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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크 1권(22화)
9. 남부 침공(2)


“에스터 남작, 자네는 이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나?”
“……흠, 솔직히 말씀드리면,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전쟁은 비극이겠죠. 저는 군인이니 명령이 있으면 따를 뿐입니다.”
에스터는 지금 위험한 말을 한다. 군 지휘관의 입에서, 군의 행동을 부정하는 발언을 한 것이다. 그것도 왕에게…….
아직 아시아 지휘관들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하기는 노예 출신의 일반 병사가 일만 명의 병사를 지휘하는데, 이정도 해 주는 것도,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욕심으로야 모두 이,순신 장군이 되어 주고, 강,감찬이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배우지 못한 이들이, 1, 2년 만에 그렇게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보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된다. 이들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 싸워서 이길까?’ 하는 것이지, ‘전쟁은 비극이니 일어나서는 안 된다.’ 하는 생각이 아닌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것은 절대 왕정에 있어서는 적신호이다. 교육의 방향을 바꾸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세스크다.
세스크는 대화를 바꾸었다.
“정찰은 어느 정도 보냈나?”
“예, 삼 개 조를 20키로 전방까지 수색하도록 하였습니다.”
아시아군의 최대 장점은 기동력이다. 치중과 공성 병기 없이 이동하는 아시아군은 적에 비해, 3배 이상 빠르게 이동이 가능하다.
이 말은 전력을 집중할 수 있고, 진군과 후퇴가 자유롭다는 말이다.
호난 영지의 영주성인 코아즈를 20키로 남긴 지점에서, 고든과 하인즈의 부대와 합류했다.
두 곳의 영지에서 보낸 지원 부대와 조우하여 섬멸하였다고 한다. 도망치는 병사는 무리하게 추적하지 않고, 포로는 모두 목을 베었다고 한다.
지금쯤이면 백작의 귀에도 우리의 진군 소식이 들어갔을 것이다.
세스크는 백작이 영격했으면 한다. 아무래도 공성전이라면, 엄폐물이 있는 수성측이 유리하다. 만일 영격을 나온다면 백전백승일 것이다.
엄폐물이 없는 평원에서는 궁기병이 위력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적군보다 월등한 사거리의 활과 기동력을 앞세운, 궁기병의 공격에 적은 지리멸렬할 것이다.
호난 영지를 돕기 위해 오는, 주변 영지의 지원병이 전부 도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시아의 병력이 일만이 넘는다.
전면전을 치러도 아시아가 승리할 것이다. 하지만 쉬운 길을 어렵게 갈 필요는 없는 법이다.
세스크는 병사를 아낄 필요가 있다. 정찰병들은 호난 영지의 백작군은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고 한다.
세스크는 한 번 도발을 해 보기로 했다. 일기토를 신청하면 백작은 응할 것이다. 백작은 자신이 패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군에 관한 정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곳에 자신을 상대로도 여기지 않는 괴물이, 둘이나 있다고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눈앞에 코아즈 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코아즈 성은 남부의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이니만큼, 수성을 위한 준비가 잘 갖추어진 성이다.
성벽을 둘러싼 넓고 깊은 해자와 높은 성벽, 10만 군사가 보급 없이, 일 년을 버틸 수 있는 식량이 비축되어 있다. 남부 제일의 군사적 요충지인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 다비드에게 말을 걸었다.
“다비드, 과연 대단하군! 저곳으로 지원군이 집결하면, 우리는 힘든 싸움을 하게 될 거야. 충분한 군세가 모이기전에 속전속결로 결판을 내야 할 텐데, 상대가 응하지 않으면 곤란해져.”
“그렇습니다. 마스터. 헤이트너 백작도 바보가 아닌 이상 부족한 군사로 밖으로 나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상대는 기사의 정점인 소드 마스터입니다. 우선 일기토로 적의 기사를 처리하다 보면, 백작은 호승심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백작이 나서면 그때 그를 사로잡거나 처리하면, 적은 내부에서부터 급속히 무너질 것입니다. 백작이 바로 일기토에 나서지는 않을 테니, 이삼 일 일기토를 해 가며, 블랙 나이트를 성안으로 잠입시켜 백작이 제압될 때, 내부의 지휘관을 척살하면, 커다란 피해 없이 코아즈를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자신만만한 다비드의 대답을 들으니 한결 기분이 나아진다. 결론은 ‘네가 나가서 백작을 잡으면 간단히 끝난다.’지만, 이렇게 풀어서 얘기를 하니, 무슨 대단한 작전인 것 같다. 이것도 능력이니까. 자신이 너무 부하들을 삐딱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우리 군에서 소령과 세스크를 제외하면, 가장 무력이 강한 사람이 고든이다. 고든이 노력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익스퍼트 최상급의 수준에 올랐다. 아마 쉽게 지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인재가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고든 남작! 자네가 일기토에 나서 주어야겠어.”
“충! 맡겨 주십시오. 목을 베어 돌아오겠습니다.”
고든은 가슴에 손을 대며 씩씩하게 말한다.
“헤이트너 백작이 나오거나, 위험하다 싶으면 즉시 후퇴하게. 자네를 여기서 잃을 수는 없지.”
“명심하겠습니다. 마스터.”
고든밖에 다른 대안이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괜히 소령이 야속하다.
일기토에서 한 명이라도 잃으면 세스크의 손해다.
세스크의 전략, 전술은 늘 한가지다. ‘이겨 놓고 싸운다.’
적이 일만이면 자신은 이만으로, 적이 익스퍼트 상급이면, 최상급으로 상대한다. 형세가 유리하면, 싸우고 불리하면 피한다.
이 원칙만 잘 지켜 나간다면, 백전불태 하리라 생각한다.
성문 앞, 1킬로미터의 지점에 진영을 꾸렸다. 목책을 설치하는 대신에, 요소요소에 ‘크레모아’를 설치했다. 마법사와 함께 다비드를 전령으로 보냈다. 백기를 들고 간, 다비드와 마법사는 성문 앞 200미터 지점에서 멈추었다.
마법사가 다비드에게 ‘샤우트’ 마법을 걸어 주었다.
“간악한 조세느 왕국의 주구들은 들어라. 우리는 카이쟈 공작가의 군대이다. 충성을 다한 카이자 공작님을 음해하여……유리아 공녀님과 함께 간악한 조세느……항복을 한다면, 목숨은 살려줄 것이나, 거스른다면 멸망을 면치 못하리라. 카이자 공작, 만세! 유리아 공주, 만세!!”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제 할 말을 다하고는, 미련 없이 돌아오는 다비드와 마법사였다. 명분이 부족한 우리군의 사기도 높일 겸, 상대방에게는 정면대결할 의지를 보이는 수작이었다.
그 사이 소리 없이 진영을 벗어나는 그림자가 있었다. 일천 명의 블랙 나이트였다. 저들은 이틀 후까지는 모두 성내에 침투하여, 헤이트너 백작이 쓰러지는 것을 기다릴 것이다.
이제부터 이틀의 시간을 벌며, 헤이트너 백작을 일기토에 끌어내기만 하면 성공이다. 헤이트너 백작군은 우리의 도발에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우리 군에 공성 병기가 없는 것을 아는, 그들로서는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차분히 준비하면서 지원군이 모이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고든이 말을 몰아 성으로 다가갔다.
“나는 블랙 나이트 1여단장인 고든이다. 누가 나를 상대할 용기가 있느냐? 기사의 명예를 걸고 나설 자는 있는가?”
저럴 때의 고든은 대장군감이다. ‘천의 얼굴의 고든 파이팅!’ 코아즈 성벽이 잠시 소란스러워지더니 성의 쪽문이 열린다. 풀 플레이트 메일 차림의 기사가 말을 달려 나왔다.
“건방진 놈! 내가 상대해 주마! 나는 블루썬더 기사단의 테일러다.”
거구의 사내가 바스타드 소드를 휘두르며, 고든에게 달려들었다.
왜? 처음에 강자가 나타나지 않는지! 세스크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너구리 고든은 어쨌든 익스퍼트 최상급의 강자이다. 상대방이 체격은 훨씬 좋았지만, 상대방은 중급 정도의 경지이니 승부가 되지 않는다.
서너 번 검을 마주 대더니 옆구리에 일 검을 허용한, 테일러라는 기사는 말에서 떨어진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고든이 달려들어, 일어서지 못하는 테일러의 목을 베었다.
“내가 블랙 나이트의 고든이다!”
“와! 와!”
덕분에 우리의 사기는 높아졌지만, 상대방의 경지도 몰라보고 저런 기사를 보내는 백작군의 행태를 알 수가 없다. 뭐라고 더 떠드는 고든을 불러들였다.
하루에 두 번만 기사전을 할 생각이다. 세스크는 연이어 상대를 할 생각이 없는 것이다. 기고만장한 얼굴로 고든이 돌아왔다.
“충! 명령을 완수했습니다.”
저 의기양양한 표정만 감추면 절도 있게 인사하는 고든은 기사의 표상 같다.
“수고했어. 고든 남작! 오후에도 부탁하네.”
“맡겨 주십시오. 마스터!”
오른손으로 가슴을 가볍게 치며 대답하는 고든. 헤이트너 백작 진영에서 또 다른 기사가 달려 나왔다. 무어라 떠드는 것을, 에스터 남작이 화살을 날려 쫓아 보냈다.
사람 사는 데는 다 똑 같다. ‘목마른 사람이 샘을 판다.’ 우리는 목이 마르지 않아 무시했다.
오후에 백작 진영에서 상대를 해 주던, 안 해 주던 별 상관없다. 우리의 사기는 높았고 이틀이라는 시간을 벌기만 하면 된다.
오후에도 고든이 나가 일기토를 걸었으나, 이번에는 저쪽에서 상대를 하지 않았다.
오늘 밤에는 불꽃놀이를 할 생각이다. 마법병단의 릴리아를 비롯한, 노처녀 군단이 자신들의 등장에 목말라 있는 듯 출전을 부탁했다.
백작 영지에 마법사가 있을 리 없고 있다 해도 마탑 소속이 아닌 저 서클의 마법사일 게 분명하다. 한밤중에 80명의 마법사가 성벽 위에, ‘파이어 볼’ 한 방씩 갈기고 돌아오기로 했다.
그 정도 소란을 일으키면, 블랙 나이트가 침투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스 마탑의 마법병단은 전원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빌 부인의 동기인 릴리아를 비롯한, 80명의 수다스러운 노처녀 군단이다.
마나의 맹세를 받을 때, 하루에 몇 마디 이상 하지 않겠다는 서약도 받을 걸 그랬다.
마법사들은 마나의 혜택을 받아서인지, 평범한 여성보다 젊고 피부도 좋아 미인이 많다.
세스크도 처음에는 친해지려 했지만, 곧 포기했다. 물론 대마도사에게 궁금한 것도 많을 것이다.
마법과 관계없는 유리아나 팽 소령, 시빌 부인과의 관계라든가, 심지어는 쌍둥이 자매와의 관계마저 추궁 받는 것은 사절이다.
특히, 많은 여성들에게 둘러싸여, 잠자리의 얘기를 질문 받을 때는 답이 없다. 이러한 80명의 노처녀 군단이 자신들의 등장을 강력히 주장하는데, 거절할 용기가 세스크는 없었다.
한밤중이 되었다. 80명의 마법병단이 50명의 블랙 나이트의 호위를 받아, 성벽으로 접근한다.
성벽 위의 병사들이 발견하고는 화살을 쏘았으나, 실드에 튕겨 버린다. 사정거리에 접근하자 준비된 사수 아니, 마법사부터 차례대로 성벽 위를 향해 마법을 난사한다.
“파이어 볼!…… 파이어 볼!”
“콰앙! 쾅!”
성벽 위는 혼란의 극을 달리고 있다. 마법사들과 호위하던 블랙 나이트는 미련 없이 되돌아왔다.
코아즈 성의 성벽은 군데군데 검게 그을려 있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아시아군은 북을 울리며 진영을 정비하고 있었다.
세스크는 소령과 산책을 하고 있다.
“소령, 음식은 입에 익었어?”
소령 역시, 세스크와 같은 이방인이기에, 음식으로 인해 고생이 많다.
세스크는 오랜 외국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하지만, 소령은 아닐 것이다. 특히, 소령은 매운 사천요리를 좋아했는데, 이곳의 향신료는 매운 맛을 내는 것이 거의 없다.
세스크도 한국인이다 보니 매운 맛을 좋아한다. 매운 맛보다는 빨간 색의 맛을 좋아한다.
김치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신김치에 돼지비계를 넣고, 파 송송, 두부 숭덩숭덩 넣고, 끓인 김치찌개는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다. 아!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도는 세스크다.
처음에는 만들까도 생각해 보았는데, 방법을 모르는 세스크는 제대로 만들어 낼 재주가 없다.
비슷하게라도 만들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일본에서 일본인이 만든 ‘기무치’의 고약한 맛을 아는 세스크는 엄두도 나지 않는다.
다행이 스테이크를 좋아하는 세스크는 덜하지만, 그래도 스테이크와 밥을 같이 먹고 싶다.
간장도 만들 줄 모르고 된장, 고추장 어느 것 하나 만들 줄 모르니, 이것도 문제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먹고 살 만하면 식도락을 즐기게 된다. 지금 세스크는 충분히 먹고 살 만한데, 식도락은커녕 먹고 싶은 것도 먹지 못한다.
왕이 되면 무얼 하고 황제가 되면 무얼 할까, 김치찌개도 못 먹는데. 현대에 살아가는 바쁜 사회인들이 들으면 거품을 물 걱정을, 세스크는 적의 군대를 앞에 두고 하고 있다.
오늘 소령에게는 일기토를 부탁하려 했다. 백작 진영에서 오늘 일기토에 응한다면 상대는 최소한 고든 수준은 될 것이다.
그를 꺾어야 헤이트너 백작이 등장할 것이다. 고든이 오늘의 일기토에서 지지만 않으면 되는데 믿음이 가지 않는다.
“오늘 만약에 고든이 불리하거나 질 것 같으면, 소령이 나서 줬으면 해. 소령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가 믿을 사람이 소령밖에 없잖아. 내가 나서면 수위 조절을 못하니 소령이 상대해서 간신히 이긴다는 느낌을 주었으면 해. 그래야 헤이트너가 나올 거야. 내 맘 알지?”
여자는 참 너그럽다. 언제나 속으면서 또 믿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