땡이가 무리를 한 거로구만.’
평소 같으면 전쟁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밀자크 남작이 이번 파병에 참전한 이유가 있었다.
비록 내가 촌구석에서만 살았기에 귀족 가문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지만 데실리안 가문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과거 하이네스 제국 시절부터 내려온 우리 왕국의 충신으로서, 현 공작이신 하이크론 폰 데실리안 님은 명실 공히 대륙의 최강자로 이름을 드높이고 계시는 분이다. 비단 우리나라의 기사들뿐만이 아니라 그 이름을 아는 모든 기사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고 계신 분이 바로 공작님이시다.
비단 하이크론 공작님뿐만이 아니라 역대 데실리안 가문의 사람들은 늘 무신이란 칭호를 달고 나라의 위기에는 몸소 전장으로 뛰어들며 그 용맹을 드높였다. 로이어와 얀 제국의 침략 야욕 속에서도 그나마 하인스 왕국이 나라로서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데실리안 가문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 정도가 되면 사람의 욕심이란 게 권력을 탐할 만도 하지만 데실리안 가문은 그러지 않았다. 평소에는 있는 듯 없는 듯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초연한 모습이 어쩌면 데실리안 가문을 더더욱 우러르게 만드는 원인인지도 모르겠다.
비록 크리스 반 데실리안이라는 하이크론 공작님의 장남에 관한 이야기는 그다지 들은 것이 없었지만 그 씨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니니 두말할 것도 없이 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의 뛰어난 분일 게다.
왕국의 영웅인 데실리안 가문의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곧 전쟁터로 나가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어서 빨리 중앙군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빰빠라밤빠빠.
거친 군부대의 나팔 소리와 함께 성문이 열리고 곧 중앙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데실리안 가문의 장남이 지휘관으로 온다는 소식 때문인지 그 모습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성문 근처에 몰려와 들어오는 중앙군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략 일만여 명으로 구성된 중앙군의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잔뜩 녹이 슬어 빛바랜 우리 영지의 병사들과는 달리 관리를 잘한 듯 번쩍번쩍 빛나는 갑주를 입은 병사들이 발을 맞춰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런 병사들의 모습이 아닌 그들의 앞에 시커먼 흑마를 탄 어떤 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많게 잡아도 스무 살을 넘지 않았을 것 같은 외모. 가만히 있는데도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것 같은 짙은 금발과 그에 어울리는 맑고 푸른 눈. 하지만 굵은 눈썹과 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이 남자다움을 느끼게 하는, 그야말로 조각과도 같은 미남이었다.
다행히 처녀들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처녀들이 있었다면 그대로 뒤로 넘어갈 것만 같은 동화 속 왕자님의 모습이었다.
“히야! 거, 인물 새끈한 게 여자 여럿 울리겠네.”
나도 나름대로 잘생긴 외모라 자부해 왔지만 저 사내에 비하면 그야말로 태양 앞의 반딧불이었다.
그런 내 푸념에 에르손은 내 뒤통수를 한 대 쥐어박으며 말했다.
“이게 못하는 소리가 없네. 저분이 바로 이번 파병의 총지휘관을 맡으신 크리스 반 데실리안 님이다.”
나는 갑자기 내 뒤통수를 때린 에르손에게 뭐라 한마디 하려 했지만 그의 말속에 들어 있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뭐? 정말이야?”
“내가 비싼 밥 먹고 왜 거짓말하겠냐. 일전에 한 번 먼발치에서나마 본 적이 있다. 그땐 아직 어렸었는데 벌써 저리도 훤칠한 장부가 다 되었군.”
“…….”
나는 에르손의 말에 이마를 잔뜩 찌푸렸다.
‘젠장, 누구는 평민이고 누구는 그 위대한 데실리안 가문 사람이라는 것도 열 받는데 저런 완벽한 외모라니.’
어느 누가 신이 공평하다 했던가.
이유도 없이 기분이 나빴지만 나는 에르손의 얼굴을 보며 참기로 했다. 그래도 저따위보다는 내가 훨씬 낫지. 암.
“너, 왠지 그 눈빛 기분 나쁘다?”
주먹을 불끈 쥐는 에르손을 가볍게 씹어 주며 나는 저택으로 향하는 데실리안 가문의 장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음 날. 중앙군의 피로가 채 풀리기도 전에 다시금 지루한 행군이 시작되었다.
크리스 자작의 지휘로 데론성을 빠져나가는 병력 규모는 생각보다 꽤나 거대했다. 영지에서 출전한 병력이 대략 8천이었으니 중앙군 1만과 더해지자 행렬은 그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길어졌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메틴성은 데론성으로부터 나흘 거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다. 바르데인 산맥 초입 부근에 위치한 곳으로, 산맥을 끼고 들어서 있어 미크론 대평원에 위치한 다른 성들보다는 비교적 적의 공세가 덜한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얀 제국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미크론 대평원 근처의 전선이 뒤로 많이 후퇴한 터라 로이어 제국의 병력이 그쪽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을 이용한 얀 제국의 병력이 메틴성으로 집중될 것이라는 첩보가 있었다.
로이어 제국으로서는 차라리 메틴성에 우리 하인스의 파병을 요청하고 그곳을 방비함으로써 적의 공세가 뜸해진 틈을 타 미크론 대평원을 다시금 차지하고자 한다는 계획이었다.
이것이 위로부터 흘러내려 온 이번 파병의 개요였다.
결국 자기네들 땅따먹기에 괜히 죄 없는 우리가 끼어들어 피를 본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아무리 데실리안 가문이 지휘관으로 있다 한들 싸울 맛이 안 나는 것은 당연했다. 병사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용병들 역시 그냥 돈 벌기 위한 것 외에 다른 생각은 없는 듯했다.
아무튼 그로부터 정확히 사흘 뒤, 슬슬 행군이 몸에 익숙해질 즈음 비로소 우리는 메틴성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우아아아아!”
쾅! 콰과과과과!
하지만 그런 우리를 반긴 것은 아가씨들의 열렬한 인사도 아니요, 하다못해 같은 병사들의 환호성도 아닌 귀청을 찢는 굉음이었다.
우악스럽게 터져 나오는 외침 속에 죽어 가는 생명들의 비명 소리도 들려왔고, 그에 상관없다는 듯 하늘에는 마치 말로만 듣던 불꽃놀이를 하듯 온갖 빛줄기들이 날아다녔다.
설명은 길었지만 상황은 단순했다.
전투.
그래. 지금은 한창 얀 제국의 공습이 가해지던 때였다.
‘…….’
나는 멀리 펼쳐진 아비규환의 광경을 바라보며 잠시 넋을 잃어야 했다. 말로만 듣던 전쟁이라는 지옥을 곁가지로나마 처음 접한 나에게는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잘린 팔을 붙잡으며 오열하는 사람. 마법에 맞아 형체도 없이 사그라지는 사람. 사다리에서 떨어져 동료들의 발에 짓밟히는 사람.
부상자는 속출했고 시신은 산을 이루었다.
그때서야 나는 다시금 절실히 실감했다. 이곳은 놀러 온 것이 아님을.
‘아, 맞아. 나는 죽으러 왔었지. 빌어먹을.’
새삼스럽게 깨우친 현실에 나도 모르게 속으로 욕을 내뱉길 수차례. 문득 나는 날 잡아끄는 손길에 놓았던 정신을 수습할 수가 있었다.
“폴! 야, 인마, 정신 차려!”
“……어, 왜? 무슨 일이야?”
멀리 향했던 시선이 가까워지고, 그때서야 나는 날 향해 다급히 소리치는 에르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태평한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을까? 에르손은 잔뜩 얼굴을 구기더니 소리쳤다.
“도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정신 차리고 명령에 집중해!”
‘명령?’
아직 무슨 소리인지 어리둥절한 내 귓속으로 멀리서부터 총지휘관인 크리스 자작의 말이 들려왔다.
“지금 메틴성이 적들의 손에 함락될 위기에 처해 있다. 행군으로 인하여 지친 상태임을 모르지는 않지만 여기서 우리의 기습 공격으로 적들의 예기를 꺾을 수만 있다면 앞으로의 전투가 훨씬 수월해질 거라 생각한다. 따라서 아직 적들이 눈치 채지 못한 지금이야말로 우리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 각 기사단은 날 따르고 그 뒤를 이어 용병단이 선두를 맡는다. 나머지 보병은 넓게 펼쳐 도망치는 적들을 포위 공격한다. 그럼 기사단 돌격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