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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킹 마스터 5권(123화)
Part 10. 최후의 결전(2)


“우영…… 아니, 우영 공작아. 이제 오냐, 쉬익!”
내가 터덜터덜 저택으로 돌아오니까 란슬링이 날 보고 하는 소리다.
우영 공작아?
곧 죽어도 ‘님’자는 안 붙이는군.
하지만 당장 재경이 녀석을 찾아낼 생각에 골치가 아픈데 그런 거 가지고 갈굴 상황도 아니다.
생각할 게 있으니까 아무도 방해 말라고 파티원들한테 말한 다음, 2층의 내 방으로 올라갔다.
재경이의 행적에 대한 단서를 다시 어디서 구하나 고민하면서 말이지.
어두운 방에 들어서는 순간, 뭔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방 안에 누가 들어와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난 허리에 차고 있는 메이스에 손을 얹으면서 불을 켰다.
“…….”
쩝…….
난 ‘심봤다!’라고 소리 지르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내 방의 소파에는 재경이가 앉아 있었다.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서 나를 삐딱하게 바라보는 저 표정 좀 보라지.
난 내심 ‘딱 걸렸다. 넌 이제 죽었다. 이 자식아!’라고 소리 지르려다가 꾹 참았다.
이번엔 절대로 놓치면 안 된다.
제대로 기회를 잡아서 확실하게 보내 버려야 한다, 그 말씀이지.
그래서 난 짐짓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재경아, 무사했던 거냐?”
“응, 삼촌이 메이스로 그 엄청난 화염 공격을 하려고 할 때 뭔가 낌새가 이상해서, 미리 파 두었던 땅굴로 피했거든. 아니면 나도 부하들과 함께 끝장났을 거야.”
“그러냐? 넌 참 운도 좋구나…….”
“그러게 말이야. 삼촌한테 당해서 로그아웃당해서 현실로 돌아갔으면 꼼짝없이 아빠, 엄마한테 다시 붙들렸을 텐데 말이지.”
“너 그렇게 게임이 좋냐?”
“응!”
“…….”
게임이 그렇게도 좋냐는 질문에 재경이는 아주 딱 부러지게 대답했다.
“재경아, 너 그러다가 게임 폐인이 되면 어쩔래? 아빠, 엄마 생각도 좀 해야 할 거 아니냐고.”
“삼촌, 이런 거 저런 거 다 생각하면 어느 세월에 레벨 올리겠어?”
“…….”
내가 진지하게 걱정해 주는 척하는데도 재경이는 별로 감동하는 기색이 없다.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이 방에서 레달입을 시전하는 한이 있어도 해치우는 수밖에.
내가 그렇게 마음을 굳히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재경이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을 걸었다.
“삼촌…….”
“응?”
“나 좀 도와줘…….”
“…….”
나는 뭐라고 대답을 해 줘야 할지 몰라서 재경이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도와 달라니?
도대체 뭘 도와 달라는 거냐고.
설마 날더러 널 로그아웃시키지 말아 달라는 거냐?
어림도 없지.
지금까지 내가 널 잡아서 게임생을 영원히 끝장내 주려고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내 표정을 살피던 재경이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내 부탁 들어주면 나도 삼촌이 한 거 다 안 까발리고 묻어 둘게.”
“…….”
아니, 근데 이 자식이 지금 무슨 이상한 소릴 주절대고 있는 거람?
“너, 지금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뭘 어떻게 했는데 안 들추고 다 묻어 주겠다는 거냐?”
“응, 삼촌이 한 나쁜 짓을 아빠, 엄마한테 안 이르겠다는 거야. 뭔 짓을 했는가는 삼촌이 더 잘 알잖아.”
“…….”
나는 말문이 막혔다.
지금 재경이 이 녀석이 삼촌인 나한테 공갈 플러스 협상을 제안하고 있는 거다.
초딩 주제에 이다지도 가증스럽고 뻔뻔스럽고 당돌할 수가 있나?
이 녀석의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에 피멍이 들 때까지 볼기를 두들겨 주고 싶은 걸 꾹 참은 다음 물었다.
“삼촌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삼촌이 도대체 뭔 짓을 했다는 건지, 어디 니가 한번 말해 봐라.”
“어떻게 그게 기억이 안 날 수가 있어! 내 돼지 저금통 몰래 들고나가서 친구들하고 술 먹고 들어온 거, 그러고선 엄마한테는 시치미 뚝 떼서 내가 엄마한테 깨지게 만들었잖아. 그리고 내 컴퓨터에 야동 잔뜩 다운받아서 저장해 놓고는 안 지웠잖아. 그거 엄마가 보고 내가 받은 건 줄 알고 얼마나 혼난 줄 알아? 그리고 아빠가 나한테 용돈 주라고 삼촌한테 맡긴 돈, 삼촌이 삥땅한 게 몇 번인 줄은 내가 말 안 해도 잘 알지? 그리고 삼촌 부하인 케브라의 가족들 학살한 것도 삼촌 짓이지? 내가 그거 케브라한테 말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젠장…….
이 자식이 쪼잔하게 이것저것 모두 다 알고 있구먼.
근데 내가 볼 때는 쪼잔해도 아직 초딩인 녀석의 입장에서는 아닐 것 같기도 하다.
나름대로 제법 원한이 맺힐 만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일들로 내 대신 지가 형하고 형수한테 크게 깨졌으니까 말이지.
근데 딴 건 몰라도 케브라 일은 좀 그렇군.
진짜로 케브라의 귀에 사실이 알려지면 상당히 재미없게 된다.
뭐 현실에서 있었던 일이야 설사 재경이가 지 부모한테 꼰지른대도 상관은 없다만.
어쨌거나 결론은 하나군.
가급적 빠르게 재경이를 로그아웃시켜야 한다는 거 말이지.
난 메이스를 꺼내 들어 재경이를 겨냥했다.
그러자 재경이는 처절하게 소리쳤다.
“삼촌, 진짜 이럴 거야!”
그러나 난 냉정을 유지했다.
“응, 이럴 거다. 삼촌 입장에선 이럴 수밖에 없거든? 니가 이해해 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돌았어? 내가 삼촌이 이러는 걸 이해하게. 이해 못 해! 절대로 못 해! 내 분명히 말하는데 삼촌은 아주아주 아아아주 나아쁜 새끼야!”
근데 이 자식이 욕을 하네?
삼촌한테 욕을 하는 버르장머리를 내 가만두고 볼 수는 없지.
난 죄책감이 한결 덜어지는 기분으로 메이스를 휘둘렀다.
“잘 가라, 재경아!”



Part 11. 마지막 스토커(1)



게임에서 나온 나는 이번에는 형 집으로 서둘러 달려가지 않았다.
대신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형수!”
“삼촌, 웬일이세요?”
“재경이 안 깨어났나요?”
“아직 방에 안 들어가 봤는데…….”
“그럼 들어가 보세요. 깨어났을 겁니다. 이번엔 내가 확실하게 처리했으니까.”
“아, 알았어요. 그럼 재경이 방에 들어가 볼게요. 삼촌, 고마워요!”
형수는 재경이가 현실로 돌아왔을 거란 말에 가슴이 떨리는지 흥분된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난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리고 전화가 걸려 오기를 기다렸다.
재경이가 제대로 현실로 돌아왔다면 분명히 전화가 올 테니까.
저택의 내 방에서 메이스로 확실히 끝장내 줬으니 틀림없이 현실로 돌아왔겠지.
“…….”
근데 이거 어째 소식이 없네?
어느덧 한 시간이 지났다. 근데도 여전히 깜깜무소식이다.
이거 설마 또 뭔가 잘못된 건가?
난 온몸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이번에도 제대로 안 된 거라면 정말 곤란한데…….
그때 전화벨이 울렸고 난 수화기를 들었다.
“형?”
“그래, 나다. 수고했다.”
“재경이는? 깨어난 거야?”
“그래, 현실로 돌아왔어. 녀석이 그러는데 너 때문에 게임에서 쫓겨났다고 울고불고 난리 치더라.”
“근데 왜 금방 전화 안 했어? 난 또 뭐가 잘못된 줄 알고 맘 졸였잖아. 재경이가 깨어났으면 빨랑 나한테 전화를 했어야지.”
내가 화가 나서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형이 황급히 변명을 했다.
“미안하다. 재경이 이놈이 깨어나니까 갑자기 열이 치받더라고. 이놈의 자식 때문에 그동안 맘고생한 거 생각하니까 말이지. 행여 하나뿐인 아들이 식물인간이 된 건 아닌가 싶어서 우리 부부가 얼마나 괴로워했냐. 아, 근데 이 자식이 깨어나서는 하는 소리가 뭔줄 알아? 악마 같은 삼촌 때문에 그 재밌는 게임을 하다 말고 쫓겨났으니, 나같이 불행한 초딩도 없을 거라나 뭐라나. 아, 지놈 때문에 밤잠 못 자고 걱정한 부모는 안중에도 없이 게임 못 하게 된 것만 불평하더라고. 그래서 어찌나 화가 나는지 좀 두들겨 패 주느라고 너한테 전화하는 거 깜박 잊었다.”
“…….”
쩝, 그러니까 애를 한 시간이나 줘 패고 있었다는 말이군.
난 하도 기가 차서 잠시 말을 멈췄다.
“형…….”
“왜?”
“내 충고 하나 할 테니까 잘 들어.”
“무슨 충고를?”
“애한테 자꾸 그러지 마. 공부하라고 허구한 날 압력 주고 말 안 듣는다고 줘 패버릇하지 말라고. 그러다간 이번에는 아주 가출해서 게임방 폐인이 되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그때도 내 도움을 청할 거야?”
“설마…….”
얼씨구! 형은 재경이가 앞으로는 게임 때문에 말썽을 부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보다.
도대체 뭘 믿고 그런 생각을 하는 건지…….
게임 때문에 이 정도로 속을 썩였으면 다음에도 또 말썽을 부릴 가능성은 넘치고도 남는다는 걸 알아야지.
게임 중독증이라는 게 쉽사리 끊어지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형, 내가 충고하는데 애 자꾸 윽박지르지 말고 잘 달래라고. 안 그러면 심란한 일이 또 벌어질 수 있어. 흘려듣지 말고 단단히 명심해.”
“그래……. 알았다…….”
내 말에 형은 좀 수그러든 음성으로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도 수화기를 내리고 침대에 누웠다.
근데 재경이 녀석이 날더러 ‘악마 같은 삼촌’이라고 했다고?
하긴 인정사정 안 봐주고 메이스 휘둘러서 로그아웃시켰으니 지 입장에선 그렇기도 하겠구먼.
가만있어라.
재경이 녀석이야 게임 속에서 현실로 꺼내 왔으니 됐지만 그렇다고 이 상태로 게임 생활을 접을 수는 없을 거 같다.
정리해야 할 일들이 아직 꽤 남았으니 말이지.
그렇다. 유종의 미를 거두고 나오자……라는 구실로 나는 다시 게임 속으로 들어갔다.

“헛! 우영, 아니 우영 공작아, 어디 갔다 왔냐?”
“오빠…… 아니, 공작 오빠. 표정이 왜 그래요? 꼭 강제로 젖을 뗀 애기 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니 이상하잖아요?”
공작님이라고 부르랬더니 이것들이 그래도…….
“좀 정리할 일이 있어서 그러니까 저택을 떠나서 여행 좀 하자.”
“…….”
내 말에 파티원들은 별로 달갑지 않은 표정들이다.
하긴 배부르고 등 따뜻한 곳을 떠나고 싶진 않겠지.
“따라오기 싫으면 말든가. 근데 여기서 개기다가 생기는 일은 난 절대로 책임 안 진다. 그것만 명심하면 여기 그냥 있어도 좋다.”
그 말에 파티원들은 궁시렁거리면서도 별 수 없이 나를 따라나섰다.
짜식들아, 그렇게 불만 있는 표정 짓지 말라고.
이제 나하고 함께 있을 시간도 별로 안 남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난 그 말을 녀석들한테 대놓고 할 수는 없었다.
그동안 잔정이 들어서 그런 건지…….

저택을 떠난 나와 파티원들은 마토스의 왕궁으로 들어섰다.
“국왕 전하!”
“오, 우영 공! 전나세를 처단했다는 소식을 들었소만, 그게 사실이오?”
투르펜이 몹시 궁금한 표정으로 묻는다.
나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러하옵니다. 제 손으로 이 세상에서 그 존재를 말살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세상에 돌려보냈죠.’라는 말은 마음속으로만 했다.
그러자 투르펜은 환성을 터뜨렸다.
“오오…… 세상에. 드디어 그대가 해냈구려!!”
순간 띠리링 하는 소리와 함께 창이 떴다.

- 전나세의 야심을 분쇄하라! 퀘스트가 달성되었다 -
전나세를 제거해서 그의 야망을 분쇄하고 제국을 세우려는 계획도 완벽하게 무너뜨렸다!
이제 너는 암흑제국, 마토스, 엘카니아, 사드린, 볼타오, 투르펜의 5개국에서 떼 주는 영토에 공국을 세우고 공왕이 될 자격을 얻었다.

음, 공왕인가?
국왕은 아니지만 좌우간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는 자리인 건 분명하다.
지금까지 내가 이 게임 속에서 획득한 것 중 최고의 권좌다. 감개가 무량하구먼.
이제 이 게임을 접어야 할 입장이라는 게 조금 아쉽다만…….
대견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던 투르펜은 랑케를 시켜서 가져오게 한 문서를 내게 주었다.
“암흑제국 황제, 그리고 엘카니아 사드린 볼타오의 3개국의 국왕이 그대에게 양도하기로 한 땅문서요. 이 땅에 그대만의 공국을 마음껏 만들어 나가시구려. 아, 우리 투르펜에서 그대에게 주는 땅은 현재의 영지를 활용하면 될 거요.”
“…….”
이거 뭐야?
이렇게 되면 마토스는 새로 땅을 안 만들어 주고 미리 준 땅을 활용하는 거잖아?
좀 얍삽하다 싶긴 하지만 굳이 항의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미 공작의 작위를 받으면서 얻었던 영지가 꽤 넓었던 터라 말이지.
나는 다시 투르펜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전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말이오…….”
이 아저씨가 또 무슨 할 말이 있나?
내가 어리둥절해했으나 투르펜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대가 세울 공국은 5개국 모두에게 우호적이어야 한다는 단서가 있지만…… 그래도 우리 마토스 국에 제일 우호적이었으면 하는데 문제없겠지? 앞으로 다른 나라와 분쟁이 생겨도 우리 마토스를 적극 지원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오.”
“…….”
결국 그 소리였나?
뭐 왕이라면 자기 나라의 국익을 생각하는 건 당연하긴 하다만…….
댁이 하는 거 봐서요……라고 대답해 줄려다가 그래도 투르펜이 나한테 베풀어 준 호의를 생각해서 나도 화답했다.
“물론이죠. 어찌 전하를 암흑제국 황제 같은 조폭스런 분을 대하듯 할 수 있겠습니까?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
“오오……. 고맙소!”
투르펜은 두 손으로 내 손을 잡으며 반색했다.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며칠 우리 왕궁에서 묵다가 가시구려.”
“전하의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공국을 세우는 문제와 관련해서 처리할 일이 너무 많아서 말이죠.”
“음, 그것도 그렇군. 알겠소이다. 그럼 가급적 자주 들러 주시구려.”
난 투르펜과 헤어져서 마토스 왕궁을 나갔다.
근데 저택에선 시큰둥하던 파티원들이 어째 태도가 좀 변한 눈치다.
“우영 형님…… 아니, 우영 공작 형님이 공국을 세우신다고요?”
“그러니까……. 우영…… 아니 우영 공작이 공왕이 된단 말이냐, 쉬익!”
“어머, 세상에! 그러니까 제가 공왕비가 된다는 뭐 그 말이네요?”
“…….”
이것들이 왜 이러는 거냐?
호칭을 깍듯하게 부르는 것까진 좋다만 세영이 녀석은 난데없이 공왕비라니…….
“내가 공왕이 되는 건 그렇다 쳐도 세영이 니가 왜 공왕비가 되는 건데?”
“어머, 어머머머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남편이 공왕이 되면 부인은 공왕비가 되는 게 당연하죠!”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가 부부 사이였는데?”
“식 올리면 바로 부부되는 거죠 뭐! 지금이라도 올려요. 현실도 아니고 게임 속인데 뭔 상관있겠어요?”
“…….”
근데 가만 보니 얘가 아주 황당한 녀석이다.
난 기가 차서 지그시 세영이를 10분쯤 쳐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아, 그러냐? 게임 속에서의 결혼일 뿐이라는 거지? 그럼 현실에선 딴 여자하고 연애하거나 결혼하는 거 아무 상관없는 거지?”
“어머머머! 그게 왜 상관이 없어요? 게임은 현실 생활의 반영이란 말도 못 들어 봤어요! 게임 속에서 인연 맺은 사람이면 현실에서도 아껴 줘야죠! 오빠,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어요? 심하다.”
누가 심한 건지 모르겠네.
난 세영이 녀석의 장광설이 끝날 즈음 단호히 선언했다.
“너 김칫국 마시지 마라. 난 공왕 안 될 거니까. 니가 나하고 아무리 엮인들 공왕비 될 일은 없을 거다.”
“뭐라고, 쉬익!”
“아니, 우영 형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돌았어요? 왜 공왕이 안 되겠다는 거죠?”
“이 게임을 슬슬 접으려고 하니까.”
“아니, 왜요! 왜 이 게임을 접는데요? 무엇 때문에!”
“그거 알아서 뭐할래. 좌우간 빨리 움직이자. 정리할 일들이 남았으니까.”
파티원들의 항의성 질문에 나는 귀찮다는 듯 대꾸하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파티원들은 정말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들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
이 세상에 권력 싫다는 사람은 아마 없을 테니까. 그것도 공왕 정도나 되는 큰 권력을 말이지.
특히 세영이 녀석의 불만이 제일 큰 것 같군.
나하고 엮여서 함께 잘되고 싶다는 욕망이 크니 그렇기도 하겠지.
귀엽기도 하고 좀 귀찮기도 하고…… 복잡한 심정이다.
그때 다쓰가 질문을 던졌다.
“근데 어디로 가실 겁니까?”
“너 팔라딘 자격 다시 얻게 해 줄려고.”
“네에?”
다쓰가 입을 쩍 벌리며 놀랐으나 나는 태연히 대꾸했다.
“뭘 그리 놀라냐? 전나세 해치우면 너 팔라딘 자격 다시 주기로 교황청의 레디언트 단장이 약속했잖아. 그리고 난 전나세를 없애 버렸고 말이지. 그럼 이제 가서 널 다시 팔라딘으로 만들어 달라고 해야 할 거 아냐. 그럼 넌 다시 팔라딘이 되는데, 싫으냐? 교황청 가지 말까?”
“크흐흐흐흑! 형님이 절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다니!!”
다쓰는 감격했는지 날 껴안고 눈물을 질질 흘려 댔다.
떡대가 나보다 더 큰 사내놈이 날 껴안는 건 별로구먼…….
어쨌거나 다쓰는 신이 나서 앞장서서 걸음을 재촉했다.
별로 마음에 드는 녀석은 아니다만 그래도 기분이 좋아 보이니 다행이다.
그런데 다쓰가 좋아하니 다른 파티원들의 표정이 별로다.
“흥! 누군 팔라딘 만들어 주고…… 우린 뭐냐, 쉬익!”
“란슬링 너도 팔라딘 되는 거 소원이었냐? 근데 넌 프리스트잖아? 프리스트면서 팔라딘하는 게 가능하냐? 겸직이 안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흥, 안 되면 딴 거라도 만들어 주면 될 거 아니냐, 쉬익! 돈으로 줘도 되고, 쉬익!”
“그래그래. 그 침이나 작작 튀기면 그때 생각해 보기로 하자.”
더 말다툼하기도 귀찮아진 나는 적당히 란슬링을 달랬다.

이윽고 우리는 교황청 소속 성기사단에 도착했다.
“레디언트 단장님을 뵈러 왔습니다만.”
“들어오시죠.”
우리가 단장실로 들어서자 레디언트는 이미 재경이가 제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듯 흡족한 얼굴로 우릴 맞았다.
“어서 오시구려. 잘 해 주셨소이다.”
“힘 좀 썼죠. 어쨌거나 원하는 대로 해 드렸으니 우리한테 주실 걸 주셔야죠?”
“그럼요. 자, 여기…….”
말과 함께 레디언트가 눈짓을 하자 옆에 있던 팔라딘이 웬 시커멓게 녹슨 컵을 하나 내놓았다.
“이게 뭡니까?”
“챔피언의 컵이잖습니까? 전나세를 해치우면 이거 받기로 하셨잖습니까.”
참 그랬지. 내가 깜박 잊고 있었구먼.
‘챔피언의 컵을 망혼의 기사에게!’란 이름의 퀘스트를 잊고 있었군.
난 챔피언의 컵을 받아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레디언트를 응시하자 그는 다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팔라딘 자격은 이 시간부로 회복되었네. 우리 성기사단이 부여하는 팔라딘의 권리와 의무가 동시에 회복되었으니 팔라딘으로서 한 치의 부끄러움이 없도록 행동해 주게.”
그러자 다쓰는 무릎을 꿇고 오른손을 가슴에 올리며 말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순간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음향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