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이웃집 영웅 폴 1(14화)
4장. 함정에 빠진 사냥꾼(4)


“후퇴하라! 후퇴하라!”
목소리를 좇아 그의 모습을 바라보니 그야말로 묘기가 따로 없었다. 뒤에도 눈이 달린 듯 너무나도 쉽게 날아드는 화살을 쳐 내고 있었다.
순간 나는 생각했다.
‘그래. 살 곳은 저곳밖에 없다!’
무신 데실리안 가문의 후손인 크리스 반 데실리안. 전에도 느꼈던 것처럼 대단한 실력이었다. 적어도 그와 그의 기사단들 사이에 있다면 눈먼 화살을 맞을 염려는 줄어들 터였다.
후퇴 명령을 내리며 협곡을 빠져나가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는 크리스 총지휘관의 모습에 나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저 사이에 끼지 못하면 죽는다.’
이대로 죽은 듯 주저앉아 있다간 정말로 죽는다. 살려면 움직여야 했다.
나는 한껏 자세를 낮춘 채 협곡을 빠져나가려는 크리스 총지휘관을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그리 멀지 않은 거리임에도 생각만큼 가까워지지 않았다. 여전히 빗발치는 화살은 계속해서 내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며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젠장!’
어차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결국 이대로 있다간 옴짝달싹 못하겠다는 생각에 나는 이를 악물며 온 힘을 다해 뛰었다.
결국 그 조급함이 화를 낳고야 말았다.
퍼억!
나는 등허리에서 느껴지는 충격에 일순간 몸을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화살이 내 등에 명중한 것이다. 다행히 내가 입고 있는 조끼가 예사 것이 아니었기에 화살은 가죽을 뚫지 못했고 난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철로 된 갑옷 같은 게 아닌 단지 질기기만 한 가죽은 충격까지 흡수해 주지는 못했다.
나중에 밤일을 할 수 있을지 걱정될 만큼 허리가 시큰거렸다.
하지만 지금 밤일을 걱정하는 건 사치였다. 나는 살기 위해 계속해서 달렸다. 하지만 막 크리스 총지휘관과 그 휘하 기사들을 향해 다가가는 순간, 갑자기 종아리 부근에서 불에 덴 듯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고, 그것이 무엇인지 채 알기도 전에 난 균형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크윽! 빌어먹을!”
난 연신 입으로 욕을 내뱉었다. 종아리에는 화살 하나가 깊숙하게 박혀 있었다. 차마 뽑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제대로 치료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닌 이상 괜히 이걸 뽑았다간 출혈 과다로 죽는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당장 시급한 문제는 내가 화살에 맞고 안 맞고 따위가 아니었다. 내가 쓰러져 있는 사이 벌써 크리스 총지휘관과 휘하 기사들, 그리고 살아남은 용병들은 어느새 협곡의 입구에까지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하, 하하하하.”
허탈함에 웃음이 나왔다. 쫓아갈 수 없는 거리.
이제 나에게 남은 거라고는 곧 닥칠 적들에게 확인 사살을 당하는 일뿐이었다.
“크리스, 이 개새끼! 그래, 너 혼자만 잘 먹고 잘살아라!”
날 이곳에 끌어들였으면 목숨은 책임져야 할 게 아니냐! 이, 씨발놈아!
너무나도 억울한 마음에 그 대상을 크리스 총지휘관으로 삼은 채 연신 욕을 내뱉었다.
살고자 했던 노력도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난 그렇게 멀어져만 가는 일행을 공허한 눈으로 좇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얼마를 있었을까?
“어라?”
난 멀리 보이는 광경에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닌지 잠시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지금 보이는 건 결코 환상 따위의 것이 아니었다.
“저것들이 왜 이리 다시 기어들어 오는 거지?”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가던 크리스 총지휘관 이하 기사들은 꽁지가 빠지게 도망갔던 것만큼 빠른 속도로 다시금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좀처럼 알 수 없었지만, 곧 어느 정도 가까운 거리에 이르자 그 원인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뭔가에 밀려나고 있었다.
어느덧 얀 제국의 병력은 협곡 입구까지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가더니 잘됐다!”
악담을 퍼붓는 것도 잠시, 곧 협곡 위쪽에서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의 명령이 들려왔다.
“목표는 크리스 자작이다! 포위하라!”
“우아아아아!”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협곡 위와 다른 편 입구에서부터 얀 제국 병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궁지에 몰린 쥐새끼의 신세였다. 어느덧 내가 있는 곳까지 밀려난 크리스 총지휘관은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 미친 듯 뛰어다녔지만 그가 신이 아니고서야 여기서 빠져나가기란 결코 불가능했다. 오히려 그의 그런 헛된 몸부림이 계속되면 될수록 애꿎은 휘하 기사들만 계속해서 죽어 나갔다.
‘오호라!’
하지만 난 그 모습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안 돌아가던 머리가 이럴 때만큼은 비상하게 돌아갔다.
조금 전 얀 제국의 지휘관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분명 포위라고 했겠다?’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죽일 수도 있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포위만 할 뿐 크리스 총지휘관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살려 준다는 의미라면 어쩌면 곁다리로 목숨을 구할지도 모르겠다.
잠시 뒤 비로소 그 사실을 알았음일까? 크리스 총지휘관은 그때서야 겨우겨우 숨을 몰아쉬며 연신 주위를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래 봤자 이미 그의 수하들은 모두 목숨을 잃은 뒤. 그 역시 검을 지팡이로 삼은 채 간신히 서 있을 뿐이었다.
짝짝짝!
그런 크리스 총지휘관을 향해 난데없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의 전면의 병력들이 길을 트자, 그 사이로 미끈하게 생긴 중년인 한 명이 걸어 나왔다.
“과연 하인스 왕국의 마지막 보루라는 무신 데실리안 가문의 사람답군. 지난번 전투 때도 놀랐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하게 되니 더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군.”
정말로 놀랍다는 듯 말하는 그 중년인에게 크리스 총지휘관은 매섭게 소리쳤다.
“네놈은 누구냐!”
“하하하. 이거, 섭섭하군. 그래도 여태껏 적으로 싸워 왔는데 상대방 지휘관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니. 흠, 이거 실망이군. 아니, 아니, 그만큼 나 따위는 관심도 없을 만큼 자신이 있다는 건가? 훗! 그래도 뭐, 그리 궁금하다면 가르쳐 주지. 내 이름은 안델리크. 과분하게도 메틴성 공격의 총지휘관을 맡았지만 잘나신 누구 때문에 목숨이 위험하게 된 불쌍한 사람이지.”
비꼬는 건지 칭찬하는 건지.
아무튼 그런 그의 소개에 크리스 총지휘관은 한번 주위를 쓱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 이게 무슨 속셈이지?”
“뜻을 잘 모르겠군.”
“왜 날 죽이지 않는 것이냐?”
“죽이지 않는 게 아니라 못 죽인다.”
“뭣이!”
놀라움으로 인해 치켜 뜬 크리스 총지휘관의 두 눈.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역시 살려 줄 속셈이구나.
하지만 뒤이어 믿을 수 없는 사실 하나가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하이반 백작은 네놈을 죽이는 조건으로 나에게 정보를 넘겨주었지만 쯧쯧쯧, 멍청한 놈이지. 다 기울어 가는 나라라지만 데실리안 가문은 함부로 건드릴 것은 못 되거든. 하지만 선전용으로는 충분하지. 하인스 왕국의 마지막 충신인 데실리안 가문의 차기 가주가 왕국을 등지고 스스로 얀 제국으로 걸어 들어왔다. 훌륭한 선전 감이라 생각하지 않나?”
“크으으으으.”
하지만 크리스 총지휘관은 대답조차 하지 않고 이를 갈 뿐이었다. 물론 그건 나라고 다르지 않았다.
‘하이반…… 이, 개자식! 감히 우리를 팔아넘기다니!’
우리가 누구를 위해 싸웠던가. 자국도 아닌 로이어를 위해서였다. 기껏 열심히 싸워 메틴성을 지켜 주었더니 그 성주라는 작자가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이야.
하지만 비난의 화살은 곧 하이반도 아닌 크리스 총지휘관에게로 돌아갔다. 그가 그 자리에서 하이네스 어쩌고 따위의 말만 하지 않았던들 이런 일은 애초부터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크리스 총지휘관은 분노로 벌겋게 변한 눈으로 안델리크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난 기사다! 기사를 그런 식으로 모욕하지 마라!”
“크하하하하! 말은 좋군. 모욕이라? 하지만 이것 한 가지는 알아 두는 게 좋을 거다. 이 세상은 결국 이용하는 자가 승리하는 법이다. 기사도니 뭐니 따져 봐야 고스란히 제 손해라, 이 말이다.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잡지 못한다면 그건 결국 머저리일 뿐이지. 너도 잘 판단하는 게 좋을 거다. 살 기회를 놓쳐서야 되겠나?”
적이지만 참 바른말이었다. 살 수 있는 기회다. 제발 말 들어라!
하지만 강단 있는 우리의 크리스 총지휘관. 그는 비틀거리는 몸을 억지로 세운 뒤 검을 집어 들었다.
“싸우다 죽는 것이 기사의 덕목. 하지만 기사의 명예를 저버리고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게 하느니 이대로 자결을 택하겠다!”
그러고는 그대로 검을 들어 목에 가져갔다.
“마, 막아!”
하나 그런 그의 모습에 다급해진 건 비단 안델리크뿐만이 아니었다.
‘저, 저 새끼 무슨 짓이야!’
크리스 총지휘관이 죽는다면 나 역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어디서 갑자기 그런 힘이 솟아났을까? 그것은 그저 살고자 하는 원시적인 욕망에 의한 힘이라 생각된다.
종아리에 박힌 화살의 아픔도 잊은 채 순식간에 벌떡 일어난 나는 그대로 날아가 죽기 직전인 크리스 총지휘관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퍼억!
“커헉!”
갑작스런 공격에 그대로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고꾸라지는 크리스 총지휘관.
“네, 네놈은……!”
잠시 내 모습을 확인하고는 뭐라 말하려 했지만 이어지는 내 발길질에 결국 눈을 까뒤집고 정신을 놓았다. 평상시라면 꿈도 못 꿀 이였지만 지친 그였기에 가능했다.
“…….”
“…….”
잠시지만 장내에는 서늘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나는 갑자기 전신으로 꽂히는 살벌한 시선에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몸을 비비 꼴 수밖에 없었다.
“……아, 안녕하세요?”
결국 참다못해 내가 한 것은 어색한 표정으로 열심히 손을 흔드는 것뿐이었다.



5장. 사냥꾼과 기사의 무게(1)


얇은 천막의 틈새로 들어오는 일렁이는 횃불만이 이 어두운 공간을 조금이나마 밝혀 주고 있었다.
“하아.”
절로 새어 나오는 한숨.
나는 지금 양손과 양발이 묶인 채 얀 제국의 진영 한복판에 잡혀 있었다.
“자식들, 내가 어디 도망갈 것도 아닌데 이렇게 꽁꽁 묶어 놓을 필요는 없잖아?”
맨 땅바닥에 엎드려 있는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자칫 이렇게 잠이라도 들었다간 다음 날 내 고운 턱이 돌아가 있을지도 몰랐다.
“끄응차!”
나는 어깨의 반동을 이용해 간신히 몸을 옆으로 눕히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자세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하다못해 머리를 받칠 거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목이 너무 아프다. 턱이 돌아가기 전에 목부터 먼저 부러지겠다.
결국 다시 원위치.
“하아, 그래도 살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되나?”
그래, 다행이다. 자칫 잘못했으면 차가운 땅바닥에 목과 몸이 분리된 채로 영원히 누워 있을 뻔했지.
나는 잠시 그때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넌 뭐지?”
어색한 내 인사로 인해 어정쩡한 침묵만이 감도는 가운데 그 침묵을 깨고 안델리크라는 적 지휘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딱히 뭘 어쩌자고 크리스 총지휘관, 아니 이제는 그냥 크리스라고 부르자. 아무튼 크리스를 때려눕힌 게 아니었기에, 그저 녀석이 죽으면 나도 살길이 없어진다는 생각에 이성이 말리기도 전에 본능이 먼저 행한 일이었다. 난 어정쩡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에…… 그러니까 사냥꾼……이 아니고 용병인데요?”
“용병?”
“네. 밀자크 남작이 고용한 용병입니다.”
“밀자크 남작 따윈 내 알 바 없고, 그럼 네놈은 네가 왜 여기 있게 되었는지도 알겠군? 보아하니 죽은 척하고 있다가 다 들은 모양인데.”
“뭐, 이, 일단은 대충…….”
“후후후후.”
내 대답에 여타의 말 없이 그저 웃기만 하는 안델리크. 왜지? 갑자기 불안해진다. 그리고 그 불안함의 실체는 곧 이어진 녀석의 말을 통해 명확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럼 내가 이제부터 뭘 할지도 잘 알고 있겠군. 후후후.”
쿠궁!
“……!”
‘아뿔싸!’
정말 젠장인 상황이 벌어졌다. 나는 뒤늦게 내 실책을 깨닫고는 입을 쩍 벌려야 했다.
저들이 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살아 있는 크리스였다. 한데 조금 전까지는 크리스가 괜히 자살한답시고 설쳐 대는 바람에 저들이 섣불리 손을 쓰지 못했던 것일 뿐, 이렇게 크리스가 나로 인해서 정신을 놓아 버린 지금, 그야말로 저들은 손 안 대고 코를 풀게 된 것이다.
무슨 소리냐고? 간단하다. 저들은 날 죽이고 내 발밑에 뻗어 있는 크리스를 데리고 가면 그만이라는 소리다.
결국 난 남 좋은 일만 했다는 얘기지.
단지 크리스가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만 걱정한 나머지 그 뒤의 일은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나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런 내 표정에 안델리크는 정말로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