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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영웅 폴 1(12화)
4장. 함정에 빠진 사냥꾼(2)


쿠르르르르!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일순간 크게 요동치는 성벽. 그 때문에 균형을 잃은 몇몇이 성벽 아래로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다행히 이 성벽에 있다는 마법 방어 때문에 성벽이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연이은 마법에 의해 적들의 사다리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고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적들이 성벽 위로 올라오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때, 크리스 총지휘관의 목소리가 모두의 정신을 깨웠다.
“당황하지 마라! 더 이상 마법 공격은 없을 것이다! 궁병은 계속해서 적의 사다리를 공격하고, 나머지는 올라오는 적들을 막아라!”
“멍하니 있지 마라! 공격하라!”
과연 크리스 총지휘관의 말대로 더 이상 마법 공격은 없었다. 자칫 성벽에 올라간 자신들의 병력까지 다칠 위험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아무튼 이유야 어찌 되었든 지금은 다른 걸 생각할 틈이 없었다. 적들은 계속해서 사다리를 비집고 올라왔고, 나는 적들이 성벽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족족 숏소드를 휘둘렀다.
“헉, 헉…….”
얼마를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는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체력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나였건만 슬슬 지쳐 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짧아졌던 그림자가 다시금 길어질 때가 되어서야 더 이상 성벽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적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겼다!”
“우아아아아!”
적을 패퇴시켰다는 것에 기쁨의 함성을 터뜨리는 수많은 병사들. 지친 몸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그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주위에 죽어 나간 동료들의 시신을 바라보며 모두는 침통을 금하지 못했다.
결국 그날 달이 중천에 올랐을 때가 되어서야 모두들 겨우겨우 시신을 수습하고 다음 날 있을 전투를 위해 피곤한 몸을 누일 수 있었다.
따닥, 탁!
“하아…….”
나는 멍하니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지. 우리가 이길 수 있을지. 여러 걱정거리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지금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이것 한 가지였다.
‘마을 사람들은 무사할까?’
비록 오늘의 전투에서 우리가 승리를 거뒀다고는 하지만 이쪽의 사상자 역시 결코 가볍게 볼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만큼이나 전투는 치열했다.
내 휘하로 있던 용병들 중 벌써 반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 그런 상황이니 자연 미케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걱정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그들을 찾아가 만나고 싶었지만 용병과 중앙군, 영지군은 따로 분리되어 있었기에 찾아가기도 쉽지 않았다. 행여 조금이라도 자리를 벗어나려 하면 어떻게 알고 나타났는지 기사들이 나타나 이동을 저지했다.
자기 자리를 지키라는 것이다.
그래도 그나마 안심이라면 용병들과 중앙군과는 달리 영지군은 그 전투력이 떨어지는바, 전방에 배치되지 않고 측면이나 보급을 맡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쪽으로는 적들의 공격이 치열하지 않으니 어지간하면 살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 미묘한 힘의 균형이 유지될 때의 이야기. 적에게 병력이 더 보충된다거나 하는 순간이면 모두 끝장이었다.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적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무려 나흘 동안 이어진 대혈투였다. 그 사이 죽어 나간 숫자만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성 앞은 핏물이 강을 이뤘고 성벽은 붉은 물감을 칠해 놓은 듯 뻘겋게 물들었다.
그야말로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얀 제국으로부터의 끊임없는 견제를 받아 왔던 병사들이었기에 이틀이 지나자 그 피로는 극에 달하여 속절없이 밀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때 크리스 총지휘관의 능력이 빛을 발했다.
과연 무신 데실리안의 핏줄이라는 걸까? 그와 그의 휘하 기사들은 종횡무진 성벽을 뛰어다니며 넘어오는 적들을 빠르게 제거해 나갔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오로지 적들의 시체뿐이었다. 그런 그의 압도적인 무위를 본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며 젖 먹던 힘까지 쏟아 부었다.
그리고 닷새째 오늘. 적들의 마지막 공격이라 예상되는 전투에서 우리는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퇴각하라!”
마치 썰물이 빠지듯 황급히 본진으로 되돌아가는 얀 제국의 병사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하려는 본진은 이미 본진이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처음 6만의 군대가 지금은 채 절반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도 거의 부상병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는 어느덧 한마음이 되어 목소리를 높였다.
“하인스 만세! 데실리안 만세!”
당장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피곤하고 지쳤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감격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긴 것이다. 승리한 것이다.
‘살 수 있다! 집에 돌아갈 수 있다!’
단지 그 마음 하나로도 날아갈 듯 기뻤다.
얼마 동안 그렇게 함성이 울려 퍼졌을까? 모두의 목소리가 잠잠해질 즈음 크리스 총지휘관의 목소리가 메틴성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잘 싸워 주었다, 병사들이여! 너희들의 용맹함에 적들은 꼬리를 말고 도주를 하였다. 명심하라! 오늘 우리의 이 승리는 오롯이 우리들만의 힘으로써 이룩한 것임을. 덩치만 큰 제국이라 하여 두려워 말지어다! 우리는 이렇게 그들을 상대로 승리를 하지 않았는가. 우리도 해내고자 하면 못할 것이 없도다!”
크리스 총지휘관의 말은 듣고 있던 모두의 마음속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덩치만 큰 제국……이라고?’
그래, 맞는 말이다. 제국이 뭐 별건가. 나라가 크고 인구가 많으니 그 인구가 병력이 되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일 뿐. 제국 자체가 두려운 게 아니다. 사람이 많은 게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똘똘 뭉칠 수 있는 단결력.
“굳은 마음은 날카로운 창칼로도 뚫지 못하는 강력한 방패임을 기억하라. 그것을 잊지 않는다면 언젠가 우리가 받았던 치욕과 울분을 되갚아 줄 때, 그 방패가 너희들을 승리로 이끌어 줄 것이다. 그때까지 참아라. 너희를 대신해 죽어 간 동료의 넋을 잊지 말아라. 가슴에 품고 또 품어라. 대륙을 질타하던 선조들의 기상을! 너흰 하이네스의 자손들이다!”
“우아아아아아아!”
피 묻은 검을 치켜세우며 당당히 하이네스의 자손임을 밝히는 크리스 총지휘관의 모습에 모두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의미로 함성을 질렀다.
하이네스 제국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이유만으로도 억압받았던 세월. 떳떳하게 내놓지도 못하고 가슴속에 쌓아만 두었던 그 자부심이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치솟아 올랐다.
하지만 왜일까, 나는 다른 이들처럼 마냥 내놓고 좋아할 수 없었다. 가슴 한편에서 왠지 모를 불안감이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왠지 이러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그리고 그런 불안감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닷새째 전투를 마지막으로 마냥 대치만이 계속되는 가운데 불현듯 용병들의 소집령이 떨어졌다.
모두는 명에 따라 성 중앙에 모였지만 하나같이 의아한 표정들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폴, 뭐 짐작하는 거 없냐?”
“글쎄…….”
에르손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지만 나라고 윗분들의 행사를 알 도리가 없다. 다만 전부터 느꼈던 불안감에 꺼림칙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렇게 옹기종기 모여 기다리고 있으니 곧 크리스 총지휘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때가 때이니만큼 이런 생각이 들어서는 안 되겠지만 가까이에서 본 크리스 총지휘관의 모습은 먼발치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잘생겼다. 특히 남자 피부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투명한 피부는 괜스레 짜증을 유발시켰다.
‘젠장, 같이 고생했는데 누구는 아기 피부고 누구는 귤껍질이냐.’
겨우겨우 에르손의 수세미 같은 피부를 보며 마음을 다스리고 있자니 크리스 총지휘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명에 당황스러웠을 거라 생각한다. 본론을 말하자면 오늘 여기 너희들이 모이게 된 이유는 적 후방을 교란하기 위한 별동대를 만들기 위함이다.”
‘아뿔싸!’
크리스 총지휘관의 말에 나는 그때서야 내가 느꼈던 불안감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가 있었다.
지금 시점에 별동대는 그야말로 사족이었다. 적들에게 원군이 더 없다면 적은 결국 이대로 대치만 하다가 물러설 수밖에 없다. 전투를 하지 않는 군대는 식량만 축내는 식충이에 불과할 따름이니 얀 제국 수뇌부라면 지지부진하게 대치하지 않고 군대를 퇴각시킬 것이 뻔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곳에 있는 아군을 붙잡아 놓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상 우리가 메틴성을 떠나 다른 곳까지 도와주어야 할 이유는 없다. 어디까지나 우리가 로이어에게 부탁받은 것은 이 메틴성뿐이니까.
나가 봐야 괜히 위험을 자초하는 짓이었다.
이 사실을 깨달은 게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대번 모두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크리스 총지휘관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적의 보급선을 기습하여 적 보급을 끊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적의 퇴각이 더 빨라질 것이라는 계산이다. 별동대의 지휘는 내가 직접 하게 될 것이니 한 시간 후 모든 준비를 끝낸 뒤 다시 이곳에 집합한다. 이상.”
“잠시 질문이 있습니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돌아서는 크리스 총지휘관을 붙잡았다.
“뭔가?”
사내다운 매서운 눈동자가 날 바라보자 잠시 뜨끔했지만 그래도 궁금한 것은 풀어야 했기에 어렵게 입을 열었다.
“도저히 지시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적 원군이 오는 게 아니라면 어차피 조금만 더 있어도 퇴각할 적을 굳이 이런 무리까지 해 가면서 자극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내 말에 크리스 총지휘관은 잠시 뭔가 생각하기 싫은 것을 떠올린 듯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사항이었다. 이미 그렇게 결정이 났으니 불만족스럽더라도 따라 주기 바란다.”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휙 하니 돌아서는 크리스 총지휘관의 모습을 바라보던 난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역시 그랬군. 씨팔! 젠장할!”
하도 열이 받아 난 계속해서 애꿎은 바닥만 계속 찼다.
“어, 어이, 폴, 갑자기 왜 그래?”
난데없는 내 행동에 당황한 에르손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난 그의 목소리에 저 멀리 걸어가는 크리스 총지휘관의 등을 한차례 힘주어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왜 그런지 궁금해? 넌 뜬금없이 별동대가 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냐?”
“그, 글쎄다…….”
잘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는 그에게 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여기가 어디냐? 바로 로이어 제국 영토라고. 엊그제 크리스 총지휘관이 했던 말 기억하냐? 하이네스의 자손? 웃기지도 않아. 네가 만일 로이어 제국 사람이라면 그런 말을 하는 우리를 가만히 놔두겠냐? 그것도 번번이 뭐 좀 해 보려 하면 딴죽을 거는 데실리안 가문의 사람을?”
“……서, 설마.”
“그래. 그 설마다. 여기 지휘관이 하이반 백작이라 했던가? 그 사람한테 미운털이 제대로 박힌 모양이다.”
순간 모두의 표정이 암울하게 변했다. 막말로 버려지는 패 정도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난 크리스 총지휘관이 사라진 자리를 매섭게 노려봤다. 그에 대한 평가가 재조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객관적으로 봐도, 주관적으로 봐도 그는 데실리안 가문 사람답게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이나 한 명의 기사로서의 능력, 그 모든 것에 있어 출중했다. 플러스알파로 외모도 있지만 중요한 게 아니니 그건 패스.
아무튼 뭐 하나 부족할 게 없는 사람이지만 한 가지 내가 판단할 때 부족한 게 있다면 바로 처세술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나아가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에 있어 이 처세술만큼 중요한 건 없다고 본다.
막말로 내가 남의 집에 놀러 갔는데 그 자리에서 ‘이 집은 원래 우리 집이었으니 곧 빼앗을 것이다’라고 말하면 그 집 주인이 가만히 있겠는가. 두들겨 맞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처세술이란 속으로는 어떤 마음을 갖고 있어도 겉으로는 그것을 표현하지 않는 노련함도 중요하다.
크리스 총지휘관은 그런 처세술이 부족했다.
‘젊음이란 건가.’
어차피 같은 나이면서 이런 말 하는 게 우스울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모든 일의 시발점은 그것이다. 젊다고 다 같은 게 아니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젊음이란 가슴속에 품은 패기. 바로 그것을 말함이다.
사실 나 같은 일개 평민이 무슨 패기가 있겠는가. 그저 하루하루 어떻게 배를 곯지나 않으면 다행이고,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저 이 한 목숨 온전히 살아서 돌아가는 게 우선이니 패기를 가지려야 가질 수가 없다.
하지만 크리스 총지휘관은 다르다. 귀족이자 데실리안 가문의 사람인 그 젊은 청년은 아마도 자국의 현실에 회한을 느끼고 그것을 바꿔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은 것이고, 결국엔 그 일로 인해 괜한 위험 속으로 뛰어들게 되어 버렸다.
실수는 병가지상사라고 실수를 통해 배울 게 있다는 말도 있지만 그가 알아 둬야 할 것이 있다면, 본인 한 사람의 실수로 인해 괜히 우리처럼 피 보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이전처럼 그가 데실리안 가문의 사람이라 해서 마냥 좋게 보이지만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