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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킹 마스터 4권(77화)
Part 1. 엘프 마을(2)


“…….”
나는 어이가 없어 다시 한 번 벙 쪘다.
물론 나 말고 세영이를 비롯한 우리 파티원들도 몽땅 다.
어이가 없는지 란슬링이 혀를 날름거렸다.
“쉬익! 아니, 고작 그 일로…….”
“고작 그 일이라고? 그게 정상적인 아이스케키였다면 내 딸은 몸져눕지 않았을 거고, 나도 그렇게 죽도록 패 주지 않았을 걸세.”
촌장이 이를 아드득 물며 말했다.
쩝! 이 노친네가 이제서야 자신이 애한테 지독한 매질을 했음을 인정하는구먼.
근데 정상적인 아이스케키가 아니었단 건 또 뭐야? 아이스케키에도 정상과 비정상이 있었나?
“그때 딸은 마을 젊은이들의 무도회장에 있었고 마침 속옷을 안 입은 상태였다네. 장마 때문에 속옷이 모조리 젖어서 말려야 했거든.”
“저……. 그러니까 속옷을 안 입은 상태란 말은 설마 노팬티…….”
“허엄! 험! 험!”
내가 조심스레 물어보자 촌장은 두 눈을 부라리며 날 째려보았다.
생각만 해도 망신스러운가 보구먼.
“자네도 생각을 좀 해 보게. 자기 약혼자를 포함해서 마을 청년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아이스케키를 당하면서 아랫도리를 홀라당 보인 내 딸이 어떤 꼴이 되었겠냔 걸세!”
쩝…….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평생 잊지 못할 개망신을 당한 꼴이 되었겠지.
여자로서 당할 수 있는 개망신 중에서 아마 워스트 3위 안에는 충분히 들고도 남겠군.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재경이 놈이 그 엘프 아가씨가 노팬티란 걸 알고서 한 일도 아닐 텐데, 그 일로 저 나무 몽둥이로 이백 대씩이나 매질을 하면 되겠냐고.
좀 짜증이 났지만 그렇다고 그걸 내색할 순 없다.
“근데 따님의 약혼자란 사람은 누굽니까?”
난 코란이 촌장 딸의 약혼자가 아닌가 짐작했지만 모르는 척 슬쩍 물어보았다.
“코란이라네.”
으음……. 역시 그랬군. 어째 얼굴이 벌게져선 절대 말 못 한다며 설치는 걸 보니 그럴 거 같더라.
“휴우…….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맨엉덩이를 다 보였으니 창피해서 목 매달고 죽어 버리겠다고 울고불고 난리 치는 딸을 달래느라고 사흘 밤을 한잠도 못 잤다네.”
“음……. 그래서 촌장 어르신께선 우리에게 전나세 처단을 의뢰하고 싶으신 겁니까?”
난 내심 기대를 하며 촌장에게 물었다.
그럼 대가로 암흑제국으로 가는 길을 안내받는 퀘스트를 발동시킬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촌장은 만만치 않았다.
“교황청과 엘카니아 왕국에서 이미 전나세를 해치우라고 의뢰했다며? 그럼 난 손 안 대고 코 풀 수 있는데 그런 부탁을 자네들한테 뭐하러 하나?”
젠장!
“그런가요? 그럼 우리한테 부탁하실 일 같은 건 없으신 겁니까? 아까 우리한테 협조를 요청할 게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요.”
속으로는 초조했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면서 내가 물었다.
“뭐 협조를 요청한다기 보다도…….”
촌장도 별로 아쉬울 거 없다는 듯 폼을 잡으려고 했다.
이때는 먼저 초조한 빛을 보이는 쪽이 지는 거다.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서는 시늉을 했다.
“뭐 우리가 필요 없으시면 그럼 가 보면 되겠네요. 얘들아 일어서자. 차는 잘 마셨습니다, 촌장님!”
“허어, 잠깐만 앉아. 뭐 이리 성질들이 급한 겐가!”
당황한 촌장이 만류하자 우리는 못 이기는 척 도로 앉았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빨랑하세요. 우리도 바쁜 몸이라서요.”
“흠흠……. 사실은 말이야. 이 일대에 벌채꾼들이 나타나서 우리의 생명과도 같은 나무를 마구 베어 넘기고 있다네. 우리 엘프들로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라서…….”
벌채꾼? 오호라, 그래서 우리가 이곳에 들어오자 벌채꾼 아니냐면서 대뜸 체포한 게 그래서였군.
“그럼 점잖게 타일러서 나무를 베지 말라고 하심 되죠?”
“아, 이 사람아! 그래서 들을 거 같으면 내가 뭐하러 자네들한테 이 이야기를 꺼내겠나! 나무를 베는 건 우리 엘프에게 있어서는 살을 베는 것과 똑같네. 생명을 위협받는 것과 진배없다 이 말이라고.”
“아, 그럼 활하고 창을 가지고 벌채꾼들하고 한판 붙으시면 될 거 아닙니까?”
내 말에 촌장은 한숨을 크게 쉬더니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벌채꾼들은 엘프들의 마을 내부로는 안 들어온 댄다. 철저하게 마을 경계선은 침범하지 않으면서 나무를 베어 가고 있다고 했다.
게다가 벌채꾼들의 소속이 가뎀 왕국에 소속된 거대 상단이라고 했다.
그 말인즉슨 엘프들이 섣불리 이들을 건드렸다간 막대한 자본과 병력을 지닌 거대 상단과 직접 맞짱 뜨게 될지도 모른단 이야기였다.
물론 엘프 마을에선 이미 몇 번이나 정중하게 벌채 작업 중단을 요청했지만 그쪽에선 들은 체 만 체라는 거다.
“그러니까 그 말인즉슨……. 우리가 촌장님의 부탁을 받았다는 건 절대로 드러내지 말고……. 우리 파티가 산적단인 척하고 그 벌채꾼들을 기습해서 모조리 다 해치워 줬으면 좋겠다. 누가 한 짓인지 전혀 증거를 남기지 않고……. 증거를 남기면 그 거대 상단의 보복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뭐 그런 말씀인가요?”
“그 이야긴 자네 입에서 나온 소리지 내가 한 건 아니란 점을 분명히 말하고 싶군그래.”
젠장! 이 엘프 할배 퍽이나 교활하군.
좌우간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퀘스트 창이 떴다.

- 벌채꾼들을 제거하라!-
엘프 마을의 촌장은 나무를 베어 없애는 벌채꾼들의 활동을 완전히 근절해 줄 것을 요구했다.
벌채꾼들을 다굴해서 모조리 땅속에 파묻든, 강에 빠뜨려서 없애든 그건 알아서 해라.

기한 : 3일
보상 1 : 암흑제국으로 가는 길을 안내받는다.
보상 2 : 촌장 딸과의 매우 우호적인 관계 형성.
제한 : 엘프 마을 촌장의 의뢰로 하는 일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퀘스트는 실패다.
퀘스트 등급 : 3급

으음, 이거 미묘하군.
보상 1이야 당연한 거지만 보상 2는 뭐야? 촌장 딸과의 매우 우호적인 관계가 형성된다고?
남녀가 매우 우호적인 관계가 되는 건 대충 뭔 소린지 알겠다만 그게 어떻게 보상씩이나 되는 거냐고.
“촌장님.”
“응?”
“그럼 촌장님의 지시로 벌채꾼들을 몰살시키러 떠나기 전에 따님을 잠시 뵙고 가도 될까요?”
“아, 이 사람 참! 내가 시키는 게 절대로 아니라니깐, 무슨 소릴 하고 그러나. 지금부터 벌채꾼들한테 벌어질 일에 대해선 난 아무것도 못 보고 못 들었고 말하지도 않았어. 그걸 분명히 하고 싶구먼. 그리고 내 딸을 문병하려면 그렇게 해.”
젠장! 능구렁이 같은 영감.
철저하게 남의 손으로 코푸는 게 생활 습관이 된 노인네로구먼.
좌우간 나는 옆 방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
오옷! 이럴 수가 있나.
저 상아 같은 피부와 윤기 흐르는 머릿결에 에머랄드처럼 빛나는 눈동자라니.
게다가 상심해서 앓아누운 주제에 몸매는 왜 이다지도 탱탱한 거지? 가만 보니 셀라인 공주를 능가하는 글래머네?
다른 점이라면 셀라인 공주는 들어갈 곳은 적당히 들어가고 나올 곳은 거침없이 나왔는데, 이 엘프 아가씨는 들어갈 곳도 팍팍 들어가서 훨씬 더 뇌살적이라는 거다.
특히 가슴이 엄청 크다!
어째서 저 엘프녀하고 좋은 사이가 되는 게 보상이 되는지 알겠군. 후후후훗!
근데 내가 좋아하는 걸 지켜보던 세영이의 눈초리가 치켜 올라갔다.
“옵빠! 저 엘프 아가씨 가슴과 히프에 구멍 뚫릴까 겁나니 그만 보고 좀 나와욧!”
“아니, 너 왜 도끼눈을 하고 그러냐, 무섭게……. 알았다. 나갈 테니까 눈 좀 그만 부라리렴.”
내가 엉거주춤 나오려는데 엘프녀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음, 깨어 있었구먼.
“전 에이프릴이라고 해요. 죄송하지만 우리 아버지와 나누신 말씀은 모두 들었어요. 꼭 성공하시고 돌아오길 빌게요. 그럼…….”
두 볼을 발그레 붉히며 인사를 하는 엘프녀에게 나도 모르게 마주 미소를 짓다가 세영이한테 옆구리를 꼬집힌 채 방에서 끌려 나와야 했다.
근데 세영이 녀석은 아직 모르겠지.
후후후훗! 퀘스트 성공한 뒤가 왜 이다지도 기다려지는 거냐!

“바로 저곳입니다.”
코란은 산 저 아래쪽의 계곡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무리들을 가리켰다.
목책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벌채한 나무들이 바쁘게 운반되고 있었고, 그걸 다듬는 인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쉬익! 근데 인부들이 인간이 아니잖냐. 쉬익!”
“그러네. 오크에 오우거에 놀까지 다양하네.”
란슬링과 케브라의 말에 코란이 설명을 해 주었다.
“하지만 저들을 총지휘하는 자는 인간입니다. 어떤 상단인진 몰라도 힘 좋은 몬스터들을 이용하면 더 많은 나무를 벨 수 있다는 계산일 겁니다. 에잇! 쳐 죽일 놈의 인간 녀석들!”
“…….”
아니, 근데 이 떡대 엘프 녀석이 말을 맺으면서 슬그머니 나를 야리네?
그러고 보니 아까 촌장 딸내미 방에 들어갔다 나올 때 이 떡대가 아주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게 기억났다.
오우거 못지않은 체격을 해 갖고서는 쪼잔하게 질투를 하고 있는 게 틀림없군.
그리고 인간이라면 무조건 적대시하고 보겠다는 단순 무식한 타입의 엘프임이 분명하다.
나는 슬며시 질문을 던졌다.
“근데 코란 님은 우릴 도와서 함께 싸우지 않으실 겁니까?”
“물론 함께 싸우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습니다. 그러나 촌장님의 말씀처럼 우리 엘프들이 개입된 걸 들키지 않아야 하니, 유감스럽게도 여러분의 영웅적인 거사를 구경만 해야 할 것 같군요. 정말 아쉽습니다.”
젠장! 영웅적인 거사는 무슨 얼어 죽을.
그냥 눈에 가시 같은 내가 벌채꾼들과 싸우다가 다치거나 죽으면 장땡이고, 성공하면 벌채꾼들 모두 제거되는 거고, 어느 쪽이든 손해 볼 거 없단 생각이겠지.
“그럼 우리가 벌채꾼들하고 싸우는 데 있어 코란 님이 도움을 주실 일은 전혀 없단 이야기네요.”
내가 삐딱하게 묻자 코란은 당황스러워했다.
“뭐 굳이 말하자면 그렇군요.”
“그럼 좀 사라져 주시겠습니까? 우리 파티는 징크스가 하나 있는데 누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싸우는 데 힘이 제대로 안 나오거든요.”
“아니, 우영 형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언제부터 그런 징크스가 생겼습니까?”
퍼퍼퍽!
“우욱! 맞습니다. 갑자기 생각났는데 그게 우리 파티의 전통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쓰 녀석이 눈치 없이 끼어들다 내 메이스에 쥐어 터지고서야 말을 맞췄다.
짜식이 도움은 안되는 주제에 꼭 내 말에 초를 친다니깐.
내 서슬에 놀란 코란은 마지못해서 말했다.
“알겠습니다. 뭐 제가 보고 있는 게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죠.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