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스토킹 마스터 1권(12화)
Part 6.변태 팰러딘(1)


“후루룩! 차 맛이 괜찮군요. 백발 갑옷 아저……. 아니, 다쓰……팜스……칼로프……마이엘……에트 스트라프 기사님은 차 끓이는 솜씨도 훌륭하시군요.”
차를 다 마신 나는 그의 이름을 적은 종이를 흘끔거려 가면서, 간신히 백발 갑옷의 이름을 다 중얼거리며 치사의 말을 건넸다.
그러자 백발 갑옷은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이름을 제대로 다 안 불렀다가는 모욕으로 간주하겠다며 당장에 투핸디드 소드로 두 쪽 낼 기세니 별수가 있어야지.
“후훗! 원래 전장에서 한바탕 피바람을 뒤집어쓴 다음에는 구수한 차 한 잔을 마셔야 하는 법이지. 그 처절하고 피비린내 자욱한 아수라 같은 전투의 참혹함도 조금은 씻겨지는 기분이 되니까.”
지그시 두 눈을 감으며 들이킨 찻물을 음미하는 그 모습은 무수한 전투와 전장을 경험한 관록있는 기사로 보였다.
차를 다 마신 나는 실내를 둘러보았다.
나무로 지은 간이 숙소였고 나무 침대가 다섯 개, 탁자 하나와 의자가 서너 개 있었다.
이곳은 딥 나잇 마켓을 경비하는 가드들의 경비 막사였다.
흥분해 날뛰는 란슬링을 잘 타이른 나는 (말로 안 되길래 숯덩이 메이스로 그 도마뱀 대가리를 서른 대쯤 두들겨 줘서 타일렀다) 잠깐 차나 한잔하자는 백발 갑옷의 권유를 받아들여 여기 들어온 거다.
내가 줘 패서 잠재운 란슬링은 저기 침대에 대충 던져 놓고 말이지.
근데 이 백발 갑옷, 어쩐지 아까부터 내 허리춤의 숯덩이…… 가 아니고 메이스를 흘끔거리는 꼴이 심상치가 않은데?
물론 병기점 주인의 탐욕 어린 눈초리와는 다르지만 매우 의미심장한 시선인 건 똑같으니 말이지.
나는 슬쩍 그에게 말을 건넸다.
“저기 백발 갑옷, 아니지. 다쓰…… 아니…… 거 뭐였더라. 좌우간, 이보세요. 이 메이스 팔 거 아니니까 그렇게 눈독 들이셔도 소용없거든요. 날 이곳에 초대한 이유가 이 메이스가 탐나기 때문이라면 미안하게 되었습니다만.”
“으응? 내가 그 메이스를 탐내다니 무슨 소린가? 단지 그 스토커의 메이스의 옛 주인이 생각나 감회가 일어서 그런 것이네.”
“아니, 이 메이스를 사용했던 사람을 아신단 말입니까?”
나는 놀라서 목소리를 높였다. 스토커의 메이스라는 정식 명칭까지 알고 있다니!
백발 갑옷은 과거를 회고하는 투로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육십 년 전이었지. 그 메이스의 주인은 주신 이르하임을 섬기는 팰러딘 중 한 사람인 젤라즈니였네. 그 놀라운 무술 실력은 팰러딘 중에서도 최고라고 할 만했지. 그는 한편으론 스토커라는 직업도 가지고 있었다고 하네. 어쨌건 그는 대륙을 누비면서 수많은 몬스터와 마족을 물리치는 전설을 남겼다네. 그리고 위험에 처한 많은 인명을 구했지. 사실은 우리 가족도 그분에게 목숨을 구원받았고 말이지.”
“그게 정말입니까?”
“오지에 이주한 정착민들의 부락을 약 천 마리에 달하는 오우거들이 습격한 일이 있었지. 우리 아버지가 정착민들의 우두머리여서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전멸 위기에 몰렸다네. 근데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젤라즈니가 나타나 빗자루로 먼지 쓸 듯 오우거 떼를 쓸어버리고 정착민들을 구한 거지.”
“근데 육십 년 전 일이라면서 잘도 기억하시네요. 하긴 그때라면 다쓰…… 거…… 에 그러니까 어르신께서는 예닐곱 살쯤 되었겠군요. 올해로 60대 중반이라고 쳐도 말이죠. 보기보단 연세가 더 많으시군요.”
감탄 섞인 나의 말에 백발 갑옷은 얘가 무슨 야밤에 자다 말고 일어나서 삽질하는 소린가 라는 눈길을 던졌다.
“무슨 소리야? 난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내가 태어난 건 그때부터 수십 년은 더 지나서라네.”
“그, 그래요? 보기보다 연세가 적으신가 보네요? 아까는 전장에서 피바람을 뒤집어쓴 다음에는 차를 마셔 줘야 제맛이니 하셔서 엄청 전투 경험이 많은 백전노장으로 알았습니다만.”
“아, 그건 전장을 누비고 다닌 사람들이 하는 거 보고 따라서 해 보는 거야. 왠지 근사해 보이더라고. 내 진짜 나이가 궁금한가? 그럼 말해 주지. 올해로 스물하나야.”
“…….”
난 어이가 없어 마시던 찻물을 한참이나 머금고 있다가 무려 20분이나 지나서야 삼킨 다음, 그를 야려 보았다.
“백발…… 아니, 다쓰…… 아니, 그…… 저…… 그러니까 그쪽 연세가 어떻게 되신다구요?”
“허! 이 사람 참. 어이가 없구만.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귀가 먹었나? 스물하나라고 말하는데 뭘 자꾸 귀찮게 캐묻고 자빠졌나?”
“…….”
나는 하도 기가 차서 잡아먹을 듯 째려보았다.
온통 백발인 머리에 수염이라 아무리 낮게 잡아도 쉰살은 될 거라 생각했는데 스물한 살이라고?
그럼 나보다 세 살이나 더 적잖아! 근데 왜 머리가 백발이고 턱수염도 새하얀 건데?
그리고 왜 환갑 지난 노인네 말투고 나한테 말하는 꼴이 초딩들 대하는 교장 선생님 같은 거냐고. 고작 스물한살 먹은 놈이 연상인 나한테 말끝마다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어쩌구 하면서 말이다.
아무리 유저가 아니고 NPC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경우가 없지 않냐고.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이 인간에게 반말 까기도 그랬다. 아직은 내가 불리한 입장이라서 말이지.
수틀리면 아까 란슬링이 한 일을 들먹이며 체포하겠다고 할지도 모르니까.
나는 속으로 치솟는 울화를 참으며 지그시 그를 노려보았다.
“근데 말씀입니다. 혹시 내 나이가 얼만지 안 물어보세요?”
“안 물어볼 건데?”
“왜 안 물어보는데요? 피차 서로의 나이에 걸맞는 대화를 나누는 게 좋지 않을까요?”
“허허허허허. 도대체 그걸 왜 물어봐야 하는 건데? 자네도 참 재미있구만. 뜬금없이 정색하면서 황당한 질문이나 해 대고. 저 리자드맨도 그렇지만 자네도 과히 정상은 아닌가 보이. 허허허허허허!”
아니, 근데 이 인간이!
피차 서로의 연령을 확인하고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대화를 하자는 제의를 이렇게 간단히 씹다니!
그것도 계속 초딩을 대하는 교장 선생님 말투로 말이다. 나보다 세 살이나 더 어린 게!
나는 은근히 열이 뻗쳤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핏대 올려 봐야 더 좋을 것도 없었다. 그저 내가 필요한 거나 빨리 알아내는 게 장땡이다.
“그건 그렇고 이 메이스가 정말로 그 젤라즈니가 쓰던 거라면 대단한 건가 보네요?”
“물론이지. 한번 휘두를 때마다 화염이 빛살처럼 뿜어지며 오우거 떼를 썩은 짚단처럼 쓰러뜨렸으니까. 오우거 한 마리 잡는데도 목숨 걸어야 할 판에 그 정도 위력이었다면 젤라즈니의 무공이 뛰어났던 걸 감안해도, 그 메이스가 그만큼 대단한 물건이라는 말이겠지. 허허허허허.”
“후후후, 그런가요? 아주 재밌네요. 그때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면서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아주 능청스럽고 뻔뻔스럽게 잘도 주절거리시네요?”
내가 은근슬쩍 비꼬았으나 백발 갑옷은 피식 가소롭다는 듯 받아쳤다.
“허허허. 우리 아버님께 이야기를 들은 거지. 꼭 직접 눈으로 봐야 이야기할 수 있으며, 그러지 않으면 법에 저촉이 된다고 누가 말하기라도 했나? 가만 보니 아주 별꼴이로구만. 허허허허!”
“하하, 그런가요? 빠드득! 말씀도 참 재밌게 하시네. 근데 이 메이스가 정말 젤라즈니가 쓰던 메이스라는 건 못 믿겠는데요? 그걸 무슨 수로 증명을 하겠습니까, 전혀 증명할 방법이 없잖아요? 그냥 그쪽에서 지어낸 이야기죠? 사실은 구라죠, 그렇죠?”
내가 유들유들 비아냥대며 말하자 백발 갑옷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드러났다.
자신이 진지하게 들려준 이야기가 뻥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누구라도 화가 나는 게 정상이겠지.
“허허, 그것참. 나이도 어린 사람이 꼴같잖게 의심만 많군. 그럼 내가 증명을 해 주지. 나의 감정 기술로 말이지!”
으응? 감정 스킬이 있다고?
이거 잘되었군.
그렇지 않아도 확실히 속성이 파악되지 않은 무기라 감정을 받고 싶었지만 그 비용이 비싸서 못하던 참이었으니까.
감정 비용은 대개 20에서 50골드는 줘야 되거든. 만약 감정을 받아서 확인한 무기나 아이템이 10골드도 안 되는 허접한 거라면 어처구니없이 돈만 날리는 셈이니까.
물론 드워프 고든이 이 메이스가 레드 드래곤의 숨결로 만들어졌다고 했지만 그건 이 메이스의 재료를 말해 준 것일 뿐이다. 이 메이스에 얽힌 내력과 사연, 여기에 깃든 마법이 어떤 것인지를 자세히 알아보려면 감정 스킬이 있는 인물의 감정은 필수였다.
나의 도발에 열 받은 백발 갑옷은 메이스에 한 손을 올리더니 낭랑하게 한마디를 외쳤다.
“아이덴티파이!”
파앗!
부싯돌 켜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숯덩이 메이스가 오렌지색으로 잠깐 빛났다.
그리고 설명 창이 떠올랐다.

- 스토커의 메이스 (일명 젤라즈니의 메이스) -
분류 : 무기
등급 : 전설
공격력 : 500
내구력 : 50/300
필살기 :
1. 오우거 거시기 할퀴기
2. 파이어 엘레멘탈의 분노
3.레드 드래곤의 달콤한 입맞춤
각기 3, 5, 7서클 마법사의 파이어볼과 유사한 위력의 이 화염 공격을 2분간 구사할 수 있다. 재사용하려면 일정 시간이 필요하다.
가격 : 1,500골드

주신 이르하임의 충직한 종, 젤라즈니가 사용하면서 젤라즈니의 메이스라고도 불리운다. 이 메이스는 레드 드래곤의 숨결로 만들어졌으며 주신 이르하임이 직접 마법 속성을 부여해서 젤라즈니에게 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젤라즈니는 평생 이 메이스 하나만을 무기로 사용했다고 한다.

커억!
이거 말이 안 나올 지경이네!
이게 전설급 아이템이었다니!
공격력 500이면 감정 안 하고 봤던 상태의 10배인데.
게다가 3, 5, 7서클 마법사가 구사하는 위력의 파이어볼을 2분간 무차별로 난사할 수 있다고?
허거거거걱! 이건 정말 놀랄 노짜다.
1서클 마법사와 7서클 마법사의 파이어볼이라면 하늘과 땅 만큼의 위력 차이가 있으니까.
아니, 공격력 500이면 굳이 이 무지막지한 파이어볼 안 쓰고, 그냥 휘둘러 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남을지도 모른다.
음, 이 막강한 공격력에 무지막지한 화염 공격까지 쓸 수 있는 메이스라니 이거 정말 엄청나네.
그리고 가격이 1,500골드면 이거 다른 유저에게 팔아도 최소 1,500만 원은 너끈히 번단 소리인데…….
물론 이 게임을 하는데 최고로 중요한 아이템이니 진짜 팔 수는 없는 거지만.
하긴 젤라즈니가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었다면 그의 독문병기인 이 메이스의 가치가 그렇게 큰 것도 놀랄 일은 아니겠지.
근데 내구력이 저렇게 낮은 상태인 거 보면 상당히 심하게 망가진 게 틀림없는 거 같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케파추아라의 눈물을 구해서 제대로 고쳐야지.
이런 엄청난 보물을 계속 숯덩이 상태로 둘 순 없으니까.
근데 조 부장은 어째서 이렇게 엄청난 아이템을 나한테 준 거지? 설마 알고서 주었을 리는 없고, 분명히 평범한 매직 아이템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준 걸 테지.
어쨌거나 대박이다!
크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흣!
나는 귀밑까지 벌어지려는 입을 오므리면서 백발 갑옷에게 치하의 말을 했다.
“하하, 정말이네요. 팰러딘 젤라즈니의 메이스가 분명하군요.”
“훗, 그럼 내가 거짓말하는 줄 알았나? 사람이 고따위로 의심이 많아서야 쓰겠나? 어쨌거나 이제 슬슬 나가봐야겠으니 저기 자빠져 자는 리자드맨을 깨우게나.”
“그렇게 하죠. 야! 란슬링! 얼렁 일어나라! 두 시간쯤 지난 것 같은데 아직까지 처자빠져 자고 있으면 어쩌냐!”
“으으……. 우영, 네가 날 재운 거냐. 쉬익! 근데 왜 이렇게 뒤통수가 땡기냐. 쉬익!”
내가 정겹게 발로 마구 밟아서 깨우자 란슬링은 뒷골을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뒤통수가 아픈 게 당연하지, 내가 머리통을 숯덩이, 아니 젤라즈니의 메이스로 마구 두들겨 패서 재웠으니까.
짜식, 그러게 하프 오우거 목에서 칼 떼고 떨어지라고 할 때 순순히 말을 들을 것이지.
란슬링을 일으켜서 막사 문을 나서려는 순간, 백발 갑옷도 투핸디드 소드를 허리에 차고 투구까지 갖춰 쓰고 우릴 따라나서려 했다.
“다시 순찰을 돌 시간인가 보죠?”
“아닌데?”
“아니면 복장은 왜 다시 갖추는 건데요?”
“아, 그거? 별거 아냐. 이곳 딥 나잇 마켓의 가드장 자리를 그만두고 자네를 따라다니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