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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영웅 폴 1(15화)
5장. 사냥꾼과 기사의 무게(2)
“하하하! 살다 살다 이런 재미있는 녀석은 처음이군.”
“하하하! 정말 제가 생각해도 재미있군요.”
나 역시 어이가 없었기에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웃는 얼굴에 침은 못 뱉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한번 슬쩍 떠보는 나였다.
“모처럼 재미있게 해 드린 저는 살려 주시겠죠? 하하하.”
“걱정하지 마라. 살려 주진 못해도 적어도 고통 없이 보내 주겠다. 하하하!”
“에이, 그러지 말고 인정을 베풀어서 한 번만. 하하하.”
“어림없지. 밥만 축내는 포로 따위는 필요 없다. 하하하!”
“…….”
“…….”
언제 웃었냐는 듯 다시금 썰렁해진 분위기. 안델리크는 미끈한 얼굴처럼 얄밉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죽여라.”
챙!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검을 뽑으며 천천히 다가오는 한 명의 기사.
‘젠장! 이대로 죽는 건가! 안 돼! 안 돼! 생각해라! 생각해라!’
죽음의 공포에 다리는 떨려 오고 입은 바짝 타들어 갔지만 내 머리는 필사적으로 돌아갔다. 삶에 약한 자, 그대는 인간이라…….
“걱정하지 마라. 후작님의 명을 받들어 네놈만큼은 고통 없이 보내 주마. 차앗!”
그리고 그렇게 막 기사의 검이 내 목을 향해 내려치려던 순간이었다.
“자, 자, 잠깐만요!”
난 머릿속에서 번뜩이며 스쳐 지나간 생각에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뭐지? 유언이라도 할 셈인가?”
잔뜩 짜증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여는 기사였지만, 나는 그는 무시한 채 흥미롭게 이를 지켜보고 있는 안델리크를 향해 소리쳤다.
“지, 지금 여기서 날 죽이면 분명 후회하게 될 겁니다!”
“후회?”
내 말에 기묘한 표정이 되어 내 눈을 살피는 안델리크. 난 그 탐색하는 듯한 눈빛에 흔들리지 않고 당당히 그 눈빛을 마주했다.
“훗, 우습군. 내가 용병 하나를 죽인다고 해서 후회할 거라 생각하나?”
아무렇지도 않다는 그의 말이었지만 나는 그 순간 속으로 쾌재를 내뱉었다. 일단 이렇게 관심을 보인다는 건 대화가 통할 거란 뜻이렷다. 나는 조심스럽게 미끼를 던졌다.
“물론 그건 제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용병일 경우의 이야기겠죠.”
“네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가 보군.”
“굳이 특별할 것은 없습니다. 다만 전 남들이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습죠. 바르데인 산맥……이라고 하면 아시겠습니까?”
“……!”
그런 내 말에 삽시간에 얼굴이 굳어지는 안델리크. 그는 꽤나 놀랐는지 처음의 인상과는 달리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네놈이 그걸 어떻게?”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전 용병이지만 전에는 사냥꾼이었습니다. 물론 주 활동 무대는 바르데인 산맥이었죠. 산맥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전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후아! 정말이지 꽤나 놀랐었죠. 설마하니 토굴을 파고 그 안에서 뭘 찾고 있을 줄은. 설마 그 뭔가를 위해 이렇게 전쟁까지 일으킬 줄이라고는 물론 더 상상도 못했었죠.”
나는 지금 일생일대 목숨을 건 도박을 하는 중이었다. 솔직히 난 녀석들이 뭘 찾고 있는지도 몰랐고, 이번 전쟁의 목적이 지금 내가 말한 것처럼 바르데인 산맥에서 눈을 돌리게 함인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녀석이 미끼를 물지 않을 거다.
“저, 정말이야?”
“설마 이번 전쟁에 그런 목적이 있었던 거야?”
한데 의아한 건 내 말에 얀 제국 병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과는 다르게 안델리크를 비롯한 기사들은 낭패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모습에 ‘얼라리요?’ 하는 표정이 되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뭡니까, 이 반응은? 설마 병사들은 모르고 있었다는 겁니까?”
웅성웅성.
내 말은 잔잔했던 호수에 던져진 돌덩이처럼 크게 파문을 일으켰다. 그에 안델리크는 잔뜩 얼굴을 찌푸리더니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모두 조용! 지금 누구라도 입을 열었다간 참수할 테니 명심하라!”
“…….”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인 장내. 안델리크는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훗. 이거 일개 용병 주제에 너무나도 많은 것을 알고 있군.”
나는 그런 안델리크의 말에 내 추측이 정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속으로는 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고 대답했다.
“그냥 우연히 지나가면서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흐음, 하지만 이상하군. 하인스 왕국 쪽으로는 학살자인지 뭔지 때문에 이쪽으로 올 생각은 하지 못했을 텐데?”
‘이것 봐라? 학살자도 알고 있네?’
나는 잠시 이채를 띠었다. 과연 철저한 준비를 한 모양이었다. 학살자까지 아는 걸 보니.
“학살자는 이미 죽고 가죽이 된 지 오래입니다. 물론 제 손에.”
“후후후. 유능한 사냥꾼이셨군? 그래, 한번 허심탄회하게 말해 보지. 이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꺼낸 건 뭔가 목적이 있으렷다?”
‘옳거니!’
물고기가 드디어 미끼를 물었다. 난 긴장으로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전 바르데인 산맥에서만 20년을 산 몸입니다. 사냥을 위해 뛰어다니면서 그쪽에 관해서라면 눈감고도 길을 찾을 수 있습죠. 노예로도 좋습니다. 절 살려만 주신다면 원하시는 걸 찾게 해 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솔직히 저 하나 살려 주신다고 해도 뭐 크게 손해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내 말에 안델리크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난 그런 고민이 쓸데없는 거라 여겼다. 이미 녀석의 눈동자는 내가 말을 하는 동안에도 수십 번은 흔들렸다.
결국 결정을 내린 듯 안델리크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다. 네놈만큼은 쓸모가 있는 듯하니 살려 주도록 하겠다. 허나 만일 네 녀석이 ‘그곳’을 찾지 못한다면 네놈은 살아 있음을 저주하도록 만들어 주겠다. 끌고 가라!”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난 녀석들에 의해 포로 신세가 되었다.
녀석들을 따라가면서 내 귀에는 아직 살아 있던 자들의 마지막 고통 섞인 비명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못 들은 척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난 나 하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놈이었다.
“그나저나 ‘그곳’이라 했겠다?”
안델리크의 말을 통해서라면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은 물건이 아닌 어떤 장소였다. 뭘까? 도대체 그게 어떤 곳이기에 이런 대규모의 희생을 낳는 전쟁을 하면서까지 그곳을 찾으려는 걸까?
“마법사의 던전? 아니면 먼 옛날 사라졌다던 드래곤의 레어?”
하지만 난 금세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에이, 설마…….”
마법사라면 얀 제국에도 많을 텐데 굳이 던전을 무리해 가면서까지 찾을 이유가 있을까? 더욱이 드래곤의 레어에 보물이 많다는 것은 단순히 전설일 뿐, 실제 누가 찾아가 본 것도 아니지 않은가.
“크음,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 내가 찾지 못하면 죽는다는 거지.”
바르데인 산맥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땅속에 뭐가 있는지 내가 알 리가 없다.
지금은 잠시 숨이 붙어 있다고 해서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니란 말이다. 아니, 어쩌면 내가 그들이 찾고자 하는 곳을 찾아도 문제였다.
이런 비밀을 알고 있는 날 과연 온전히 살려 둘까? 귀족들이 말 바꾸는 거야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더 쉬운 일.
‘결론은 한 가지로군.’
죽기 싫다면 내게 주어진 시간을 이용해 녀석들로부터 도망치는 것.
하지만 지금 당장은 움직일 수 없으니 난 그저 멍하니 땅바닥만 쳐다볼 뿐이었다.
‘개미 한 마리. 개미 두 마리…….’
그리고 어느덧 내가 잡혀 온 지 사흘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이곳을 지키는 병사에게 온갖 아부와 아양을 떨어 댔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이제 개미는 그만 보고 싶단 말이닷!
다행히 그런 내 노력이 통했는지 닷새째 되는 날, 그들은 나에게서 도망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 내고는 포박을 풀어 주었다. 천막 너머의 목소리로만 알아 왔던 병사들이었지만 나는 그들의 면면을 실제로 바라보면서 가슴 한구석이 찡해졌다.
얀 제국을 아무리 공공의 적이니 뭐니 하면서 매도하고는 있지만 사실 일반 힘없는 사람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이곳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듬지 못해 덥수룩해진 수염이 인상적인, 그저 맘씨 좋은 아저씨 같은 사람들이었다.
사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들이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날 이렇게 풀어놓을 리는 없었겠지. 더욱이 화살에 맞아 곪기 시작하는 내 종아리 상처 역시 그들이 치료해 주었다.
이렇게 전장이 아니라면 쉽게 친해질 수 있는 맘씨 좋은 사람들. 윗대가리의 쓸데없는 욕심으로 결국 죽어 나가는 건 아무것도 모르는 힘없는 사람들이지. 그리고 나 역시 마찬가지.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없지만 그냥 싸우라니 싸울 뿐이다.
“하하하, 정말이지 네 녀석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군. 어떻게 그 상황에서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지.”
“그러게 말일세.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때 그곳에 있었던 녀석들의 말을 들어 보면 참으로 가관이었다지?”
입구를 지키던 두 병사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연신 날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하지만 난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나 역시 실실 쪼개며 입을 열었다.
“헤헤헤, 다시 말하지만 전 아저씨들 같은 범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사람이라구요. 그러니 알아서 모시라, 이 말입니다.”
“하하하, 녀석. 어련하시려고. 옜다!”
기가 막힌다는 듯 날 보며 웃던 한 병사가 이내 뭔가를 던져 주었다. 얼떨결에 받아 보니 양가죽으로 된 물주머니였다. 내가 ‘이게 뭐냐?’ 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니 짓궂은 웃음과 함께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젊은 녀석이 가만히 있으려니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닐 것 같아 몰래 빼돌린 거다.”
그의 말에 가죽 주머니를 열어 보니 안에서 상큼한 냄새가 올라와 내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 주었다.
“이, 이건!”
난 정령계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정신을 간신히 붙잡으며 놀란 듯 소리쳤다. 그러자 병사들은 그저 씨익 웃기만 할 뿐, 다른 말은 없었다.
“그럼 사양 않고, 큭큭큭.”
난 얼른 천막 안으로 들어와 주머니를 뒤집어 내용물을 입 안으로 쏟아 냈다.
꿀꺽꿀꺽.
“캬하, 좋다!”
절로 튀어나오는 탄성. 이게 얼마 만에 먹어 보는 술이란 말인가. 뒷골이 자르르 당기는 게 정말 죽인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지만 그래도 즐길 건 즐겨야지. 난 남겨 두었던 음식을 안주 삼아 그렇게 한동안 홀로 남은 쓸쓸함을 달랬다.
그동안 노력의 결실이 너무 과한 탓인지는 몰라도 이제는 농담 따먹기를 할 정도로 병사들과 친해진 나였다. 이렇게 술까지 얻어 마시는 걸 보니 나는 의외로 사람 사귀는 데 있어서 선수가 아닐까?
‘하지만 문제는 대부분이 남자라는 거지.’
여자에게 이것의 반만이라도 했다면 여태껏 숫총각으로 있지는 않았을지도.
그리고 그렇게 6일째 되는 날 저녁이었다.
어지간해서는 사람이 찾지 않는 이곳에 갑자기 여러 사람이 오는 듯하더니 천막 입구가 젖혀지고 뭔가가 안으로 내동댕이쳐지듯 던져졌다.
쿵!
꽤 큰 소리에 뭔가 하고 가까이 가 들여다보니 사람이었다. 그것도 피투성이의.
갑작스러운 일에 잠시 황당해 하는 사이,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깨어나 난동 부릴지 모르니 철저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러고는 멀어져 가는 발걸음 소리. 멀어서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묻혀 지나가는 듯한 목소리로 ‘지독한 놈’이라고 한 걸 보니 어지간히도 질렸나 보다.
도대체 누군데 이러지?
난 궁금한 마음에 피투성이의 사람에게 물을 부어 얼굴을 확인해 보았다. 그러곤 까무러치게 놀랐다.
“크, 크리스!”
이게 과연 사람의 몰골이란 말인가. 잘 다져진 육편처럼 늘어진 크리스의 몸은 얼마 전까지 전장을 날아다니며 종횡무진 하던 그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고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같이 끌려와 내가 이곳에 갇혀 있는 사이 고문을 당하기라도 한 건가? 아니, 이건 빼도 박도 할 것 없이 고문의 흔적이군.
조금 미안해졌다. 녀석으로서는 깔끔하게 죽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나 때문에 살아나 이런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 외의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결국 모든 일의 시발점은 이 녀석의 그 망언 때문이니.
그래도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천막을 기어 나와 병사들에게 물었다.
“저기, 아저씨들, 저 인간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요?”
난 손가락으로 크리스를 가리켰다.
병사들은 그런 내 물음에 곧장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내 살다 살다 저런 독종은 처음 보는구만.”
그들의 말을 요약해 보면 이랬다. 내가 엿들은 것처럼 안델리크는 크리스를 회유하기 시작했단다. 하지만 그 쓸데없는 자존심만 남은 크리스는 대답도 없이 그저 하는 말이라고는 온통 ‘죽여라’뿐.
열 받은 안델리크는 결국 누가 이기나 하는 심정으로 크리스를 고문했지만, 이 독한 인간이 그러면서 비명 한 번 안 질렀다는 것이다.
결국 크리스를 회유하는 것을 포기한 안델리크는 마지막으로 직접 하인스 왕국에 통신을 보내 거짓으로 크리스의 이적을 통보했지만, 하인스에서는 크리스는 이미 죽었으니 상관치 않는다는 말만 보냈다고 했다.
“정말이지 자식이나 애비나 하는 짓이 어쩜 그리 똑같나? 목숨 귀한 줄 모르고, 쯧쯧쯧.”
혀를 차는 병사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직접 그런 말을 건네 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크리스의 아버지이자 하인스 왕국의 유일한 공작, 더불어 대륙 최강자라 일컬어지는 하이크론 폰 데실리안이라 했다.
‘이런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들 같으니.’
크리스의 행태에도 놀랐지만 그 아버지란 인간은 더했다. 어쩜 이렇게 자식을 내팽개칠 수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직접 그 위치에 서 보지 않았기에 가문이 어쩌고, 나라가 어쩌고 하는 말은 잘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리 그래도 이것은 뭔가 아니라는 것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