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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킹 마스터 5권(120화)
Part 9. 코란의 최후(1)


“영감님…….”
“오, 우영! 자네가 왔군.”
“무기 수리 좀 부탁드리려구요. 영감님이 손봐 준 무기들로 내 제자들이 한바탕 잘 싸웠는데 아주 큰 싸움이 또 있을 예정이라서요. 좀 더 잘 다듬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래? 뭐 보수를 적정하게 내면야 어려울 거 없지.”
“야, 모두 여기 니들 무기 갖다 놔라.”
이곳은 고든의 대장간이었다.
나는 제자들의 무기를 고든한테 내놓도록 했고, 고든은 그 무기들을 점검해서 손상된 부분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저 드워프 영감한테 맡기면 다른 걱정은 할 거 없다. 새로 산 무기 이상으로 튼튼하고 예리하게 변하니까 말이지.
그러나 제자들의 수가 많은지라 무기의 숫자 또한 많아서 시간이 꽤 걸렸다.
제자들은 서서 자기들의 무기 수리가 끝나기를 기다렸고, 고든 영감은 구슬땀을 흘리며 지글지글 타는 불 속에 무기를 담금질하며 연신 망치질을 해 댔다.
난 대장간 한쪽 켠의 의자에 앉아 그 광경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여보게, 우영! 그만 일어나게.”
“허억!”
고든이 세차게 내 어깨를 흔드는 바람에 난 잠에서 깨어났다.
음, 따뜻한 대장간의 불기운에 그만 잠이 들었던가 보군.
주위를 둘러보니 무기 수리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제자들도 앉거나 벽에 기대서 졸고 있는 모습들이었다.
“그만 깜빡 잠이 들었군요.”
“무기 수리는 모두 끝냈네. 완벽하게 새것 못지않은 상태로 해 놨으니 아무 문제없을 거야.”
“수리비로 얼마를 드리면 되겠습니까?”
“천오백 골드는 받아야겠지만 자네와 나 사이니까 그냥 천 골드만 내게나.”
그 말에 난 돈주머니를 꺼내서 한움큼의 금화를 건네주었다.
금화의 개수를 세던 고든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네 셈할 줄 모르나?”
“무슨 말씀이신지요?”
“천 골드만 달라고 했는데 왜 이천 골드를 주느냐고?”
“그동안 수고해 주신 거에 대해 감사드리는 의미로 그런 겁니다.”
“그래도 난 내가 제시한 금액 이상은 받을 수 없네!”
“그럼 그냥 천오백 골드 받으세요. 그만큼은 받아야 한다고 그러셨잖습니까.”
내 말에 고든은 비로소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사람 참……. 근데 갑자기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러나? 다른 때는 깎으려고 했으면서.”
“사실은……. 어쩌면 고든 영감님을 뵐 일도 별로 없어질지 몰라서요.”
“응? 그게 무슨 말인가?”
내 말에 고든은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나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어쩌면 신상의 변동이 생겨서 이곳에 다시 못 오게 될지도 몰라서요…….”
“그런가? 뭔 일인진 몰라도 그렇게 되면 섭섭해서 어쩌나…….”
“제가 못 찾아 뵈도 오랫동안 대장간 일 잘하시고 건강하세요.”
“자네도 잘 지내게나.”
고든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근데 왜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고든한테 한 거냐고?
뜬금없는 소리가 아니라고.
이사도라의 행동도 그렇고……. 아무래도 재경이를 로그아웃시켜 현실로 데리고 나오면 이 게임을 접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괜히 이상한 일에 얽혀 봉변 아닌 봉변을 당하게 되고, 내가 낳은 적 없는 아들까지 얻게 되고, 불륜남 칭호까지 생길 판이니 말이다.
갈수록 ‘즐길 수 있는 게임 생활’에서는 멀어지고 있어서 말이야.
그래서 인사를 할 만한 게임 속의 인물들에게는 인사를 해 두려는 거다.
물론 이사도라한테는 절대로 작별 인사 못 하지.
그랬다간 뭔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아마 너 죽고 나 죽자며 칼 들고 달려들 가능성이 크다.
어쨌거나 고든이 수리한 무기들을 받은 제자들은 만족한 표정들이다.
보기만 해도 새것 이상으로 잘 정비된 무기들이라 사기도 충천한 것 같다.
나는 다시 한 번 고든에게 치하의 말을 하고는 제자들을 데리고 그곳을 나섰다.

마토스 국의 내 영지 한가운데에 위치한 저택에는 창마다 불이 가득 켜져 있었다.
피그몽들은 지들끼리 치고 박으며 열나게 훈련을 하고 있었고 하인들도 파티원들의 지시로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난 제자들에게 오늘은 휴식을 취하고 내일부터 전투준비를 시작하라고 말하고는 저택의 지하실로 향했다.
둔중한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리자 그곳엔 내가 보기 원했던 인물들이 이미 다 와 있었다.
이 지하실은 사면이 칙칙한 회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집기라고는 한쪽 구석의 책상이 전부였다.
그 외는 낫과 꼬챙이, 쇠사슬, 불화로에 달구고 있는 인두 등의 보기만 해도 공포심이 생기는 고문 도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는 에이프릴이 결박당해 있었고 파티원들이 그녀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세영이한테 말을 걸었다.
“아직 안 왔냐?”
“급하게 오고 있다고 했어요. 지금쯤 도착할 시간이 되었는데…….”
“그래? 야, 에이프릴! 너 연기 잘해야 한다? 니 아버지가 눈치채지 못하게 말이지.”
“…….”
내 말에 에이프릴은 입술을 삐쭉 내밀며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세영이가 혼잣말처럼 ‘협조하기 싫으면 진짜로 한번 고문당하는 것도 좋겠지.’라고 말하자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지하실의 문이 열리며 하인들의 안내를 받은 엘프 마을 촌장이 들어섰다.
“에이프릴!”
촌장은 자기 딸이 묶여 있는 걸 발견하고 달려들려다 다쓰가 발을 거는 통에 보기 좋게 나뒹굴었다.
“훗! 당신 딸만 보이고 우리들은 보이지 않는다 이건가?”
“…….”
내 말에 촌장은 겁먹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내가 제 발로 이곳에 오지 않으면 에이프릴을 참혹하게 고문해서 죽이겠다니…….”
“…….”
나와 파티원들은 촌장의 말에 잠시 벙 쪘다.
왜 벙 쪘냐고? 당근 기가 막혀서였지.
우릴 함정에 몰아넣고, 재경이 녀석한테 알려 줘서 몰살을 시키려고 한 건 괜찮고, 내가 에이프릴을 인질로 잡고 협박한 것만 잘못이라 이거냐?
하도 얄미워서 잡아먹을 듯 째려보자 촌장은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아니,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잘했다는 건 아니네.”
“아니까 다행이군요. 그날 내 부하들이 마구 죽어나간 거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리거든요? 지금 내 심정 같아선 부녀 두 사람 모두 여기서 실컷 고문해서 저세상으로 함께 보내 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보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정 그럴려면 아무 죄 없는 에이프릴 만이라도 풀어 주게.”
쩝, 제법 아버지다운 척하고 있네.
그래 봐야 이제는 눈곱만큼도 안 감동스럽다만.
“정말 우리한테 한 짓을 반성하시는 거라고 믿어도 되겠습니까?”
“아무렴, 반성하고말고. 이렇게 무릎 꿇고 사죄하네. 그러니 제발 내 딸을 풀어 주게.”
얼씨구?
촌장은 진짜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무릎 꿇는데 돈 들어갈 일이 없으니 이 정도로 이 교활한 엘프 할배가 정말 반성하고 있다고 믿을 순 없지.
“좋습니다. 다소 반성의 빛이 보이는 듯하니 잘못을 씻을 기회를 드리죠.”
내 말에 촌장은 고개를 들고 날 바라보았다.
저 교활한 눈동자 굴리는 거 좀 보라지. 분명히 또 내 뒷통수 때릴 궁리하는 게 틀림없다.
“마을에 가서 엘프들한테 그러세요. 나를 도와 전나세 일당을 때려잡으러 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
내 말에 촌장은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재경이하고 손잡고 날 기습해서 몰살시키려 했는데 이제는 정반대로 나와 손잡고 재경이를 치게 됐으니 난감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
아무리 박쥐 같은 엘프라고 해도 말이지.
촌장의 얼굴에 갈등의 표정이 보이길래 나는 미리 쐐기를 박았다.
“분명히 말하는데 선택의 여지는 없습니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던가 아니면 거부해서 에이프릴이 이 지하실에서 참혹한 고문을 당해서 죽게 만들던가, 두 가지 길뿐입니다.”
“…….”
엘프 마을 촌장은 한참을 더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리며 고민하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면서.
“시키는 대로 하지. 엘프 마을에 가서 모두에게 전하겠네.”
“이번에도 우릴 배신했다간 그때는 끝장이라는 거 분명히 명심하세요. 그리고 행여 이곳에 다시 와서 에이프릴을 구할 생각도 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촌장님이 여기를 나가는 대로 딴 곳으로 옮길 테니까.”
“알았네…….”
촌장은 맥 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지만 눈곱만큼도 동정심이 생기진 않았다.
다 지가 자초한 일이니까 말이지.
“잠깐만요, 어딜 나가려고 합니까. 정작 중요한 게 남아 있는데.”
“중요한 게 남다니?”
촌장은 나가려다 말고 어리둥절했다.
“아, 전나세가 있는 위치하고 그곳으로 가는 길을 우리한테 안내를 해 줘야죠!”
“…….”
배신자 노릇을 하기로 맘먹었으면 확실하게 해 달라는 나의 말에 촌장은 다시 난감한 표정이었다.
“전나세하고 손잡고 우릴 기습하려 했을 때 그런 생각 안 했습니까? 이게 만약 실패하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 말입니다.”
“알았네. 어쩔 수 없군. 시키는 대로 할밖에.”
“그러셔야죠. 따님이 다치지 않길 원하면 당연히 그렇게 하셔야 하고 말구요.”
나는 커다란 종이와 펜을 촌장에게 가져다주었고 촌장은 니녹스 산맥의 재경이 부대가 있는 위치를 정확히 표시해 주었다.
뒤이어 나는 촌장이 엘프들을 이끌고 우리와 합류할 지점을 표시해 주었다.
촌장은 알았다고 말하고 힘없이 고개를 떨구며 마을로 돌아갔다.
촌장이 나가자 에이프릴은 형식적으로 묶여 있던 손목의 밧줄을 풀고 일어서면서 말했다.
“우리 아버지를 너무 경멸하진 말아요. 가엾은 분이니까.”
그 말에 나는 코웃음을 쳤다.
“두 번만 가엾었다간 우리 뼈도 못 추리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