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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영웅 폴 1(10화)
3장.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 차이(4)
히이이이잉!
거친 말울음 소리와 함께 크리스 자작을 선두로 중앙군 소속 기사단의 돌격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위풍당당하게 달려 나가는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기도 전에 이어 기사들로부터 다급한 명령이 떨어졌다.
“용병단은 적당히 거리를 벌리고 기사단의 뒤를 따른다!”
“용병단 출격하라!”
“우아아아아아!”
나를 제외한 주위에 있던 용병들의 우렁찬 함성 소리가 이어지고, 이윽고 모두가 무기를 꺼내 들고는 미친 듯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찾아온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잠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남들이 달리니 나 역시 열심히 다리를 놀릴 뿐이었다.
그렇게 난 내 생애 처음으로 전쟁의 한복판에 서게 되었다.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점점이 들어오는 얀 제국 병사들의 얼굴. 당황으로 물드는 그 얼굴은 잠시 뒤 허공을 날아 바닥에 떨어졌다.
붉게 물드는 대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구름에 붕 뜬 것처럼 멍했다.
나는 어느새 내 손에 들려 있는 숏소드를 바라보았다.
아롱지며 떨어지는 붉은 핏줄기.
그리고 그때서야 방금 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다. 당황하여 날 향해 검을 겨눈 상대를 향해 나는 가차 없이 검을 뽑아 휘둘렀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나도 모르게’라는 수식어가 붙기는 했으나 그것은 내 첫 살인으로 영원히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을 터였다.
‘…….’
기분이 더러워졌다.
구역질이 났다.
각오는 했지만 각오만 갖고는 쉽게 떨쳐 낼 따위의 것이 아니었다.
살을 벨 때 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그 느낌은 이제껏 내가 수많은 동물들의 그것을 벨 때와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죽는다는 게 이런 건가. 죽인다는 게 이런 건가.
이렇게 한순간에 결정될 정도로 그것이 이다지도 가치 없는 건가. 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파 왔다.
“으랴아아아앗!”
그런 내 귓가로 에르손의 우렁찬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시선을 돌려 미친 듯 전장을 헤집고 다니는 에르손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투핸드소드를 휘두르는 그의 앞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휘두르는 족족 그의 검에 적들은 목숨을 잃었다.
자비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왠지 그 모습이 너무나도 슬프게만 보였다.
문득 그와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에 최선을 다한다는 얘기. 그렇다. 녀석은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도망칠 수도 없고 도망가서도 안 되는 죽음에 맞서 녀석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
그것이 비록 남들을 죽임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할지언정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이 상황 속에서 누구도 뭐라 탓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이런 개죽음은 절대 사양이다.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살아야 했고, 살기 위해서는 죽기를 각오해야 했다. 나를 불태우고 가로막는 것이 있으면 쓰러뜨려야 했다.
‘그래, 그런 거다.’
살인의 추억을 곱씹을 여유 따윈 없는 거다. 왜냐면 이곳은 빌어먹을 전쟁터니까.
“죽어랏!”
마음의 안정을 되찾자 그때서야 주위의 상황이 제대로 들어왔다. 좁혀져 있던 시야도 밝아졌고, 듣지 못하던 것들도 귀에 들어왔다.
때마침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날 향해 창을 든 적 병사 한 명이 달려들고 있었다.
어떻게든 날 죽이겠다는 듯 살기 섞인 눈동자를 번뜩이는 적은 그야말로 이를 악물고 있었다.
두렵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직 알 수 없는 연민만이 가득했다.
‘그래, 너나 나나 모두 똑같은 운명. 결국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거지.’
나는 들고 있던 숏소드의 감촉을 느끼려는 듯 그립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곤 달려드는 적을 향해 나 역시 빠르게 달려 나갔다.
“이야아아압!”
달려드는 속도 그대로 창을 찔러 왔지만 나는 애초부터 직접적으로 대면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먼 거리에서 창을 맞상대로 하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 행위. 어떻게든 살겠다는 내 취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숏소드로 찔러 들어오는 창을 살짝 비켜 쳤다. 그러자 창은 크게 옆으로 빗나갔고, 적은 균형을 잃고 주춤거렸다.
‘빈틈!’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내 적의 품으로 몸을 던졌다.
“크헉!”
내 어깨에 가슴 한복판을 가격당한 적은 그대로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나와 함께 바닥을 굴렀다. 몇 바퀴를 엎치락뒤치락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적의 몸을 깔고 앉은 상태였다. 둘 다 용케 그 상황에서 무기는 놓지 않고 있었지만 이 거리에선 무조건 나의 승리였다.
“사, 살려…….”
삶의 욕망으로 가늘게 떨려 오는 눈동자. 떨리는 목소리로 어렵게 입을 열었지만 나는 이를 악물며 살려 달라 비는 적의 목에 숏소드를 박아 넣었다.
추아아아악!
박혀 있던 숏소드를 뽑아내자 그로부터 피분수가 솟구쳤다.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 서서히 꺼져 가는 눈동자.
화르르르륵!
그리고 그 순간 내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시작은 아주 작았지만 종내에는 그 불꽃이 내 몸을 갉아먹듯 그 크기를 키워 나갔다.
“크아아아악!”
금방이라도 온몸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기름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든 것만 같은 지독한 열기가 나를 미치도록 만들었다.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열기를 어떻게든 발산하지 않으면 이대로 여기서 죽는다는 것.
‘하지만 어떻게?’
스스로 의문을 던지는 것도 잠시.
‘죽여라!’
마치 명령하듯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여라! 그래야 네가 살 것이다.’
“…….”
나는 잠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지금까지 내가 겪었던 일들과는 차원이 달랐기에. 내가 미친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아가 붕괴되기라도 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런 내 고민과는 달리 내 몸은 마치 명령에 충실한 종처럼 목소리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는 나.
“날 막으면 모두 죽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하는 것인지도 모를 말을 읊조리는 나.
망설임 없이 적진의 한복판으로 몸을 날렸다.
그 순간 세상이 변했다.
마치 깊은 물 속에 들어온 듯 흐느적거리는 세상. 모두가 단체로 짜 맞추기라도 한 듯 느릿느릿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 오직 나만이 물 만난 고기처럼 이리저리 헤집고 다닐 뿐이었다.
서걱!
끊임없이 하늘로 치솟는 수급들. 나는 정말로 미친 듯 적들을 베어 나갔다. 이제는 숫자를 세는 것조차 지겨울 정도였다. 내가 검을 휘두르는 것인지, 검이 나를 휘두르는 것인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렇게 내 의식은 차츰 아득해져만 갔다.
얼마가 지났을까?
“……폴!”
문득 날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 차려, 폴!”
그 목소리는 끊임없이 나에게 정신을 차리라 말하고 있었다. 나는 의문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라니. 그럼 지금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하는 건가?
‘감히 날 미친놈 취급하다니.’
누군지는 몰라도 죽었다고 복창해라.
“…….”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을 깨닫고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난 어디에 있는 거지?’
오로지 들려오는 건 목소리뿐, 나라는 존재는 없었다. 보이지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이게 도대체…….’
그렇게 당황해 하는데 그 순간 날 부르던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신 차려, 이 등신아! 나 에르손이라고오오오오!”
‘에르손?’
에르손이라는 이름이 들려오자 내 머릿속으로 그간의 상황이 빠르게 흘러 지나갔다. 여기가 어디인지, 그리고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순간 찬물을 끼얹듯 정신이 번쩍 들며 컴컴했던 세상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리고 들어오는 광경에 나는 기겁을 해야 했다.
에르손은 넘어진 채로 눈을 감고 있었고, 난 그런 그를 향해 가차 없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안 돼! 멈춰!’
일의 정황을 판단할 새도 없었다. 나는 속으로 외치며 가까스로 휘둘러지는 검을 세웠다.
스윽!
하지만 온전히 멈추지 못하고 에르손의 목에 약간의 상처를 내고 말았다. 방울지며 떨어지는 핏방울들.
챙그랑!
나는 들고 있던 숏소드를 집어 던지듯 내려놓았다.
당황스러웠다. 도대체 내가 잠시 정신을 잃고 있는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왜 나는 에르손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던 걸까?
“이거 정말 큰일 날 뻔했네. 휴우.”
십년감수했다는 표정으로 목을 쓰다듬은 에르손은 이어 당황해 하는 날 향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 말이야,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었는지는 알고 있냐?”
“몰라.”
“몰라? 하! 역시 그랬구만.”
뭔가 알 듯 말 듯한 표정의 에르손에게 나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중간의 기억이 없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내 목소리에는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방금 전 에르손에게 한 것처럼 아군에게 해를 끼친 것은 아닌지. 만일 그랬다는 것이 발각되었다간 군말 없이 즉결 사형 감이다.
그런 내 반응에 에르손은 내 머리를 한차례 쥐어박으며 말했다.
“내 살다 살다 너처럼 별난 놈은 처음 봤다. 첫 살인인 것 같아 벌벌 떨지나 않음 다행이라 생각했건만 이건 원 미친놈처럼 날뛰어 대니. 널 보니까 광전사라는 말이 실감나더라.”
이어지는 에르손의 말은 나로 하여금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적진 한복판에 뛰어든 내가 그 일대를 완전히 휩쓸어 버렸다고. 그런 날 막기 위해 기사들까지 동원되었지만 모두 내 일 검을 막지 못하고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그 부분에선 에르손을 비롯해 많은 용병들이 의문에 찬 눈길을 보내긴 했지만 내가 딱히 뭐라 말할 것이 있을 리가 없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후퇴하려는 적을 아득바득 쫓아가려 하기에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했다만 결국 이렇게 된 거지.”
에르손은 온몸에 난 상처를 가리켰다.
난전 상황에서도 끄떡없던 녀석이었건만 과연 녀석의 몸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치명적인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것만 해도 엄청나게 고생한 것임엔 틀림없었다.
괜히 미안해진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녀석은 가볍게 내 어깨를 두드렸다.
“뭐, 어쨌든 모두 무사했음 된 거지.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다. 사실 따지고 보면 네가 아니었음 이 정도의 피해로도 끝나지 않았을 테니까.”
“맞아. 그러니까 기운 내라고.”
에르손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날 위로해 주었다. 궁금한 게 많았지만 모두들 꾹 참는 모습에서 이들이 날 얼마나 걱정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해 주었다. 이런 게 동료애라는 걸까? 무척이나 고마웠다.
“자자, 그만 하고 어서 정렬이나 하자고.”
멀리서 다가오는 크리스 자작을 바라보며 에르손이 날 주위로부터 떼어 냈다. 난 그런 녀석에게 조그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맙다, 여러 가지로.”
아마 에르손이 나에게로 접근하는 적을 막아 주지 않았다면 첫 살인의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나는 적들의 손에 목숨을 잃어야 했을 거다. 아무리 혼전의 양상이었다지만 그 정도도 모를 내가 아니었다.
“뭘. 이것 역시 선배로서 당연한 일이지. 그보다 넌 좀 빨리 씻어야겠다.”
쑥스러운 듯 슬쩍 말을 돌리는 에르손이었지만 녀석의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내 상태는 심각했다. 피로 목욕을 한 듯 온통 붉은색이었다.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머리에서는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다행히 코는 이미 마비된 듯 크게 냄새는 나지 않았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구역질을 하고도 남았지.
아무튼 새삼 다시 보니 내가 제대로 미치기는 미쳤었나 보다.
‘도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다.
메틴성으로 입성하는 내내 내 머릿속에서는 그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