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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영웅 폴 1(16화)
5장. 사냥꾼과 기사의 무게(3)
“그럼 저 인간은 어떻게 된다고 하던가요?”
“글쎄. 들려오는 말로는 쓸모도 없으니 그냥 네 녀석과 같이 바르데인 산맥으로 보낸다고 하던데? 정확한 건 잘 모르겠다.”
“그래요?”
노림수가 사라졌으니 이제는 처치 곤란이라 이거군.
그나저나 이거 큰일이다. 혹 깨어나 날 알아보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는 거냐.
‘이런 떠그랄!’
다행히 크리스의 부상은 심각하여 금방 일어나지는 않았다. 다음 날 보급 부대와 같이 바르데인 산맥으로 떠나면서도 역시 녀석은 기력을 찾지 못했다. 생각 같아서는 이대로 죽거나 말거나 가만히 내버려 두고 싶었지만 이놈의 측은지심이 또 말을 안 듣고 결국 녀석을 돌봐 주게 되었다.
그런 내 노력이 통했는지 슬슬 회복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밀자크 남작의 영지에서 출발하여 메틴성까지 오는 데만도 보름 정도가 넘게 걸린 거리였다. 하지만 소수의 인원이 움직이는 데다 마차를 타고 가니 무려 십 일 정도가 단축되었다. 정확히 닷새 후, 나는 모든 일의 시발점이 되는 곳에 다시금 도착하게 되었다.
어느덧 능선을 넘어 하인스 왕국 쪽 경계에까지 굴을 파기 시작한 얀 제국. 나는 의문이 일 수밖에 없었다. 어찌 저런 짓을 하고도 여태 알려지지 않았단 말인가. 하인스 왕국은 도대체 뭘 하는 거지?
하지만 그런 내 의문은 전혀 의외의 장소에서 풀 수 있었다.
쉽게 말해 노역장에 도착한 크리스와 나는 곧장 이런 곳에는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한 목조 건축물에 갇히게 되었다. 하지만 들어가면서 본 구조를 보아하니 원래는 감옥 같은 게 아니라 이곳의 지휘부가 사용하는 숙소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화장실까지 딸려 있을 턱이 없지.
“잠시 기다려라, 네놈들을 보고 싶어 하는 분들이 계시니.”
우리 얘기가 벌써 여기까지 전해진 것일까? 우리를 가둔 기사의 말이 있은 지 십여 분이 지나자 곧 이리로 향하는 여러 개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익!
쿵!
문이 열리고 드러나는 얼굴들. 전형적인 부패 관료의 인상을 보이는 얍삽하게 생긴 중년인과 보좌관으로 보이는 젊은 녀석이었다. 그들은 날 흥미롭게 보는 듯하더니 곧 침대에 누워 있는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부모에게도 버림을 받고, 참으로 불쌍한 놈이로군.”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도대체가 그놈의 데실리안이란 이름이 뭔지.”
“어쭙잖은 자존심이겠지.”
그렇게 한마디씩 말을 나눈 그들은 도대체 왜 이곳에 왔는지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만큼 왔던 것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하지만 그들이 돌아가기 전 보좌관으로 보이는 젊은 녀석이 하는 말을 나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쿠시오스, 이놈들은 너에게 맡길 테니 책임지고 살피도록 하라.”
“……!”
순간 그 말에 벼락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든 나였다.
‘서, 설마 쿠시오스가 내가 아는 그 쿠시오스가 아니겠지?’
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던가. 방문에 나 있는 조그마한 창이 열리고 그 안으로 익숙한, 하지만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는 쥐의 면상을 닮은 밉상스런 얼굴이 나타났다.
“쿠, 쿠시오스 집행관!”
녀석은 밀자크 남작의 가신으로 있던 바로 그 쿠시오스였다. 난 두 눈을 치켜뜨며 소리쳤다.
“어, 어떻게 당신이 여기에?”
그런 내 말에 잠시 눈을 가늘게 뜨며 날 살펴보던 쿠시오스는 입가에 비릿한 웃음을 머금고는 입을 열었다.
“데실리안의 녀석과 함께 웬 쥐새끼 한 마리가 같이 왔다고 하기에 혹시나 해서 와 봤건만 역시나 네 녀석이었군. 후후후.”
“날…… 기억하나?”
“당연하지. 자칫 네 녀석으로 인해 내 계획이 엉망이 될 뻔했지. 그 멍청한 밀자크가 그 사실을 알았다간 얌전히 파병할 리 없으니까 말이야.”
밀자크 남작은 모르는 일이란 말인가. 이제야 지금껏 겉돌던 퍼즐이 맞아 가는 느낌이다. 파병이 취소되지 않고 진행된 이유. 그리고 쿠시오스가 이곳에 있는 이유.
“배신……인 거냐?”
이를 갈며 내뱉은 내 말에 녀석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큭큭큭큭. 배신이라니? 말은 가려서 하지? 난 어디까지나 내 자유의사에 따라 선택을 한 것뿐이다. 애초에 하인스의 귀족이 된 것 역시 밀자크 녀석에게 돈으로 산 것일 뿐. 왜냐하면 그게 이익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얀 제국의 녀석들에게 장소를 제공하고 입을 다무는 조건으로 나는 얀 제국의 작위를 얻기로 했다. 하인스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얀 제국의 작위 말이다.”
“…….”
난 쿠시오스의 말에 잠시 잊고 있던 녀석의 본성이 떠올랐다. 돈이라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았던 녀석.
하지만 난 녀석에게 뭐라 말할 수 없었다. 일찍이 난 그런 녀석의 본성을 이용하려 하지 않았던가. 더욱이 녀석의 행동을 꾸짖을 자격도 없었다. 나 역시 살기 위해 지금은 얀 제국에게 머리를 숙이고 있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돈과 목숨이라는 것만 다를 뿐, 저 녀석이나 나나 결국은 똑같은 놈이었다.
“한 가지만 더 묻지. 마을은…… 어떻게 되었나?”
중요한 건 누가 잘했느냐 잘못했느냐가 아니었다. 쿠시오스가 이쪽으로 온 이상 마을의 안전은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전쟁터에 나간 남편,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을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난 그것이 궁금했다.
그런 내 말에 쿠시오스는 피식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 요 밑에 있는 그 마을을 말하는 건가? 거기라면 이미 쓸어버렸지. 자칫 정보가 새 나가기라도 하면 곤란하거든?”
뿌득!
뭔가가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똑같은 놈이라고? 아니야. 결코 똑같지 않아. 적어도 나는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는단 말이다!’
아무런 죄 없는 마을 사람들. 단지 한 인간의 이익에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 하나로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죽임을 당해야 했다.
“이 개자식! 네놈이 그러고도 사람이냐!”
더 이상 참지 못한 난 그대로 달려 나가며 녀석의 면상이 들이밀어진 곳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하지만 쿠시오스는 이미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 한 발 물러서는 것으로 가볍게 내 주먹을 피했다.
그러고는 원통해 하는 나를 비웃었다.
“큭큭큭, 그 마을 사람들이 꽤나 소중했었나 보지? 하지만 결국 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원래 세상은 그런 거지. 힘이 없다면 언제나 이용만 당하다 비참하게 죽을 뿐이다. 그래서 난 그 힘을 위해 이곳에 있는 거지. 날 원망하나? 큭! 그렇다면 힘을 키워라. 그리고 날 죽여라. 하지만 곧 노예가 될 네 녀석에게 그런 날이 올 수나 있을까? 하하하하하!”
“크아아아아악!”
쾅! 콰과광!
너무나도 분하고 원통한 마음에 난 멀어져 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함을 내질렀다. 피가 나도록 문을 때리고, 발목이 시큰해질 때까지 문을 걷어차 보기도 했지만 굳게 닫힌 문은 결코 열리지 않았다.
“크흑! 젠장! 빌어먹을!”
난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쿠시오스에 대한 분노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날 괴롭게 했다.
현재로써는 이곳에서 탈출하는 것만이 최선인 나에게 있어 녀석에 대한 복수는 꿈도 꿀 수가 없었다.
그래, 난 이기적인 녀석. 나 혼자 사는 게 역시나 더 다급한 녀석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불같이 타오르는 이 가슴속까지 이기적인 것은 아니란 말이다. 지금은 네 말대로 힘이 없어 이 모양 이 꼴이지만 언젠가 나에게도 힘이란 것이 생긴다면 그때는, 그때는 네 녀석의 원대로 내가 널 찾아가 네놈을 꼭 없애겠다.
난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날 밤은 원통한 마음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당장 내일부터 노역에 시달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잊고 싶다고 잊어지는 것은 아니었기에 난 밤새도록 두 눈이 퉁퉁 불 만큼 홀로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리고 다음 날, 난 쿠시오스와 그를 수행하는 여러 병사들의 손에 이끌려 노역장에 도착하게 되었다.
가까이에서 본 바르데인 산맥은 생각보다 훼손이 심했다. 나무는커녕 풀 한 포기 보이지 않았다. 온통 뻘건 흙과 바위가 드러났고, 마치 치즈에 구멍이 뚫린 듯 이곳저곳에 굴이 파여 있었다.
도대체 무엇을 찾기에 이리도 열심히 하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난 앞서 가던 쿠시오스에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것 봐, 내가 어딘가를 찾아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데 말이지, 일단 그곳이 뭐 하는 곳인지는 알고나 시작하지?”
현재 내 처지가 쿠시오스에게 미운털이 박히면 곤란한 상황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녀석에게 향하는 내 말투가 고울 리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 밉상스런 뒤통수를 짱돌로 후려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내 목숨도 온전하지 못할 것이란 걸 알기에 최대한 꾹꾹 눌러 참을 뿐이었다.
뭐, 이를 테면 꼴사나운 반항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녀석에 대한 복수라고는 이것밖에 없었기에 날카롭게 노려보는 그 눈빛이 무서워도 난 피하지 않았다.
그런 내 모습에 쿠시오스는 가소롭다는 듯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훗. 퉁퉁 부은 눈을 하고 그렇게 무섭게 날 노려봐야 우습다는 것을 알아야지. 하지만 뭐, 그래도 궁금해 하니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말해 주도록 하지. 네 녀석이 이곳에서 찾을 것은 바로 대마법사 아론의 던전이다. 대마법사 아론이라면 아무리 무식한 네 녀석이라 해도 알고 있겠지?”
“…….”
난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대마법사 아론.
내가 아무리 무식하다 해도 모를 리가 없다. 천 년 전 하이네스 제국을 세운 위대한 대마법사가 아니던가.
‘과연 그랬군. 대마법사 아론의 던전이라면 그럴 만도 해.’
얀 제국이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먼저 전쟁을 일으킨 이유. 녀석들이 찾는 것이 아론의 던전이라면 충분히 납득이 갔다.
당시 온 대륙을 피로 물들였던 쉐인을 물리치고 하이네스 제국을 세웠던 경이로운 아론의 마법을 이을 수 있다면 이런 전쟁에서의 손해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필시 얀 제국의 더러운 귀족 놈들이라면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젠장할 놈들. 결국 밑에서 죽어 나가는 것은 우리뿐이지.’
녀석들에게 일반 평민들은 체스 판의 말일 뿐이다. 필요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며 때론 죽을 줄 알면서도 명령이 떨어지면 가야만 하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가차 없이 버려질 수도 있는 존재.
녀석들의 생각이야 뻔했다.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는 더 많은 땅이 필요했을 테고, 그러기 위해선 더 강력한 힘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 시기에 발견된 아론의 던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달콤한 유혹이었을 테지.
결국 그들의 욕심에 의해 죄 없는 난 이런 곳까지 끌려와 생에 다신 없을 땅굴 파기를 하게 생겼다.
“작업 전에 미리 한마디 해 두지. 나로서는 건방진 네 녀석을 지금이라도 당장에 죽이고 싶지만 안델리크 님의 명령이 있으니 참겠다. 허나 만일 네 녀석이 아닌 다른 이가 먼저 아론의 던전을 발견한다면 그땐 네놈의 질긴 명줄도 끊길 거라는 걸 명심하도록. 온 힘을 다해 땅굴을 파야 될 것이다. 큭큭큭.”
쿠시오스는 그 말을 끝으로 나를 철저히 감시하라는 말과 함께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난 그렇게 사라지는 쿠시오스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미친 새끼. 어차피 내가 찾아도 살려 주지 않을 거라는 걸 누가 모를 줄 알고?’
하지만 그럼에도 난 반드시 아론의 던전을 찾아야 했다. 녀석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였다.
지금 상황에서 도망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내가 먼저 던전을 찾는 것.
산에 굴을 판다는 것은 입구를 찾지 못했음을 뜻했다. 일단 먼저 굴을 파 들어간다면 필시 안에서부터 밖으로 빠져나오기는 쉬울 터였다.
어느 것 하나 불확실한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난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아론의 던전 따위 내 알 바 아니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생존뿐.
“허튼짓하면 곧바로 네 목이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 얌전히 행동하는 것이 좋을 거다. 자, 받아라.”
여러 병사 중 선임으로 보이는 자의 살기 어린 목소리가 날 상념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는 그렇게 말한 뒤 나에게 한 자루의 삽과 곡괭이를 내밀었다. 반항하면 죽음뿐이라는 그 위협에 난 군말 없이 그것들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 곧 이어진 궁금증에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난…… 어디서 일하면 되는 거요?”
“그건 우리도 모른다.”
“모른다니?”
전혀 의외의 말에 난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목소리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가 들은 건 네 녀석이 이곳 바르데인 산맥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것뿐. 난 네 녀석을 감시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최대한 네 녀석에게 협조하라는 명령 또한 받았다.”
“……그 말은 내가 알아서 자리를 잡으란 소리로군.”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