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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크 1권(23화)
9. 남부 침공(3)
오늘도 고든은 씩씩하게 나섰다.
“내가 고든이다. 나를 상대할 자는 없느냐!”
참 부끄러운 말을 잘도 한다. 하긴 그러니까 상대방이 열 받는지도 모르겠다. ‘격장지계’의 일인자라고 할 수 있겠다.
역시 고든이 뭐라 뭐라 알 필요도 없는 말을 몇 마디 하니, 쪽문이 열리고 플레이트 메일의 기사 한 분이 달려 나온다.
“이런 부끄러움도 모르는 놈! 나는 블루썬더 기사단장 월튼이다! 네놈의 주둥이를 부셔 주마!”
세스크도 바라는 바이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다. 얼핏 살펴보니 최상급의 기사이다. 고든에게는 어려운 상대가 될 것 같다. 하지만 고든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다.
너구리 고든은 불리하면, ‘삼십육계 주위상책’이라며 도망칠 것이다. 무섭게 현명한 놈이라고 생각한다.
고든과 월튼이라는 기사단장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싸우고 있다. 예상 밖에 고든이 선전을 펼치고 있었다.
고든은 이제 막 최상급에 올랐기에 상대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소령의 조언이 도움이 되었나 보다.
삼십 분 정도가 지난 것 같다. 체력이 많이 떨어진 것 같아, 북을 쳐서 불러들였다.
“충! 명령을 완수했습니다. 조금만 시간이 있었다면 목을 벨 수도 있었는데…….”
기사가 무식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완수는 완전히 수행했을 때 쓰는 말이다.
북소리가 들리자 꽁지가 빠져라 도망 쳐 온 놈이 써서는 안 되는 말이다.
“수고했네. 잠시 쉬었다가, 목을 베어 오도록 하게.”
“충!”
결국 그날은, 오후에도 고든과 월튼의 대결로 보냈다. 고든은 다행히 소령의 도움 없이 비등한 결투를 벌였다.
그날 밤, 다비드와 에스터를 불러 회의를 했다. 세스크가 헤이트너와 대결하여 제압한 다음, 여세를 몰아 성문에 큰 거 한 방을 신호로, 전군이 진격하기로 하였다.
공성 병기가 없고 전원이 기마병인 아시아는 마법병단의 도움을 받아, 성문으로 일제 돌격하기로 한 것이다.
날이 밝았다. 드디어 오늘 코아즈 성을 함락 시킬 것이다. 과연 코아즈 성을 함락 시키고 나면, 다이즈 공작은 어떻게 나올까?
호난 영지는 다이즈 공작뿐만 아니라, 조세느 왕국에게도 중요한 곳이다.
브레 왕국도 코아즈 성을 함락 시킬 때쯤이면, 이 소식을 알게 될 것이다. 후방이 불안한 조세느를 바라만 보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기회라고 생각하고 조세느에 대한 공세를 펼칠 것인가.
앞으로의 브레 왕국의 행보에, 아시아의 방향도 바뀔 것이라 신경이 쓰인다.
모두에게 고기와 빵을 넉넉하게 먹을 수 있게 했다. 오늘 저 빵과 고기가 마지막 식사가 되는 병사들도 있을 것이다.
식사 후에 고든이 어제와 마찬가지로 도발을 했다. 잠시 후, 월튼이라는 기사단장이 어제 못 가린 승부를 가리기 위해 마주 달려 나왔다.
고든은 월튼과 십여 합을 겨누다가 퇴각했다. 월튼은 어느 정도 쫓아오더니 멈추고 고든에게 외친다.
“기사의 명예도 모르는 비겁한 놈아! 오늘도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것이냐? 진정 나와 겨룰 용기가 없단 말이냐!”
도발을 하지만 고든은 조금의 동요도 없다.
고든은 기사다. 대 프라겔 공작가의 기사단의 떠오르는 별이며 기대주이다.
고든의 아버지도 기사였지만 평범하였다. 50명이 넘는 기사들 중의 한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고든은 그것이 불만이었다. 자신의 꿈이었고 영웅이었던 아버지가, 다른 사람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기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든에게 그 사실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때부터 고든은 노력했다. 열심히 노력했다. 자신은 아버지와 같은 평범한 기사가 되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
그 결과 공작가의 젊은 기사들 중에서는 적수가 없었다. 미래의 기사단장으로 낙점을 받았다. 고든은 승승장구했고 미래는 무지갯빛이었다.
그때 한 여인을 알게 되었다. 공작가와 마탑의 모종의 거래가 있었는데, 책임자와 함께 온 여자 마법사에게, 한눈에 반해 버린 것이다.
여인이 공작가에 머문 지도 세 달이 다 되어 간다. 마법사들은 돌아갈 차비를 했다. 짝사랑으로 가슴을 태우던 고든은 애가 탔다. 그래서 고든은 고백하려 했다.
마침, 수도로 돌아가는 마법사들의 호위 임무를 맡게 되었다. 지병으로 허약한 공작가의 셋째 아들이 합류하게 되었다.
마법사들과 셋째 공자를 수도로 호위해 갈 때, 고백했어야 했다. 여자에 대해 숙맥인 고든은 머뭇거리다 기회를 놓쳐 버렸다.
한 달의 여정으로 수도에 무사히 도착해 보니, 여자 마법사는 시빌 프라겔이 되어 있었다.
고든은 믿을 수 없었지만, 벌써 쌀이 익어 밥이 되어 버렸다.
고든은 세상이 멸망해 버린 것 같았다. 고든은 먼저 고백하지 못한 자신의 우유부단함을 한탄했다. 기사단장이고 명예고 다 부질 없었다.
자연히 수련도 등한시하게 되고, 기사단의 일도 시들해졌다.
공작이나 기사단장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고든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렇게 실의에 빠져 1년을 허송세월로 보냈다.
그때 마침, 바라크 제국에서 북부의 호랑이라고 소문 난, 알프레드 공작이 반란을 일으켰다. 수도로 진군하기 위해서는 프라겔 공작령을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프라겔 공작은 병력을 일으켜, 알프레드 공작과 맞서 싸우게 되었다. 기사인 고든이 참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든도 기사단에 끼어 참전하였다.
전쟁은 만반의 준비를 갖춘, 알프레드 공작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공작과 두 아들, 기사단장 등, 거의 모든 가신들이 목숨을 잃었다.
고든은 그때, 다른 기사 20여 명과 포로로 잡혔다. 다 함께 죽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알프레드 공작은 ‘브레 왕국’으로 독립했고, 고든과 이십 명의 포로 기사는 프라겔 공작의 셋째 아들이 몸값을 배상하여 석방되었다.
공작가로 돌아온 고든은 프라겔 공작가의 형편에 놀랐다. 공작의 셋째 아들마저 병으로 죽고, 공작가는 몰락 해 버렸다.
다행히 시빌 부인은 두 딸을 낳았지만, 딸에게는 공작가가 승계되지 않는다. 고든은 자괴심에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곧, 아름다운 시빌 부인과 두 딸은 자신이 지켜야 된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모든 것을 잊고 마탑으로 돌아가려는 시빌 부인을 설득했다. 프라겔 공작가를 일으켜야 한다고 설득했다. 자신이 돕고 이십 명의 기사가 따를 것이라 설득했다.
설득에 넘어간 시빌 부인과 두 딸을 데리고 노라 성으로 갔다. 노라 성에서의 10년은 고든에게는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비록 시빌 부인과 남녀의 사이로 지내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같은 공간, 같은 시간 속에서 호흡하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고든은 충분했다.
복수, 공작가의 부활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게 살다가 죽을 줄 알았다. 아니 그러고 싶었다. 두 딸이 15세가 되기 전까지는…….
망할 놈의 맨체스터 공작이 두 딸을 보고, 눈이 뒤집혀 검은 손을 뻗어 왔다. 그때부터 시빌 부인과 두 딸의 얼굴에는 검은 그림자가 가시지 않았다.
고든은 절망했다. 자신의 능력 없음을 한탄하며 지내던 중, 시빌 부인이 젊은 놈팡이를 만나더니 얼굴이 밝아졌다.
질투심이 불같이 솟아올랐다. 시빌 부인은 말한다. 그 젊은 놈이 자신들을 도울 수 있을 거라고 안심하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놈을 만나 보았다. 젊은 돈 많은 마법사 놈을…….
고든은 눈앞의 젊은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왠지 바람둥이처럼 보인다. 기분이 나쁜 고든은 자신도 모르게 기세를 끌어내 압박했다.
젊은 마법사 놈은 꿈적 않고, 도리어 자신을 쏘아보고 있다. 고든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 젊은 마법사 놈은 자신의 연적이기도 하지만, 지금의 상황을 헤쳐 나가려면, 이놈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시빌 부인과 두 따님을 도와주십시오.”
무릎을 꿇었다. 죽기보다 싫었지만, 명예나 자존심은 이 빌어먹을 상황을 타파하는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무릎 한 번 꿇고, 이놈이 감복해서 부인을 도와준다면, 몇 번이라도 꿇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놈이 과연 기사가 무릎을 굽히는 의미를 알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어차피 자신은 주군을 지키지도, 같이 죽지도 못한 순간부터, 기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 관계없다고 생각했다.
과연 통했는지, 이 젊은 놈이 당황하며 나를 만류한다. 고든은 자신의 의도가 먹혀들어 갔음을 알고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놈의 목표가 누구지? 엘레나와 세레나라면 기쁘게 도와 줄 수도 있는데……. 만일 시빌 부인이라면…….’
고든은 이놈의 취향을 알기 위해서라도, 같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젊은 마법사는 자신을 ‘세스크 칸 아시아’라고 했다. 고든은 그냥 돈 많은 젊은 놈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자신은 아시아라는 나라의 왕이고, 대륙을 정복할거라고 했다.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할까 봐 걱정되었는데, 다행히 그런 요구는 하지 않았다.
자신의 나라라고 섬으로 데려갔는데, 과연 섬에는 놈이 미칠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넓고 기름진 땅, 드래곤의 유물이라는 셀 수 없는 보화, 천상의 선녀 같은 아가씨를 노예로 가지고, 거기에 8서클의 대마도사라니!
‘마법사라는 놈이 무슨 대륙 정복이냐? 마탑이나 세우고 연구나 해라.’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나, 제가 하겠다는 걸, 힘없는 놈이 뭐라 할 처지도 아니어서, 입을 꾹 닫고 있는 고든이었다.
결국 고든은 이 미친 짓에 동참하게 되었다. 군대를 양성하는 곳으로 데려가기에, 기사들의 훈련을 맡기는 줄 알았다.
그곳에는 노예 출신이라는 500여 명의 어린 소년, 소녀들이 훈련을 하고 있었다. 고든과 20명의 기사들도 같은 훈련을 받으라는 것이다.
원래 마법사에 대해서는 구구한 말들이 많다. 어린 아이들을 연구 재료로 한다는 등, 마법에 미친 변태에 외골수라는 등의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다.
고든도 그러했으나, 시빌 부인을 알고부터 마법사에 대한 인식이 변했다. 그런데 저 젊은 놈의 행태를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못하겠다고 하려는데 시빌 부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부인은
‘고든, 나를 위해 그러지 말아요.’
라고 하는 것 같아 훈련을 받았다.
훈련의 내용은 더 가관이었다. 거의 모든 것이 암습, 기습, 도주 등의 기사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내용이었다.
시빌 부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훈련을 받아 가는 중, 고든은 깨달을 수 있었다. 이곳의 훈련은 고든의 적성에 딱 맞았던 것이다.
고든이 기사로서 수련하고 살아오는 동안에는 감추어져 있었던, 본성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뒤늦게 합류한 훈련임에도 불구하고, 고든은 두각을 나타내, 결국은 수석으로 수료할 수 있었다.
젊은 마법사도 자신을 인정하는 듯하고, 마법사와 시빌 부인과의 관계도 진전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고든은 방심하지 않았다. 아직은 저 마법사의 목표가, 시빌 부인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이르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 더 지켜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놈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놈이니까…….
‘블랙 나이트’와 ‘골든 나이트’라고, 이름을 붙인 단원들을 데리고 실전 훈련을 한다는 마법사의 말에, 고든은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 기회에 자신의 존재감을 어필하기로 했다. 기회는 뜻밖에도 빨리 찾아왔다.
‘블랙 애로우’라는 용병단을 만들어, 몬스터 토벌에 참여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브레 왕국의 거대 용병대인 ‘와이번 용병대’와 시비가 붙었다.
고든이 나서 자신의 친화력을 무기로 ‘와이번 용병대’의 대장과 부대장을 손에 넣어, 싸우지 않고 해결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젊은 마법사 놈은 내 능력을 시기하는 것 같았다. 참 쪼잔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하의 능력을 시기하다니……. 그런데 어째서 시빌 부인은 저런 놈을 신뢰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는 고든이었다.
고든이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찾아내어 발휘하기 시작하자, 정체되었던 검술에도 발전이 있었다. 소드익스퍼트 최상급의 경지를 밟게 되었던 것이다.
고든은 자신감이 생겼다. 그동안 길고 길었던 좌절과 인내의 세월을 보상받고 싶었다. 이제는 시빌 부인에게 당당히 고백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숨겨졌던 재능이 속삭였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저 젊은 놈에게 무언가 더 있을 거라고 속삭였다. 고든은 조금 더 기다리기로 하였다.
어느 날 젊은 놈이 또 여자를 데려왔다. 검은 머리에 이국적인 분위기의 여자였는데, 척 봐도 심상치 않은 사이라고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시빌 부인이 아니라 엘레나와 세레나가 목표라도, 참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느꼈다.
수련을 하는데 검은 머리 여자가 나타나서 상대가 되어 달라고 한다.
기가 막힌 고든은 화를 내려다가, 이 검은 머리의 여자에게 젊은 놈을 대신해 화풀이나 하려는 생각으로 승낙했다.
그날, 고든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았다. 눈으로 마음으로 몸으로…….
깨어난 고든은 인생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하늘이 야속했다. 왜 하늘은 한 놈에게 전부 밀어 주려는지 정말 야속했다.
고든은 결심했다. 하늘이 저 젊은 놈팡이에게 어디까지 밀어주나, 곁에서 끝까지 지켜보기고 결심했다. 그리고 저 바람둥이에게서, 시빌 부인과 쌍둥이 자매를 지키는 것이, 하늘이 자신에게 내려준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고든은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일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