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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영웅 폴 1(11화)
4장. 함정에 빠진 사냥꾼(1)
로이어 제국 병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메틴성으로 입성한 지도 어언 일주일이 지났다.
“하아, 도대체 이놈의 전쟁은 언제나 되어야 끝나려나.”
나는 성벽에 기대어 앉아 세상 다 산 노인네처럼 중얼거렸다. 의욕이고 뭐고 사라진 지 오래. 그냥 맘 편히 잠이라도 자 봤으면.
“기운 내. 얼마 남지 않았어.”
에르손이 위로랍시고 한마디 해 왔다. 하지만 나는 위안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그렇게 말하는 에르손이 안쓰러웠다.
“야, 눈은 좀 뜨고나 말해라.”
“…….”
하지만 소용없었다. 미동도 없는 에르손.
‘그새 잠든 거냐.’
하지만 나는 에르손과는 달리 초인적인 인내를 갖고 자꾸만 감겨 오는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렸다.
‘자면 안 돼. 자면 안 돼.’
속으로는 주문을 외우듯 끊임없이 되뇌었다. 차라리 밤을 꼴딱 새우는 게 낫지 지금 자다가 깨면 더 힘들다는 걸 요 일주일간의 경험 끝에 알게 된 까닭이다.
일주일 전, 메틴성을 공략하는 얀 제국의 선봉대 병력을 깔끔하고도 치사한 뒤치기로써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힌 우리 하인스 왕국의 군대는 그 뒤로 로이어 제국을 대신하여 메틴성 사수에 나섰다.
우리가 왔던 시기가 참으로 교묘해서 거의 메틴성이 무너질 시점이었기에 이 성에 실상 로이어 제국군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일반인을 제외하면 병력이라고는 2천 정도? 이것도 부상자를 포함한 숫자다. 그러니 대부분을 우리 하인스에서 맡아 싸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듣기로는 이번 메틴성 공격에 투입된 얀 제국의 병력은 총 5만. 제국의 병력치고는 적지 않은 감이 있지만 이것은 현재 전선을 보면 결코 적지 않은 숫자다.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현재 로이어나 얀이나 거의 80퍼센트의 병력이 미크론 대평원에 있다. 한데 그 미묘한 힘의 균형을 놓치지 않으면서 이곳을 칠 병력을 마련했다는 것은 과연 적이지만 얀 제국의 위력을 실감케 했다.
하지만 난데없는 우리의 개입으로 첫 번째 전투에서 거의 1만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으니 현재 남은 병력은 총 4만이었다.
하지만 그에 반해 우리 측이 2만의 병력이니 큰 변수가 없다면 우리가 유리했다. 일반적으로 수성하는 적을 상대로 공격하기 위해서는 그에 세 배 정도의 병력이 있어야지만 가능하다고 했으니 처음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무척이나 고무되었다.
이거 잘하면 살아 돌아갈 수 있다.
아마 그렇게 생각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다음 날이 지나고 또 다음 날이 지나면서 슬슬 꼬리를 말고 자취를 감췄다.
무슨 일인지 적들은 첫 번째 패배 이후 대규모 공격을 하지 않았다. 말을 탄 기병들이 마치 시위하듯 성벽 주위를 맴돌거나 가끔 기습적으로 마법 세례가 퍼부어졌다. 또 어떤 때는 맞지도 않는 투석기만 줄기차게 날려 댔다.
밤이고 낮이고 상관없었다. 덕분에 나를 비롯한 모두는 금방 지쳐 갔다. 이거야 원,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기습적으로 이루어지는 만큼 그 규모가 크지 않기에 사상자는 크게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불안해 할 수밖에 없는 게 사람 심리다. 운이 좋아 살았지 막말로 투석기가 날아오는 자리에 자신이 있었다면 꼼짝없이 죽는 거다.
적들의 공격이 있든 없든 이쪽은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모이기만 하면 그 얘기를 했다. 도대체 얀 제국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설마 원군을 기다리는 걸까? 현재 대체적으로는 그쪽으로 무게가 실리는 편이었다.
만일 그렇다면 이쪽으로서는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듣기로는 아직 로이어에서 원군을 파병하려면 시일이 좀 더 걸린다고 했다. 아직 내부적인 혼란이 수습되지 않았기에 병력을 모으는 데 애로 사항이 있다 하였다.
정말로 기운 빠지는 얘기였다.
‘빌어먹을. 남의 나라 땅 지켜 준다는데 원군이 늦는다는 게 말이 되는 거냐고. 우리야 아쉬울 것도 없다, 이거야. 이딴 성, 그냥 줘 버리라지.’
속으로 푸념해 보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이곳을 지켜 내지 못한다면 차후 하인스에 가해질 로이어의 압박이 장난이 아닐 게다. 만약 내가 크리스 지휘관의 입장이라면 그냥 이곳에서 뼈를 묻는 한이 있더라도 나중을 위해 이곳은 반드시 지킬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쪽 입장이고, 나로서는 그냥 이것들이 싸우거나 말거나 그냥 이대로 나 몰라라 퇴각하는 것이 더 좋다.
“아휴…….”
길게 한숨을 내쉰 나는 잠이라도 깰 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성벽 너머로 보이는 얀 제국 쪽을 바라보았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불빛만 보일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그만 좀 하면 안 되겠니?’
들리지도 않을 부탁을 해 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날 밤은 내 부탁이 먹힌 듯 얀 제국 쪽에서 아무런 도발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날, 더욱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얀 제국의 원군이 정말로 도착한 것이다.
듣기로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고 하였다. 대충 2만 정도? 하지만 이미 있는 병력과 합치면 무려 6만이었다.
지칠 대로 지친 이쪽의 병력에 무려 세 배인 것이다. 더 이상 수성이라고 맘 놓고 있을 수 없는 상황.
모두가 불안해 하는 와중에 크리스 자작이 직접 나와 나를 비롯한 모두를 향해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인스의 용맹한 병사들은 들어라. 지금 너희들이 아는 바대로 적들에게는 2만의 원군이 도착하여 현재 6만의 병력이 있다. 아마도 곧 적들은 이 기세를 몰아 이곳 메틴성에 총공격을 감행해 올 것이다.”
모두가 이미 짐작한 일이지만 그래도 총지휘관의 입을 통해서 들으니 확실히 그 무게가 달랐다. 긴장감으로 인해 침 넘어가는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가운데 크리스 총지휘관의 말이 이어졌다.
“하나 너희들은 걱정할 것이 없다. 적의 군세가 우리보다 막강하다 하여도 우리는 이 든든한 성을 끼고 있다. 너희들 개개인이 맡은바 임무에만 충실하다면 결코 막지 못할 병력도 아닌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살아야 함을 너희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무의미한 싸움에서, 아국도 아닌 타국에서 헛되이 삶을 마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용맹스런 하인스의 병사들이여, 나를 믿고 따르라! 내 명령에 귀를 기울여라! 내 이름 크리스 반 데실리안! 너희들을 지켜 온 무신의 이름! 적에게는 공포가 된 그 이름! 오늘 여기서 데실리안의 힘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 줄 것이다!”
“데실리안 만세! 하인스 왕국 만세!”
“우아아아아아!”
일말의 불안감을 떨치려는 듯 포효하는 울음소리.
모두는 무기를 뽑아 들며 피를 토해 내듯 외쳤다.
그런 모두의 칭송을 받으며 오롯이 서 있는 크리스 자작. 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떨려 오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래. 저것이 바로 진정한 영웅이다.’
그 어떠한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센 의지. 신념. 나와 동갑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감당한 삶의 무게가 다르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일까? 과연 데실리안 가문의 핏줄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예상했던 대로 얀 제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른 새벽부터 출전을 준비하는 듯하더니 해가 뜰 즈음이 되어선 투석기의 사거리가 닿지 않는 곳까지 진군하여 대오를 갖추었다.
평원에 죽 늘어선 6만의 병력.
나는 나도 모르게 손에 쥔 활에 힘을 주고 있었다.
‘대단한 압박이다. 이런 게 바로 폭풍 전야의 고요함이라는 걸까?’
내 첫 전투는 뭐가 뭔지도 모르게 진행된 점도 있거니와 이쪽에서의 기습의 성격이 강했기에 전쟁 전의 긴장감을 느낄 새도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고 손바닥에서는 자꾸만 땀이 났다.
“젠장, 옛날부터 몇십만 대 몇십만 전투니 따위의 말은 들어 왔지만 이거 6만도 장난이 아니구나.”
말이 6만이지 마치 개미집을 들쑤셔 놓은 듯 까마득하기만 했다.
“너무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다. 저들이 한꺼번에 덤빌 수는 없을 테니. 결국 우리가 상대할 병력은 저 중의 절반도 되지 않아.”
에르손이 나름 위로를 위해 한마디를 해 왔지만 전혀 도움이 안 됐다. 성벽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싸울 수 있는 숫자라고 해 봐야 얼마나 되겠나. 결국 내가 죽으면 내 자리를 대기하던 사람이 메우겠지.
그래도 위안이라면 눈먼 칼에 맞을 확률은 줄어든다는 것. 생존 확률이 올라갔으니 그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하려나.
나는 입맛을 다시며 힐끗 성문 근처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마치 움직이지 않는 커다란 바위처럼 크리스 총지휘관이 서서 저 멀리에 있는 얀 제국의 병력을 바라보고 있었다.
‘데실리안이라는 이름, 믿겠습니다.’
나는 속으로 그렇게 빌고 또 빌었다.
“자랑스러운 얀 제국의 병사들아, 오늘이야말로 저 메틴성을 넘어 입만 살아 있는 로이어의 심장에 비수를 꽂을 것이다. 또한 간악한 로이어의 세 치 혀에 놀아나 우리 위대한 얀 제국에게 칼을 들이민 하인스 역시 그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황제 폐하의 가호가 너희들과 함께할 것이니 두려워 말고 나를 따르라!”
“진격하라!”
뿌우우우우!
귀가 멍멍할 정도로 요란한 뿔피리 소리가 울리고 6만의 대오에서 대규모의 병력이 빠지며 곧장 이쪽을 향해 맹렬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뒤로 서서히 세워지는 대규모의 구조물.
바로 투석기였다.
쿵! 쿠구구구!
집채만 한 바위 덩어리가 하늘을 날아 이쪽을 향해 속속들이 떨어졌다. 대부분은 근처에도 오지 못하거나 성벽을 넘어 떨어졌지만 간혹 가뭄에 콩 나듯 바위들은 성벽을 강타하고 그 위에 있던 병사들을 형체도 없이 짓이겨 버렸다.
비명도 뭣도 없는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하지만 당황하는 병사들을 지휘하는 기사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곧 뒤이어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에게 다시금 그 자리에 빠르게 채워 넣을 것을 명했다.
나 역시 그 와중에 바위 밑에 깔릴 뻔한 위험이 있었지만 간신히 몸을 피한 덕분에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주위에 있던 대부분의 용병들이 바위 밑에 깔려 목숨을 잃었다.
“자리를 지켜라! 도망치지 마라! 도망치는 자는 내가 가차 없이 벨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성벽 아래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나마도 뒤에서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기사들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젠장! 우리 쪽 투석기는 뭐 하는 거냐고!”
답답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자, 때마침 기다렸다는 듯 이쪽에서도 바위들이 적진을 향해 떨어졌다.
물론 우리 쪽 역시 적중률은 형편없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적들의 투석기 공격도 뜸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미 그 틈을 타 적 병력은 근처까지 다가온 뒤였다.
“적이 화살의 사정거리에 들었다. 쏴라!”
슈슈슈슈슉!
크리스 총지휘관의 목소리가 떨어지자마자 나 역시 들고 있던 활에 화살을 메긴 뒤 지체 없이 달려드는 적들을 향해 발사했다.
따로 조준이고 뭐고 할 것도 없이 그냥 마구 쏘아 댔음에도 쏘는 족족 내 화살에 적 병사들은 맥없이 쓰러졌다. 오로지 빠르게 쏘는 것만이 최선이었기에 내 손은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속도로 움직이며 화살 통에서 화살을 꺼내고 활에 메겼다.
하지만 바닷물을 바가지로 떠낼 수 없듯 화살 공격에 의해 죽은 적들의 숫자는 그 뒤를 이어 달려오는 적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뭔가 큰 한 방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마법사는 뭣 하느냐! 발사하라!”
그리고 그런 즈음 다시금 크리스 총지휘관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와 동시에 곧 색색이 하늘을 메우며 갖가지 마법들이 적들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쿠과과과광!
파지지지직!
어떤 곳에서는 불길이 치솟고, 어떤 곳에서는 번개가 치고, 또 어떤 곳에서는 땅이 뒤집히는 등 그야말로 천재지변이 따로 없었다. 그 한 번의 마법으로 적들의 기세가 주춤하기는 했지만 역시나 적들을 저지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연이어 큰 마법을 더 썼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란 걸 잘 알았다. 내가 마법에 관해 잘 아는 것은 없었지만 큰 위력의 마법을 시전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는 것 정도는 상식이었다.
따라서 이 이상 마법을 기대하기란 무리였다.
“공병은 사다리를 설치해라!”
어느새 성벽 가까이까지 접근한 적들 사이로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이 떨어지자 간신히 해자를 건넌 공병들은 성벽으로 사다리를 걸쳤다. 물론 그 와중에도 수많은 적들이 화살에 목숨을 잃었지만 굳이 공병이 아니라도 사다리를 잡을 사람은 많았다.
곧 적들은 마치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개미들처럼 사다리를 타고 성벽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다시금 크리스 총지휘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름을 붓고 불화살을 날려라! 적의 사다리를 없애야 한다!”
“기름을 부어라!”
크리스 총지휘관의 명령은 곳곳에 배치된 기사들에게 전달되었고, 나는 지체하지 않고 미리 준비해 두었던 기름 항아리를 그대로 들어 아래로 집어 던졌다.
“이거나 처먹어라!”
퍼억!
“으아아악!”
운 좋게도 사다리를 잡고 있던 녀석이 항아리에 머리를 맞고 즉사했다. 나로서도 운이 좋은 거였지만 녀석에게도 차라리 뇌진탕으로 죽는 게 더 나았다.
“불화살을 쏴라!”
슈슈슈슉!
궁병들의 불화살이 발사되자 기름은 순식간에 불타오르며 깨진 항아리 주위에 있던 적들을 먹이 삼아 더욱더 화려하게 불길을 토해 냈다. 더불어 불길은 사다리에도 옮겨 붙으며 사다리에 올라서 있던 적들에게까지도 피해를 주었다.
“크아아아악!”
온몸에 불이 붙으며 괴로워하는 적들. 바닥을 아무리 굴러도 결코 꺼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냥 저들이 이대로 물러나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적에게도 마법사가 있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후우우웅!
콰과과과광!
어디선가 화끈한 열기가 몰려온다 싶은 순간, 나는 저 멀리서 날아드는 불덩어리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뭘 어떻게 손을 써 볼 새도 없이 그대로 성벽을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