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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영웅 폴 1(17화)
5장. 사냥꾼과 기사의 무게(4)
꽤나 곤란한 상황이었다. 내가 바르데인 산맥에 대해 잘 안다고는 하지만 그 속까지 일일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어찌 알겠는가.
한 가지 알고 있는 것은 이 산의 깊은 지하는 석회암으로 되어 있다는 것 정도였다. 거기로 지하수가 흐르다 우리 마을 근처의 개울에서 다시금 솟구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근처에 얕지만 석회암 동굴도 여럿 있어 야생 동물의 은신처로 쓰이기도 했다. 아마 학살자 녀석도 그중 한 동굴에서 지냈을 것이다.
지금 산에 파 놓은 여러 구멍을 보아하니 벌써 주위의 동굴은 모두 조사를 해 본 모양이었다. 하지만 개중에도 없으니 결국 이렇게 땅굴을 파는 것이고 말이다.
아무튼 확실한 건 아론의 던전이 이 산맥 아래 어딘가에 있다면 적어도 석회암 지대를 벗어난 곳에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마법사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자연을 이길 수는 없으니 거대한 지하수를 밑에 두고 던전을 만들었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해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일단 지반이 약한 곳은 피하되 또한 석회암 지대를 벗어난 곳이라야 했다.
지금 있는 곳에서는 잘 알 수 없었기에 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좀 둘러봐야 될 것 같은데.”
“협조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할 수 없지. 앞장서라.”
그렇게 난 병사들을 옆에 끼고 작업이 벌어지는 곳을 중심으로 산을 빙 둘러보았다.
얀 제국도 바보는 아닌지라 이곳의 지형을 알고 최대한 지반이 약한 곳은 피하면서 땅굴을 파고 있었다. 하지만 일단 의심 가는 곳은 닥치는 대로 파고 보는지라 군데군데 무너진 곳도 여럿 보였다. 따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 안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모두 매장당했을 터였다.
“이곳이 좋을 것 같소.”
저녁노을이 질 때가 되어서야 난 비로소 한 지점을 가리켰다. 정말이지 심사숙고해서 고른 자리였다.
하지만 지켜보던 병사들의 표정은 영 아니었다.
“정말 여기로 할 텐가?”
“그렇소.”
“여기는 파다가 중도에 포기한 것으로 아는데?”
병사들의 표정이 영 아닌 이유였다. 이곳은 이미 누군가가 파 놓은 흔적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곳을 선택한 것은 두 가지 이유였다. 물론 첫 번째는 아주 간단한 이유였다. 여기는 산 반대편으로, 막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감시가 소홀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니었다. 내가 잘못 생각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이곳만큼 적당한 곳도 드물었다. 언뜻 보면 다른 곳과는 다를 게 없어 보이는 땅굴이었지만 밖에서 보고 안에서 직접 살펴보니 중간에 석회암 지대가 아닌 다른 지층으로 통하는 곳이 있었다.
내가 지질학자가 아닌 이상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었지만 간단히 곡괭이로 때려 보니 그 강도가 만만치 않았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땅굴을 파는 내 입장에서는 곤란했지만, 여기까지 온 마당에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니 의심 가는 곳은 무조건 파 보는 수밖에 없었다.
“뭐, 네놈의 선택이니 어쩔 수 없지. 일단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부터 작업하는 것으로 하지.”
날이 저물고 있었기에 난 병사들에게 이끌려 다시금 예의 그 건물에 갇히게 되었다.
끼이익!
덜컹!
자물쇠가 잠기는 소리가 들려오고 이윽고, 그들은 멀어져 갔다. 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방 안은 침묵 속에 잠겼다.
“이 인간은 아직도 이러고 있네?”
난 죽은 듯 침대에 누워 있는 크리스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누구는 내일부터 고생해야 되는데 누구는 참 속도 편히 잘도 자고 있군그래.
괜히 미운 마음에 난 잘생긴 녀석의 이마에 가볍게 꿀밤을 먹여 준 뒤 돌아서서 내 침대로 향했다.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누워 있는 사람한테 이게 무슨 짓이지? 상당히 예의가 없군.”
남자다운 굵은 목소리. 하지만 낮게 울리는 미성이었다. 난 깜짝 놀라며 빠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언제 깨어났는지 크리스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깨어났네. 몸은 좀 괜찮아?”
여전히 밉살스런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그간 돌봐 온 시간이 있었기에 난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며 물었다. 그에 녀석은 잠시 이마를 감싸 쥐더니 무뚝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걱정할 것 없다. 머리가 조금 아픈 것을 제외하면 멀쩡하니. 그보다 여기는 어디지?”
“여기는 데실리안 산맥에 있는 노역장이다.”
“그런가…….”
자신의 처지를 새삼 깨달은 듯 피식 웃음을 터뜨린 녀석은 이어 날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일단 치료해 준 건 고맙게 생각한……?!”
하지만 크리스는 채 말을 끝맺지 못했다. 마치 못 볼 것을 본 듯 화등잔만 하게 커지는 두 눈.
“네, 네놈은!”
‘아뿔싸!’
난 그런 크리스의 반응에 나도 모르게 이마를 쳤다. 녀석이 깨어난 것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지금 나와 녀석의 관계를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필시 가만있지 않겠지.
‘이런 젠장맞을.’
난 최대한 얼굴에 웃음을 지으며 크리스가 흥분하지 않도록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자,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말고 일단 몸을 좀 생각해서…….”
“이노오오오옴!”
하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그런 내 말이 기폭제가 된 듯,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경을 헤매던 사람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벌떡 몸을 일으킨 그는 내가 뭘 어찌할 틈도 없이 내 멱살을 잡고 날 노려보았다.
“네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고 있는가! 네놈이! 네놈 때문에 난 기사로서 죽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까지 박탈당했단 말이다!”
마치 잡아먹기라도 할 듯 으르렁거리는 크리스의 말에 난 어이가 없었다. 이게 뭔 헛소리인가. 그 말은 그때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게 더 나았을 거라는 소리?
크리스의 태도에 난 조금 전까지 가졌던 반가움이 싹 사라졌다. 난 흥분으로 인해 붉게 물든 녀석의 두 눈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냥 거기서 네 녀석이 죽든 말든 내버려 두는 게 더 나았을 거라는 뜻이냐?”
“그렇다! 이런 치욕을 받느니 차라리 거기서 죽는 게 나았다!”
“말 참 쉽군. 죽는 게 낫다고! 헛소리하지 마!”
난 잡혀 있던 멱살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러곤 이번엔 도리어 내가 녀석의 멱살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죽는 게 그렇게 쉬운 건 줄 알아? 명예? 그딴 게 다 뭔 소용이야? 죽으면 다 끝이라고!”
“네놈 같은 무지렁이는 모를 거다. 나에게 있어 명예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 그것이 바로 기사다.”
“아아, 그래. 그 잘난 기사도를 씨불이는 건가? 네놈 말대로 난 아무것도 몰라. 솔직히 네놈이 죽든 말든 난 상관없었어! 하지만 네놈이 그렇게 죽으면 남겨진 우리는 어쩌라는 거지? 같이 따라서 죽으란 소린가? 웃기는 소리 마시지! 난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순 없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개 같은 곳에서 살고 싶단 말이다.”
“적에게 꼬리를 흔드는 게 과연 삶인가? 그것이 진정 네놈이 바라는 삶인가!”
“그래! 살 수만 있다면 그딴 것 어찌 되든 나하곤 상관없어! 국가? 씨팔! 국가가 나한테 해 준 게 뭔데! 해 준 거라고는 죄 없는 사람 끌어다 죽게 하는 것밖에 더 있어?”
퍼억!
“크윽!”
순간 난 눈앞에서 불이 번쩍이는 듯한 착각과 함께 왼쪽 볼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뒤로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간신히 정신을 차린 난 주먹을 움켜쥔 채 죽일 듯 날 노려보는 크리스를 향해 거칠게 말을 내뱉었다.
“왜? 내 말이 맞으니까 할 말이 없나?”
잔뜩 비아냥거리는 내 말에 크리스는 한 자 한 자 씹어뱉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미 기사의 도를 저버린 나에 대한 모욕은 참을 수 있다. 허나 하인스를 욕하는 네놈만큼은 결코 용서할 수가 없구나.”
“용서하지 않으면 어쩔 건데? 날 죽이기라도 할 건가?”
“물론. 네 녀석을 죽이고 나 역시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을 것이다.”
“크하하하하하하!”
난 돌연 미친 듯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지 웃긴 녀석이다.
“그래, 그런 모습이다. 자기만 알고 남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식. 자기만 옳다는 그런 생각. 네놈도 어찌할 수 없는 귀족 나부랭이로군. 혹시 이런 생각 해 본 적 없나? 애초에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원인 말이다. 네놈이 메틴성에서 그딴 헛소리만 지껄이지 않았던들, 난 몸 성히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단 말이다.”
모든 건 다 저 녀석 때문이다. 저 녀석이 허튼소리만 지껄이지 않았다면 에르손도, 다른 모두는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었을 것이다.
“다 네놈 때문이란 말이다. 그래 놓고 이제 와 날 죽이겠다고? 솔직히 네 녀석한테는 죽는 게 쉬울지도 모르지. 그동안 호의호식하며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온 네 녀석한테는 지금 죽나 나중에 죽나 똑같을지도 몰라. 하지만 난 아니야. 못해 본 것도 많고 꼭 이루어야 할, 작지만 소망 하나도 있다. 그것들을 이루기 전까지는 난 결코 죽을 수 없다.”
“얀 제국의 개가 되어서라도 끝끝내 살아남겠다는 소리냐?”
“물론.”
난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에 녀석은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놈이로군.”
“큭. 그건 피차일반인 것 같은데?”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현재로써는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정의니 뭐니 따위 하는 것도 아무 필요 없었다. 이기는 자가 진리요, 그의 말이 곧 뜻이 될 것이다.
“죽어!”
“네놈이야말로!”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녀석과 나는 동시에 주먹을 내뻗었다.
퍼억!
서로의 안면에 적중하는 주먹. 서로가 피하거나 맞는 것은 애초에 염두에조차 두지 않았다. 그냥 서로를 죽이겠다는 일념하에 열심히 주먹을 뻗을 뿐이었다. 그것은 차라리 애들 싸움만도 못했다. 이기기 위해 물어뜯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정말이지 돌이켜 보면 그때 난 정신이 어떻게 되었었나 보다. 상대는 대륙 최강이라 불리는 무신 데실리안 가문의 장남이었다. 겁도 없이 그런 사람을 향해 주먹질을 해 대다니.
하지만 난 오로지 이 벽창호 같은 녀석의 생각을 고쳐 주겠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쿠당탕!
엎치락뒤치락하며 얼마를 그렇게 싸웠을까?
난 기절했는지 더는 움직이지 못하는 크리스의 몸을 타고 앉아 녀석의 얼굴에 주먹을 연신 꽂아 넣으며 소리쳤다.
“죽이지는…… 않아. 헉, 헉. 하지만 네놈의 썩은 근성. 헉, 헉…… 내가 고쳐 놓고…… 말 테다!”
싸움은 전혀 의외의 결과를 낳았다. 서로 몰골이 말이 아니기는 했지만 어찌 되었든 이 싸움 자체는 내 승리였다.
기사라는 족속을 이겼다는 자부심. 난 그것 하나에 취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몸을 억지로 지탱하고 녀석을 내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이겼……다…….”
쿵!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정신을 잃고 뒤로 넘어갔다.
다음 날 아침, 난 온몸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에 잠에서 깨어났다.
“아뜨뜨뜨.”
일어나는 것조차 고역일 정도로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이곳저곳을 살펴보니 온통 멍투성이. 잘생긴 얼굴 역시 심하게 부어 있었다.
‘젠장. 이래선 오늘 일하기는 글렀군.’
맞지나 않으면 다행일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난 반대편에 쓰러져 있는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짓이겨진 찐빵 같은 얼굴을 한 채로 죽은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일견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지금 내 얼굴 상태도 저와 그리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에 다시금 우울해졌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난 온몸에 가해지는 고통을 참으며 간신히 몸을 일으킨 뒤, 우리가 기절한 사이 가져다 놓은 듯 보이는 딱딱한 빵을 씹어 삼켰다. 배는 고프고 일은 나가야 하니 언제까지 누워 있을 틈이 없었다.
그렇게 어렵게 아침 식사를 하는 사이, 드디어 녀석도 정신을 차린 듯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나와는 달리 고문으로 인해 애초부터 몸이 정상이 아니었기에 결국 일어나는 것은 포기하고 한쪽 벽에 간신히 몸을 기대앉았다.
그러고는 멍하니 내가 하는 양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 상태에서도 잘도 목구멍으로 넘어가는가 보군.”
또 해보자는 건가? 어딘지 가시가 박힌 듯한 음성에 나 역시 비아냥거리듯 입을 열었다.
“아아, 난 누구와는 달리 꼭 살아서 나가야 하거든. 그러기 위해서는 일해야 하고, 일하기 위해서는 배가 든든해야 해서 말이야.”
“큭큭큭. 일이라……. 무슨 일을 한다는 거지? 녀석들의 발바닥을 씻겨 주기라도 하는 건가?”
난 어린애 수준보다도 못한 녀석의 도발에 그냥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도련님으로 곱게 자랐으니 욕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냐? 뭣하면 욕이란 게 진정 어떤 건지 내가 가르쳐 줄 용의도 있었지만 지금은 말싸움할 여력도 없었기에 난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별일 아니다. 그냥 땅굴을 파는 거지.”
“땅굴?”
좀 더 설명을 요구하는 그 눈빛에 난 들고 있던 빵을 내려놓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가지만 묻지. 네 녀석은 이번 전쟁이 왜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거냐?”
“난 로이어 제국의 황위 계승권 다툼으로 인한 혼란을 틈탄 얀 제국의 선제공격으로 알고 있다. 단순히 영지를 확보하기 위한 공격이 아니었던가?”
“역시 그렇게 알고 있군. 하지만 그건 구실에 불과할 뿐, 진정한 이유는 따로 있지.”
“진정한 이유?”
“그래. 내가 땅굴을 판다고 했지? 사실 그건 뭔가를 찾기 위해서다. 내가 지금껏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뭔가를 잘 알고 있다고 약간 거짓말을 보탰기 때문이지. 바르데인 산맥이라면 내가 모르는 것이 없다고 했거든.”
내 말에 크리스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어 다급히 말을 이었다.
“그렇다는 건 지금 네 말은 그 뭔가를 위해 얀 제국이 일부러 전쟁을 일으켜 시선을 그쪽으로 돌리려 했다는 것인가?”
“오, 바보인 줄 알았더니 제법 머리도 돌아가는군그래.”
난 솔직한 심정으로 손뼉을 쳐 주었다. 저렇게 잘 돌아가는 머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어찌 생각은 그리도 꽉 막혔는지.
“그 뭔가가 무엇인지 그대는 알고 있는가?”
하지만 내 놀림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꽤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 역시 그런 녀석의 반응에 흥미를 잃은 터라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해 주었다.
“잘 알고 있지. 나도 처음엔 깜짝 놀랐거든? 녀석들이 찾고 있는 것은 바로 아론의 던전이라고 하더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