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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킹 마스터 5권(118화)
Part 8. 불륜의 증거(2)
햇살에 무지개를 그리며 흩어지는 물방울들. 비기닝 시티의 분수대는 언제 봐도 아름답다.
니녹스 산맥을 떠난 우리는 피그몽들하고 헤어져서 비기닝 시티로 왔다.
피그몽들은 그냥 내 저택에 가서 햄하고 베이컨이나 먹으면서 힘이나 비축하고 있으라고 했다.
걔들은 이런 데 데리고 와 봐야 별로 좋을 게 없어서 말이지.
무식하고 힘만 센 돼지 대가리들을 삼백 마리씩이나 끌고 다녀 보라고.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겠냔 거다.
근데 비기닝 시티엔 뭐하러 왔냐고?
미라쥬 길드원들은 로그아웃당했다가 다시 들어 올 때 미라쥬 길드로 오게 되어 있어서 말이지.
다시 빠르게 주워 모으려면 이리 올 수밖에 없단 거지.
주워 모은다는 표현이 좀 그렇긴 하다만…….
근데 미라쥬 길드로 갈려니 좀 찝찝하긴 하다. 이사도라를 다시 보는 것 때문에 말이지.
근데 설마 이 정도 시간이 흘렀으면 아직도 내가 지가 낳은 아이의 아빠란 망상은 안 하겠지.
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얼마 안 남은 부대원들을 데리고 미라쥬 길드로 향했다.
터덜터덜 상거지에 패잔병 꼴인 우리들이 걸어가자 비기닝 시티의 시민들은 미간을 찌푸리며 피하기에 바빴다.
우리 몸에서 냄새가 나는지 어떤 사람은 코를 움켜쥐고 오만상을 쓰는 사람도 있었다.
아, 젠장! 눈물이 다 나는군.
내가 어쩌다 이 꼴이 되었는지…….
오, 드디어 보인다. 미라쥬 길드가 말이지.
음, 문지기 녀석도 아직 그대로 있군. 근데 저 자식은 승진도 못 하는지 허구한 날 문이나 지키고 있네.
응? 아니, 근데 너 왜 날 처음 보는 것처럼 그렇게 째리는 거냐?
“저…… 대단히 미안한데 적선할 돈 없거든요? 그리니 가족들 데리고 좀 꺼져 주세요.”
“…….”
젠장 맥 빠지네.
아무리 지금 우리 꼴이 처참해도 그렇지. 아예 대놓고 거지 취급을 하냐?
난 대꾸하기도 싫어서 뒤에 서 있던 간부1한테 턱짓을 했다.
그러자 간부1은 앞으로 나서서 문지기 녀석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퍼억!
“헉! 아니 거지 주제에 감히 대 미라쥬 길드의 수문장 나리 뒤통수를 후려쳐! 너 죽었다!”
“까불지 말고 빨랑 튀어 들어가서 이사도라 님한테 보고나 드려라…….”
간부1도 짜증 나는 티를 마구 드러내며 말했다.
그제야 우리가 누군지 알아챈 문지기 녀석은 허리를 숙이며 사죄한 뒤에 안으로 튀어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뒤에 이사도라가 헐레벌떡 튀어 나왔다.
“어머, 이게 누구야! 우영!!”
“이사도라, 잘 있었냐?”
“아니, 이게 뭐야? 누가 당신을 이렇게 한 거야!!”
이사도라는 내 손을 붙잡고 눈물을 글썽였다.
진정으로 날 걱정하는 모습이다. 가슴이 찡하구먼.
“후훗, 그럴 일이 좀 있었다. 그리고 빌려 준 니 부하들을 잃어서 미안하다. 아마 지금쯤 다시 살아나긴 했겠지만.”
“신경 쓰지 마. 지금 그런 게 대수야. 어쨌든 빨리 안으로 들어와서 좀 쉬어!”
이사도라는 내 손을 잡아끌며 안으로 향했다.
아아, 이 느낌은 무엇인가?
이 안온하고 포근한 느낌이라는 것은. 그런데 뒤통수가 따가운 게 누군가 째려보는 기분이군. 누군지는 뻔히 짐작이 간다만.
“도대체 왜 이곳에 왔어요! 오빠는 그냥 영지의 저택에 가 있으면 되잖아요. 여기는 내가 맡으면 되고.”
이사도라의 배려로 널찍한 방에서 욕조에 몸을 담그고 기분 좋게 피로를 푸는 데 세영이가 들어와서 하는 말이었다.
얘는 갈수록 부끄러움이 없어지는구먼. 내가 벗고 욕조에 들어가 있는데도 마구 들어오다니.
“세영아 니가 혼자 여기 오면 퍽이나 이사도라하고 대화가 잘 되겠구나. 눈빛만 부딪혀도 으르렁대는 주제에.”
“…….”
내 말에 세영이는 입을 다물었으나 그래도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다.
나를 반기는 이사도라의 태도가 은근히 불안했던 것 같다.
“너 말야. 자꾸 나하고 이사도라하고 사이를 이상하게 보면 못쓴다. 난 잃어버린 병력들의 보충이 되는 대로 여기 떠나면 그뿐이거든? 니가 자꾸 색안경을 쓰고 보니까 이사도라도 불편해 하는 거 같은데 그러지 좀 마라.”
“흥, 누가 불편해 해요? 그 여우가요? 웃기지 마요. 우영 오빠를 보고 꼬리를 마구 흔들어 대는 꼴이 눈뜨고 못 봐줄 지경인데.”
“…….”
아, 젠장! 근데 세영이 이 자식은 내가 그렇게 말해도 질투에 눈이 멀어서 이러는군.
더 말하기도 귀찮다.
난 세영이를 내보낸 다음, 욕조에서 나왔다.
그리고 이사도라가 준비해 놓은 새 옷으로 갈아입고 잠시 눈을 붙인 다음 이사도라의 집무실로 갔다.
“우영!”
허걱!
말끔히 목욕하고 새 옷으로 단장한 나를 본 이사도라는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허억!
아니, 이 유부녀가 어쩌자고 갑자기 내 품에 안기는 거냐. 이러다가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흥, 누가 왔나 했더니 꿈에도 그리던 바로 그 불륜 상대였군.”
허거거거걱!
어느새 나타났는지 로저가 우릴 바라보며 저주처럼 중얼거렸다.
퀭한 눈동자에 좀비처럼 앙상해진 몸매.
이건 어느 모로 보나 예전의 그 성성이를 방불케 하던 로저가 아니다.
삭아도 이렇게 삭을 수가 있단 말인가?
가만 보니 손에 술병까지 들고 있다.
아내의 불륜과 자기 아들의 진짜 아버지가 자신이 아닐지 모른다는 괴로움에 시달리다가 저런 꼴이 된 게 틀림없다.
이거 이러다가는 진짜 로저한테 칼침 맞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든 나는 다급히 이사도라를 나한테서 떼어 내고 로저한테 인사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오랜만에 뵙네요. 근데 뭔가 오해하시나 본데 우린 절대로 그런 사이 아니거든요? 제발 오해는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흥!”
내 말에 아랑곳없이 로저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다리를 끌고 방을 나갔다.
나는 책망하는 눈으로 이사도라를 바라보았다.
“너 도대체 왜 이러는 거냐?”
“내가 뭘?”
“니 남편 보는 데서 날 끌어안고 난리 떨면 어쩌자는 거냐고? 너, 내가 로저한테 칼침 맞고 죽게 할려고 그러냐? 그게 아니라면 이렇겐 못 할 거다.”
내 말에 이사도라는 눈을 치켜떴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도대체 자긴 왜 나하고 자기 사이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하는 건데? 너무 무책임한 거 아냐?”
허걱!
무책임하다굽쇼?
이보세요, 아줌마.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시는 건지 저는 전혀 감을 못 잡겠습니다만.
“나한테 자기 애를 낳게 만들었으면서 그렇게 나오는 건 너무 무책임한 처사 아냐? 정말이지 그럴 수가 있는 거야?”
“…….”
난 하도 기가 막혀 잠시 말이 안 나왔다.
그 잠시가 어느 정도 시간이었냐고?
글쎄…… 대략 30분 정도?
가까스로 기막힘 상태에서 탈출한 나는 냉정을 되찾으려 애쓰면서 말했다.
“이봐 이사도라, 너 말야. 저번부터 착각을 하는데…… 나 너하고 애 만드는 작업 같은 거 한 적 없거든? 그러니 제발 그놈의 끔찍한 오해일랑 하지 말아 달라고? 우선 첫째, 넌 내 취향이 전혀 아닌데 어떻게 너한테 내 애를 낳게 할 수가 있겠냐고?”
“…….”
이사도라는 이를 악물고 나를 쏘아보았다.
내 말에 상당히 자존심이 상한 눈치다.
‘넌 내 취향이 아닌데 어떻게 애를 낳게 했겠냐’라는 소리가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이거 불안하군.
지금 이사도라의 비위를 너무 거슬려서 좋을 게 없는데 말이지.
하지만 불륜남으로 낙인찍히는 것 또한 싫으니…….
이사도라는 싸늘한 눈으로 날 보더니 입을 열었다.
“흥, 파렴치한 바람둥이. 침대에서 온갖 달콤한 말을 하며 날 가지고 놀 때는 언제고 그 결과로 생긴 아이까지 부정하려 하다니.”
“이사도라,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알고서 그런 말을 마구 하냐?”
난 억장이 막혀 소리쳤으나 이사도라는 냉랭히 코웃음을 쳤다.
“흥, 끝까지 부인하시겠다? 좋아, 그럼 증거를 보여 주도록 하지.”
증거?
무슨 증거?
내가 너하고 이상한 짓 한 게 없는데 뭔 증거를 보여 준다는 거냐?
어디 한번 할 테면 해 보라지.
내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자 이사도라는 정말 가증스럽다는 시선을 보내더니 손뼉을 두 번 쳤다.
그러자 밖에서 길드원 하나가 커다란 수정 구슬을 들고 들어와서 책상에 내려놓고 나갔다.
그 수정 구슬을 보면서 이사도라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기가 하도 우리 사이를 부정하길래 준비를 해 뒀어.”
“준비를 하다니? 뭘 준비했단 건데?”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들!”
이사도라는 말과 함께 책상에 놓여 있던 작은 스태프를 들어 수정 구슬을 가볍게 쳤다.
파앗!
가벼운 음향과 더불어 수정 구슬에 영상이 그려졌다.
허거거걱!
저건 글래스 캐슬을 떠나서 비기닝 시티로 오는 도중에 묵었던 여관 아냐?
그리고 구슬 속에서는 여관 속 이사도라의 방이 비쳐졌다.
이사도라는 잠옷 차림으로 더할 나위 없이 단정하고 정숙한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사기다!
난 내심 크게 부르짖었다.
이건 엉터리라고 말이지.
이사도라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렇게 요조숙녀 같은 자세는 못 갖춘단 말이지.
즉 저건 조작된 영상이란 그 말씀이다.
하지만 그런 내 마음과는 달리 영상 속에 그려지는 모습들은 점차 나한테 불리한 쪽으로 치닫고 있었다.
내가 이사도라의 방에 침입해서 이사도라가 놀라고 있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