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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영웅 폴 1(18화)
5장. 사냥꾼과 기사의 무게(5)


내 말에 크리스는 퉁퉁 부어 눈동자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두 눈을 있는 힘껏 부릅떴다. 사실 나도 놀랄 노 자인데 녀석은 오죽하겠는가. 더욱이 얀 제국이 찾고자 하는 것은 녀석이 그토록 부르짖던 하이네스 제국의 초대 황제인 아론의 던전이다.
“이런 간악한!”
얀 제국의 행태에 화를 주체할 수 없었는지 주먹을 불끈 쥐는 크리스의 모습에 난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봐, 잘 들어. 사실 난 네놈이 죽든 말든 관심 없어. 하지만 죽으려거든 나중에 죽어. 괜히 네놈으로 인해 나까지 피해 보지 않도록 하라는 말이다.”
“끝까지 녀석들의 개가 될 셈이냐? 아론님의 던전까지 팔아넘기면서?”
분한 듯 노려보는 녀석의 모습에도 난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 그렇게 해서라도 살 수만 있다면.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거다. 난 네 녀석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죽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모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네놈을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지만 난 참았다. 기사의 명예? 그딴 거 나랑은 전혀 상관없어. 나한테 중요한 건 여기를 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 이것 한 가지뿐이다.”
그 말을 하는 사이, 어느새 다시금 병사들이 찾아왔고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난 열린 문을 통해 밖으로 향하며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남겼다.
“어차피 네 녀석도 버림받은 몸. 기사도 아닌 이상에야 더 이상 말도 안 되는 그딴 기사도 따위는 집어치우는 게 좋을 거다.”
“…….”
크리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어딘지 공허해 보이는 눈동자로 내 뒷모습을 좇을 뿐이었다.
솔직한 마음으로 나 역시 기분이 좋지 못했다. 마지막 말은 내가 생각해도 심한 감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녀석이 내세우는 명예니 뭐니 하는 따위의 논리를 아마도 난 죽을 때까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녀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냥꾼으로 지내며 당장에 한 끼 식사가 걱정이던 나의 삶은 말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시될 수밖에 없는 삶이었다. 나에게 있어 그것이 전부이듯 어렸을 때부터 데실리안 가문의 사람으로 태어나 가문의 명예와 기사의 명예니 하는 것들을 배워 왔던 크리스에게는 그것이 자신을 지탱하던 전부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내 손에 의해 박살이 나 버렸다. 단순히 서로 간의 논리가 맞지 않은 것치고는 꽤나 과격한 결과였다. 솔직히 미안하지 않다면 난 양심도 없는 놈일 것이다.
그럼에도 난 결코 사과 따위를 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나 역시 내 생각에 충실했을 뿐, 결국 누가 옳고 그른가는 아무도 판단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벽창호 같은 성격만 어떻게 고쳐진다면 녀석에게는 이득이겠지.’
난 애써 그렇게 납득하고 말았다.
밝은 곳으로 나오자 당장 내 몰골을 확인한 병사들이 깜짝 놀라 뒤집어진 사소한 일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하루가 지나갔다. 목표로 점찍어 둔 땅굴에서 열심히 곡괭이질을 하고 그들이 가져다준 간단한 빵을 먹고 또 중노동.
몸 상태가 말이 아닌지라 작업 속도는 더딜 수밖에 없었다.
딱히 다른 노예들처럼 채찍을 휘두른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당장 급한 게 나였기 때문에 난 쉬지 않고 계속해서 곡괭이를 내리쳤다.
“그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결국 병사들의 제지가 이어질 때까지 난 미친 듯이 일을 했다.
‘하? 겨우 이것밖에 못하다니.’
난 오늘 내가 한 작업 분량을 보곤 잠시 실소를 지었다. 이거야 원, 돌 부스러기 몇 조각뿐이군.
이 곡괭이질이란 게 생각보다 힘들었다. 과거 학살자 녀석을 잡기 위해 땅을 팔 때도 느꼈지만 한 점에 계속해서 타격을 가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이러다간 꼼짝없이 여기서 땅굴만 파다 인생 종 치겠군.’
난 씁쓸하게 웃었다.
다시금 숙소 겸 감옥 겸 내게 지정된 방으로 들어온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한 치의 미동도 없이 아침의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는 크리스의 모습이었다.
녀석은 내가 들어왔음에도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아무래도 아침의 일 때문이겠지?’
다시금 고개를 치켜드는 양심의 가책에 난 쓸데없이 말을 걸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은 조금이라도 더 자고 싶었다.
하지만 얄미운 녀석은 그런 날 또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열심히 일하는 것 같군.”
“아아, 그래. 살려면 별수 없지.”
“하지만 의문이군. 과연 그대가 던전을 발견한다고 해도 그들이 얌전히 살려 둘까?”
난 속으로 ‘이게 또 왜 시비야?’라는 생각을 하며 뉘었던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대답을 바라는 듯 빤히 바라보고 있는 크리스에게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누가 그걸 모를까 봐 그래?”
“그렇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지?”
난 잠시 의문이 들었다. 죽자고 달려들 때는 언제고 갑자기 남이 뭘 하는지는 왜 궁금한 건데?
그런 내 시선을 느꼈던지 크리스는 피식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침에 그대와 했던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확실히 그대의 말처럼 지금의 난 기사가 아니다.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공작님은 신경 쓰지도 않겠지.”
그 부분에서 크리스의 두 눈동자에는 말 못할 슬픔이 느껴지는 듯했다. 난 나도 모르게 그를 향한 연민의 감정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저 녀석도 참 안됐군.’
국익이라는 미명하에 자식까지 내칠 수 있는 사람을 아버지로 둔 심정을 난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잠시 뜸을 들였지만 크리스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난 비록 기사의 명예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나라를 생각하는 한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이 무의미한 전쟁에서 하인스의 피가 흘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여기서 살아 나가겠다고 했던가. 난 그 방법을 알고 싶을 뿐이다.”
난 그런 크리스의 말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과연 영웅의 핏줄이란 걸까? 연이어 닥친 시련에 신념이 무너져도 다시금 일어서는 놀라운 의지. 이것이 바로 한낱 사냥꾼과는 다른 기사가 가지는 삶의 무게란 걸까?
난 적잖이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딱히 어떻게 하겠단 생각은 없어. 단지 누구보다 빨리 던전을 찾아야 한다는 것 정도?”
“왜 그런지 이유를 알 수 있을까?”
“단순한 이유지. 들어오는 곳이 있다면 나가는 곳이 있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어?”
“그렇군.”
크리스는 그런 내 말에 잠시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다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 계획에 나 역시 동참할 수는 없겠나?”
“……뭐?”
난 잠시 내가 뭘 잘못 들었나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크리스의 말에 그의 뜻이 확고함을 알 수 있었다.
“나 역시 그대를 도와 던전을 찾겠다는 뜻이다. 가급적이면 녀석들이 찾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지만 그건 무리니 어쩔 수 없겠지.”
“진심……이로군.”
“그래. 하지만 이것 한 가지만은 꼭 말해 두고 싶군. 비록 내가 그대의 말에 따르기로 했지만 그렇다고 그대의 생각까지 인정하는 것은 아니란 것을. 단지 생존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는 그 생각은 너무 위험하다.”
‘밉살스런 녀석 같으니.’
끝까지 지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나 역시 그렇게 쉬운 놈이 아니라, 이 말이다.
“누가 할 소릴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나야말로 네 녀석이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거든? 하지만 지금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이니 넓은 아량으로 날 돕는 것을 허락하지.”
“훗. 그렇다면 일시적인 동맹 관계 성립이란 건가.”
“그래. 어디까지나 일. 시. 적. 동맹 관계라는 것을 잊지 말도록.”
난 다가가서 크리스의 손을 잡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굳게 맞잡은 손. 말 그대로 어느새 손에는 힘줄이 돋아나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서로 통성명이나 하지. 내 이름은 잘 알거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야기해 주지. 크리스 반 데실리안. 앞으로 잘 부탁한다.”
콰드득!
‘큭!’
부탁한다는 말과 동시에 더욱더 가해지는 힘. 이에 질세라 나 역시 손에 더욱더 힘을 쥐며 씹어 뱉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폴. 잘 부탁하지.”
콰드득!
뼈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미묘하게 찌푸려지는 얼굴. 하지만 애써 웃음을 지으며 크리스는 말을 이었다.
“참으로 간단한 이름이니 외우기도 편하군.”
“…….”
순간이지만 그 말에 나 역시 얼굴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감히 내 유일한 약점을 건드리다니.
애써 이름 지어 주신 아버지한테는 미안한 말씀이지만 정말 난 내 이름이 싫다.
‘폴이 뭐냐고, 도대체!’
길 가다가 내 이름을 외치면 열 명 중 다섯 명은 돌아본다는 그 흔한 이름이 바로 내 이름이다.
우리 아버지? 훗, 우리 아버지는 그 나머지 다섯 명을 차지한다는 ‘찰스’다.
어머니만 살아 계셨더라면 이런 이름은 갖지 않았을 텐데. 참으로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이름을 무시하지 마라. 과거 마도 시대가 도래하기 전 세상이 혼돈을 맞이할 때 대륙 최강을 뽑는다는 아이언 피스트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인물이 바로 내 이름과 같은 폴이다. 성은 피닉스.
전설에 따르면 그분의 붕권 한 방에 산이 무너질 정도라 하였지. 뭐, 그렇게 위대하신 폴 덕분에 가장 흔한 이름이 되었지만.
아무튼 난 치사하게 이름 갖고 놀리는 크리스를 향해 입 꼬리 한쪽을 말아 올리며 입을 열었다.
“요즘 애들도 그런 유치한 장난은 하지 않는 것으로 아는데……. 수준을 알 만하군그래, 크리스 어린이.”
“…….”
대번에 구겨지는 크리스의 얼굴.
정말이지 이래 갖고선 제대로 일이나 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6장. 탈출하고 보니 이게 웬?(1)


깡! 깡!
조용한 땅굴 속에서 오직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곡괭이 소리뿐.
‘아, 정말 지겹다.’
난 잠시 곡괭이를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열심히 일은 하는데 작업량이 눈에 띄지 않으니 아무리 사정이 급하다고는 해도 지겨울 수밖에 없었다.
깡! 깡!
이렇게 농땡이를 부리는 나와는 달리 크리스는 마치 그 뭐냐? 마법사가 만든 골렘처럼 묵묵히 곡괭이를 내리치고 있었다.
어젯밤,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동맹 관계를 맺은 크리스는 아침에 일을 나가려는 날 따라 본인도 같이 땅굴을 파겠다고 자청했다. 어차피 크리스 역시 소용 가치가 없어졌기에 나와 같이 이쪽으로 온 마당이니 병사들은 그런 크리스의 청을 마다하지 않았다. 다만 몸 상태를 걱정할 뿐.
괜히 골골대다 죽기라도 하면 자신들이 문책을 받는다나?
하지만 그런 병사들의 걱정이 무색할 만큼 크리스는 너무나도 힘차게 곡괭이를 내리치고 있었다.
깡! 깡! 콰르르르!
두어 번 내리칠 때마다 떨어져 나가는 돌덩어리들. 난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내가 작업하고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이건 말도 안 돼!”
갑작스런 외침에 크리스는 날 의문스럽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거지?”
“그게 그렇잖아! 봐! 어째서 네 녀석의 작업 속도가 나보다 더 빠른 거지?”
“하아?”
잠시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던 크리스는 이내 뭔가를 깨닫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왠지 그 모습이 날 비웃는 듯해 난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뭐냐, 그 표정은?”
“아니, 단지 조금 웃겨서 말이다. 그대는 날 뭐라 생각하는 거지?”
“뭐긴 뭐야? 위대하신 크리스. 하지만 지금은 나랑 같은 노예.”
비아냥거리는 내 말에 크리스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말고 그전에 말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난 그래도 기사로서 이름을 날리던 몸이었다.”
“…….”
하도 편하게 지내다 보니 잠시 잊고 있었다. 그래, 이 녀석은 바위도 쪼갠다는 기사 나부랭이였었지. 한낱 사냥꾼에 불과한 나와는 레벨부터가 다르다.
‘가만! 그러고 보니 더 이상하잖아?’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난 다급히 말을 꺼냈다.
“잠깐! 네 녀석이 기사라면 어째서 그땐 나한테 신나게 얻어맞은 거지? 거기다 바위도 가르는 실력으로 겨우 요것밖에 못하나?”
단지 요것이라고 하기엔 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지만. 아무튼 그런 내 말에 크리스는 씁쓸한 미소와 함께 자신의 소매를 걷어 보였다. 도저히 남자의 속살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매끈한 녀석의 팔뚝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투박하게 생긴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그게 뭔데?”
“마나 봉인 팔찌다.”
“마나…… 봉인?”
“그렇다. 이것이 있는 한 난 예전과 같은 힘을 낼 수가 없다. 기껏 그대와 비슷한 정도밖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