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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페리얼 가드 1권 (12화)
Chapter 4 (3)
“내일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본론이 그거였나?’
그는 한숨을 쉬었다.
“소위, 보루에 배치된 병사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잘 알잖아.”
대개 보루의 병사가 배치되는 곳을 도살장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가는 곳이었던 것이다.
“소위같이 여러 번 참전을 한 장교라면 잘 알고 있을 텐데…….”
“이렇게 큰 전투에, 그리고 불리한 상태에서 참전한 적은 없었습니다. 역대의 전투에서 저의 생존을 자신했지만, 이번만큼은 자신할 수가 없습니다.”
마리 소위가 약한 모습을 보이자 데네브는 적잖게 놀랐다.
“우린…… 어떻게 죽을까요? 적의 총알에? 총검에? 베이고 터지고 목이 매달려 창자가 튀어 나오고…… 그런 채 죽을까요?”
“아마 폭발탄을 쓸 수 있는 9파운드 곡사포나 박격포에 죽겠지.”
데네브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공성전에는 일반 대포 말고도 곡사포나 박격포도 이용되었고, 그런 곡사 무기에는 아무리 단단한 보루라도 머리 위로 떨어지는 포탄을 막을 수는 없었다.
반란 진압 때 그도 보루를 수비하는 반란군 소속 수비병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술병이 비워지고 마지막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데네브는 식도가 타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요. 내일 우린 그렇게 죽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말인데…… 부탁이 있습니다, 중대장님.”
“뭐지?”
마리 소위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졌다.
그녀가 데네브에게 다가온 것이다.
“처녀로 죽지 않게 해 주세요.”
그러더니 그녀는 느닷없이 키스를 했다.
그녀의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낀 데네브의 눈썰미는 정확했다.
마리 소위의 애정 공세는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데네브는 약간 주저했지만, 이내 받아들였다.
11시가 다 될 즈음, 마리 소위는 침대에서 나와 속옷을 입고 군복을 입으려 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데네브의 눈에는 창문에서 내려오는 달빛을 받은 그녀의 뒷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살결과 옷이 스치는 소리에 데네브는 다시금 마음이 설레었지만, 참아야 했다.
“어딜 가는 거지?”
그녀가 제복의 은 단추를 채울 무렵, 그가 물었다.
“야간 경비를 서야 해서요.”
그녀는 이제 머리를 묶었다.
‘아차, 야간 경비.’
야간 경비를 명령해 놓고 정작 본인이 야간 경비를 설 시간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설 시간은 언제지?”
“없습니다.”
곰털 모자를 쓰고 옷매무새를 정리한 후 그녀는 장화를 신고 앞굽을 톡톡 두드렸다.
“중대장님은 그냥 푹 주무세요. 내일을 위해서라도요.”
그리고 그녀는 방 밖으로 나가려 했다.
“잠깐.”
데네브가 그녀를 제지했다.
“무엇이죠?”
“왜 나에게 온 거지?”
그의 말에 그녀는 몸을 돌려 미소를 지었다.
“전 강하고 똑똑한 장교를 좋아합니다, 중대장님. 당신은 저의 그런 이상형을 갖추신 분입니다. 그래서 왔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방을 나갔다.
데네브는 혼란스러웠다.
내가 이상형?
혹시 내 지휘력을 마음에 들어 하는 건가?
‘그럴 리가.’
척후 활동을 많이 하진 않았지만, 자신이 세운 계획의 오류를 그녀는 자주 조목조목 지적했고, 그때마다 데네브는 수정해야 했다.
그의 실수 때문에 그녀 또한 짜증 나지 않았을까?
그런데 내가 이상형?
그는 결국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양초에 불을 붙이고 일기장을 꺼냈다.
중대 일지를 적게 된 이후부터 그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한 개의 어둑어둑한 불의 의지한 채 일기를 써 나갔다.
……나를 좋아하는 걸까? 이 나를?
그럴 리가 없다.
출세를 위해 말도 안 되는 위험한 일을 하던 나에게서 그녀가 어떤 장점을 볼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내가 얼굴이 잘생겼는가?
아니다. 난 그리 잘생긴 편도 아니다. 나 말고도 멋진 금발 머리를 가진 멋진 장교들도 수두룩하다.
그리고 내가 리더쉽이 있었던가?
아직까지 확신할 수 없다. 난 자주 실수를 했다. 사실 장교의 자질은 별거 없다. 전장에 앞장서서 돌격 앞으로만 외쳐도 장교로서 충분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는 게 육군 사령부이다.
그에 비해 그녀는 나보다 상황 파악 능력이 뛰어나고 돌발 상황의 대처 능력이 탁월하다. 지난번 적 용기병의 돌격에서도 그녀의 기지 덕분에 살아남지 않았던가?
그때 난 대포는 생각도 못했고, 방진을 구성할 생각밖에 안 했다.
하지만 그때 방진을 구성했다면 필시 깨졌을 것이다.
겨우 70명도 안 되는 인원의 방진은 기병들이 충분히 깨뜨릴 수 있을 정도로 약하다.
방진은 최소한 1개 중대나 1개 대대가 해야 안전하다는 것이 정석 아닌가.
글을 적을수록 데네브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그런 나에 비해 그녀는 고귀하면서 고결하고 아름다운 엘프다. 거기에 탁월한 전투 감각을 소유했다. 그녀가 나에게서 좋아할 만한 감정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다.
설마 단지 같이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술을 마시고 노래해서 그런 걸까?
그런 것으로 사람들의 사이가 그렇게 금방 친해질 수 있나?
난 그녀의 대답이 거짓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가 거짓을 말했다는 이유로 섭섭해할 필요가 없다.
그녀 덕분에 총각딱지를 뗐다.
윤리의식에 따른 죄책감은 전혀 없다.
난 그리 교양있는 남자가 아니다.
오히려 각자 동정과 처녀를 깰 수 있어서 서로 이득을 본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그 후 데네브는 그에 지난 시간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고 다시 글을 써 내려갔다.
어린 시절을 치가 떨릴 정도로 불우하게 보내고 군대에서 막연하게 출세할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난 이성에 대해 호기심을 물론, 욕구조차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고 봐야 한다.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이 문젠데 언제 이성과 교류를 한단 말인가?
‘그래도 발육이 제대로 돼서 다행이야.’
그는 웃으며 깃펜을 푹 잉크병에 담았다.
그렇기에 여성 장교인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도 평등한 장교로 대하고 같이 식사와 술을 마실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주장이 거짓이 아닌 증거도 있다.
그때 취한 그녀의 제복 단추가 여럿 풀려 있을 때 내 감정에서 성욕은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때 그녀의 천막에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녀의 사환인 레구스조차 다른 일을 하러 떠나지 않았던가.
충분한 시간이 있었고, 아무도 모르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난 하지 않았다.
왠지 변명을 늘어놓은 것 같아 그는 인상을 썼다.
그러면 그녀가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뭘까?
사랑, 유혹, 교태란 단어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
이에 난 조심스럽게 과거에 있던 이야기와 관련될 것이라 생각해 본다.
고대에 마법이 최고로 발전했던 트리니다드 제국은 멸망하는 과정에서 수도가 북쪽의 알라리히에게 포위되었을 때 시민들은 죽음의 두려움을 잊기 위해 지하 대피처에서 광란의 난교 파티를 벌였다고 한다.
남자들은 술에 취해 길거리에 쓰러져 있고, 여자들은 처녀로 죽기 전에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여럿의 남자와 동침을 했다는 그 기록은 심히 세기말과 같았다고 하니, 상상하는 것만으로 끔찍했다.
혹시 그게 아닐까?
그녀는 죽음의 두려움을 잊기 위해 나에게 온 게 아닐까?
그래서 두려움은 사라졌는가?
난 모르겠다. 진실은 그녀만 알 것 같다.
앞으로 그녀와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데네브는 쓰는 것을 마치고 다시 촛불을 껐다.
다시 이불을 덮고 잠을 자려고 할 때, 자신의 생각이 너무 심각한 게 아닌지 고민이 들었다.
내일 자기나 그녀가 살아남을지도 모르는 마당에 그런 생각을 하다니, 혼자만의 착각의 세계에 있는 것은 아닌가?
“아이 씨!”
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부끄러움에 자기도 모르게 신경질을 냈다.
누가 자신이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까 봐 두려워졌다.
순간, 그는 일기장을 찢어 버릴까 고민까지 하였지만, 다행히 그런 생각이 들 즈음 그는 잠에 빠져들었다.
피곤한 몸은 그의 뇌가 새로운 명령을 내릴까 봐 쉬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아침 5시에 일어난 데네브는 감자와 말린 베이컨을 넣은 수프에 굳어진 흰 빵을 담가 흐물흐물하게 만들어 먹으며 보루의 성첩을 통해 전방의 짙은 안개가 낀 숲을 주시했다.
“모두들 많이 먹어. 힘을 아주 많이 써야 하니까.”
레구스 일병이 102독립중대 전우들에게 수프를 듬뿍 부어 주며 말했다.
기상 시간은 6시였지만 병사들 대부분 긴장감 때문에 일찍 일어난 것이었다.
그렇기에 레구스 일병과 고든 이병은 몰래 요새 주방에 침입해 중대원들을 위한 식사를 만들어서 가지고 왔다.
전쟁에 의한 혼란으로 다행히 요새 주방의 보안이 허술했던 것이다.
사령부에서 전령이 와 적이 요새의 숲 근처로 진출했으니 미리 군수품을 보루로 옮기라고 말하자 데네브의 중대원들은 병기고 사무장과 아귀다툼을 벌이며 96파운드 포탄과 머스킷 탄약을 최대한 많이 얻어 왔다.
이는 사실 전투 규칙에 위배되는 것이었지만, 전투 중에는 무거운 포탄을 성문과 보루에 연결된 부실해 보이는 나무 다리를 통해 옮기는 것이 불가능할 거라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화약을 한꺼번에 모아 두었다가 만약에 적의 포탄에 명중되어 화약이 폭발한다면 그들은 전멸할 수밖에 없기에 화약은 가져오지 않고 성문 뒤쪽에 화약 저장 마차를 두었다.
그리고 화약의 운반은 2명의 사환들이 맡을 것이다.
“그 자식들, 오기만 하라구. 내가 다 죽여 버릴 테니까.”
포병 하나가 치즈 덩어리를 입에 쑤셔 넣으며 말했다.
“힘을 아껴. 말도 하지 말고 힘을 아끼라구. 여태까지 겪어 보지 못한 끔찍하면서 영광스러운 전쟁이 시작될 테니까.”
일병의 계급장을 단 전투공병이 말했다.
그의 이름은 델포이, 여우과 수인족이었다.
“그렇지만, 고작 말하는 것으로 기운이 빠질지 의문이 드는군.”
울리비 상병이 빈정거리자 몇몇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8시가 다 되어 갈 무렵, 마리 소위가 데네브에게 다가와 아무렇지도 않게 경례를 했다.
“화약을 모두 옮겼습니다, 중대장님.”
“수고했네.”
데네브 또한 그녀에게 평소처럼 말했다.
마리 소위는 자신의 망원경을 꺼내 데네브처럼 전방을 살펴보았다.
해가 대지에 얼굴을 내밀면서 안개가 점점 사라지자 데네브의 망원경에 숲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전방의 숲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고, 간혹 가다 발소리나 무거운 수레의 끼익,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곧 시작되겠군요.”
마리 소위는 망원경에 시선을 떼었다.
이제 숲의 흔들림은 맨눈으로 확인될 정도로 대놓고 요동쳤다.
뒤에 있는 성벽 쪽에서도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요새 수비대인 34연대의 1,800명이 전부 집결해 있었다.
“음?”
그때 데네브의 눈에 검정색 삼각 모자를 쓴 이가 들어왔다.
전체적으로 붉은색을 띤 옷은 노란색의 안쪽 칼라와 크게 접어 단추로 채운 소매 안감으로 보아 제복 코트가 분명했다.
귀족 급 장성―귀족 장성들은 대부분 제복 코트를 입는 것이 유행이었다―임이 분명해 보이는 그는 입에 기다란 풀을 문 채 숲에서 혼자 걸어 나와 여유로운 자세로 망원경을 꺼내 이쪽을 살피다가 데네브의 시선과 마주쳤다.
순간, 데네브는 그가 웃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그는 좌우를 살피다가 입에 물고 있던 풀을 뱉어 내고 뭔가 고함을 치듯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런 행동이 끝나기 무섭게 엄청난 전율의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