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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페리얼 가드 1권 (19화)
Chapter 6 (2)
얼마 안 가 병사들 너머로 커다란 깃발을 든 소년이 보였다.
그 소년은 전에 데네브가 본 적이 있는 장교였는데, 데네브가 척후를 나갈 때 기죽었던 장교였다.
데네브는 얼른 성루에서 내려가 그에게 달려갔다.
그 작은 몸으로 커다란 깃발을 들고 왔던 장교는 기진맥진했는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깃발을 무사히 가져와서 다행이군. 수고했다. 이리 줘.”
데네브는 깃발을 한 손으로 받아 들고는 병사들 앞에 섰다.
패퇴한 아군은 대략 400명 정도였다.
아마 나머지 병사들은 다른 문으로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을 것이다.
“대위 이상의 장교는 없는가? 살아남은 사관은?!”
병사들에게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살아남은 장교는?”
“대위님이 제일 높습니다.”
검댕이가 가득 묻은 포병이 말했다.
나머지들은 전부 어린 신입 장교들이었다.
‘하, 전부 도망간 거야? 기사들은 없나?’
기사들도 없었다. 전부 보병이었다.
말을 탄 것들은 전부 어디 가 버린 건가 생각하며 데네브는 입을 크게 벌렸다.
“나의 지휘를 따라라!”
주변엔 그를 제외하고는 높은 계급의 장교는 없었다.
말을 탄 비겁한 겁쟁이들은 먼저 도망가려다가 먼저 황천으로 말 타고 가 버렸다.
물론 데네브 역시 죽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죽는다 해도 절대로 비겁하게 죽지는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주변을 압도하는 덩치에서 울려 나온 데네브의 큰 목소리는 주변 사람들을 휘어잡기에 충분했다.
“4열 종대!”
“4열 종대!”
34연대 병사들이 명령에 복창하며, 부사관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굼뜬 이들을 제자리에 밀어 넣었다.
“남문을 열어라!”
102독립중대 병사들이 다시 문을 열고 도개교를 내렸다.
“깃발을 따라라! 깃발을 따라!”
어느새 데네브의 옆에는 어린 드러머 보이(고수)가 붙어 있었다.
군악대는 군기의 옆에 붙어 있는 것이 규칙이기도 했던 것이다.
12살로 보이는 드러머 보이는 커다란 눈동자로 데네브를 올려다보았다.
“전 부대, 속보로 전진!”
데네브가 앞장서서 달렸다.
“중대장님, 중대장님이 직접 군기를 들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군기를 들겠습니다.”
마리 중위가 같이 달리면서 말했다.
“아니야, 됐어. 이럴 때는 내가 나서야지.”
사실 깃발을 들고 가면서도 데네브는 자신이 하사였을 때 연대 깃발를 들었던 일이 떠올라 간담이 서늘했다.
분명 연대 깃발를 본 적 기병대는 이 굉장한 노획물을 얻고 싶어 할 것이기에 그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당장에라도 연대 깃발를 마리 중위에게 넘기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공포 때문에 타인을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예상대로 연대 깃발을 본 적 기병들이 공격을 하기 위해 부대를 정렬하는 것이 보였다.
“방진 준비!”
“방진 준비!”
데네브의 명령에 부사관과 어린 장교들이 복창했다.
순간, 적의 기병대 지휘관이 기병도를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나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면서 기병들이 달려들었다.
“군기를 기준으로 방진!”
데네브가 걸음을 멈추자 그의 옆에 있던 드러머 보이가 요란하게 북을 울렸다.
“군기를 기준으로 방진!”
“거기, 빨리 움직여! 살고 싶으면 움직여!”
하지만 102독립중대 병력이 아닌 다른 병사들은 뜻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들은 너무 지쳐 있었던 것이다.
“빨리, 서둘러! 살고 싶으면 움직이라고!”
그나마 살고자 하는 열망 덕분에 병사들은 겨우겨우 2줄로 방진을 짤 수 있었다.
“총검! 장착!”
데네브는 계속 고함을 질러야 했다.
병사들이 많은데다가 기병들의 말발굽 소리와 아직도 들려오는 포성 때문에 주변은 매우 시끄러웠다.
척탄병 하나가 총검을 꽂은 머스킷을 들어 데네브의 앞에 섰다.
“1열, 앉아! 2열, 장전!”
마리 중위의 목소리도 충분히 커서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방진이 짜여지자 적의 기병들은 적잖게 당황했는지 돌격을 멈추었다.
그들은 매우 당혹스러워―패주하는 병사들은 대개 질서가 없었다―하며 잠시 대열이 뒤틀렸지만, 이내 다시 대열을 정비하고는 돌격을 감행했다.
이미 성채를 함락시켰다는 도취감 덕분에 그들은 방진을 깰 수 있다는 믿음과 함께 눈앞에 보인 노획물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정면, 발사 준비.”
“조준!”
부사관의 악에 받친 목소리로 내린 명령에 병사들이 총을 조준했다.
“발사!”
순간, 검은 화약의 짙은 총연이 앞을 뒤덮었다.
말과 사람의 비명 소리가 한데 섞이며 우당탕거리는 낙마 소리가 들려왔다.
총연이 걷히자 그제야 데네브는 바로 코앞까지 달려온 적의 기병들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연대 병사들은 다행히 동요하지 않고 꿋꿋하게 총검을 겨누고 있었다.
그러자 그대로 달려들 것 같던 말들이 머리를 돌리거나 놀라서 앞발을 들어 올리는 등 우왕좌왕했다.
그 바람에 돌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어쩔 수 없이 적의 기병들은 방진의 좌우로 갈리진 채 달려야 했다.
그러자 방진의 좌우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나면서 기병들과 말이 쓰러졌다.
이후에는 산발적인 사격만 계속되었는데, 기병들은 그 어디에도 파고들지 못한 채 방진 주변을 맴돌다가 나팔 소리와 함께 물러났다.
“좋았어!”
“만세!”
마침내 병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의 주위는 적의 시체와 부상자들로 가득했다.
“지금 상태에서 다시 행군, 속보로 이동한다.”
데네브가 입을 열자 병사들이 저절로 조용해진 덕분에 그는 아까보다 차분하게 말할 수 있었다.
“허참.”
드리지아 제203보병대대 대대장 배킨스 중령은 기병대가 깨져 나가는 것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방진을 향해 그대로 돌격하다니…… 멍청한 것들. 베른트문트 준장, 이 병신 자식 같으니. 아무리 패주한 병력들이라지만 방진은 방진인데.”
베른트문트 준장은 데네브가 패주시킨 기병연대의 연대장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손을 흔들어 자신의 대대 병력들에게 추격 명령을 내렸다.
“대대, 2열 횡대 진영으로.”
그의 휘하 600명의 대대 병력이면 기병대의 도움이 없어도 놈들을 쉽게 박살 낼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그의 병사들은 여태까지 전투에 한 번도 투입되지 않은 매우 활기찬 상태였고, 머스킷을 한 발도 쏴 보지 못했다는 생각에 분노를 표출하는 호전적인 사람들이었다.
“부대, 구보로 전진. 놈들을 따라잡는다!”
드리지아 병사들은 환호를 지으며 달려 나갔다.
그들의 눈앞에는 승리의 상징과도 같은 적의 연대 깃발이 있었다.
“적의 보병대입니다.”
마리 중위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적군의 대대 병력이 넓게 퍼지면서 달려오는 모습은 가히 위력적이었다.
“따라잡히겠는데요?”
“나도 알아.”
하지만 여기서 맞서 싸운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짓거리였다.
숫자도 그렇고, 그의 병사들은 매우 지쳐 있었다.
“그래도 최대한 달려야…….”
“소용없습니다. 지금 여기서 준비를 하는 게 좋습니다. 병사들의 체력을 어떻게든 덜 소비시켜야 합니다.”
“맞서 싸우자는 거냐?”
데네브의 물음에 마리 중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길 수 없는데…….”
“이대로 붙잡힐 바엔 차라리 싸우는 것이 낫습니다. 전 싸우다 죽는 것을 택하고 싶습니다.”
그 방법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독선적인 생각이었다.
‘최후의 저항인 건가?’
“좋아, 3열 횡대로 전환!”
“그리고 1열에…….”
마리 중위가 뭐라고 작게 말했다.
조금 뒤 데네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대로 하지. 중위 1열을 맡아 주게.”
“알겠습니다. 3열 횡대!”
“3열 횡대!”
병사들이 다시 대열을 짰다.
“총검을 치우고 재장전에 들어간다.”
총검이 장착된 상태에서는 장전에 방해되기 때문이 이루어진 명령이었다.
총알을 장착하는 병사들의 거친 숨소리가 여럿 들려왔고, 그들 중 일부는 마른침을 바닥에 뱉기도 했다.
3열 횡대의 대열로 붙어 있다 보니 서로의 악취가 매우 잘 맡아졌는데, 대부분의 병사들의 제복은 땀으로 젖은 상태이기도 했다.
거기에 모기가 극성을 부려 마리 중위는 귀 주위에 맴도는 모기를 잡기 위해 손을 후려치기도 했다.
현재 접근하는 드리지아 왕국군의 진영은 전형적인 2열 횡대 전법이었는데, 이는 머스킷의 화력을 최대한 강하게 하기 위해 쓰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2열 횡대는 너무 얇아서 병사들은 뒤에 아군이 없다는 심리에 불안감을 가지기 쉬워 레기움 제국군에선 사용하지 않았고, 때문에 제국군 내에선 3열 횡대가 가장 얇은 전법이었다.
하지만 데네브는 숫자로 밀리는 이상 차라리 드리지아처럼 화력을 최대한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1열 앉아! 2, 3열 준비!”
병사들은 의외로 별말없이 데네브의 명령에 잘 따라 주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병사들은 도망치지 못할 바엔 싸우다 죽을 생각인 듯했다.
“항복할 순 없지.”
어떤 병사의 목소리가 데네브의 귀에 똑똑히 들려왔다.
“그래. 북쪽의 야만인들에게 항복하는 건 문명화된 국가의 군인으로서 자존심을 버리는 짓이야.”
그들은 많이 지쳐 있긴 해도 항복을 하려는 나약한 생각을 갖진 않았다.
“오라고. 길동무로 한 개 중대 정도는 데리고 갈 거야.”
‘마르찬 대령이 병사들을 잘 가르쳤군.’
문득 데네브는 죽은 그에게 욕했던 것이 미안해졌다.
“호오?”
배킨스 중령은 적의 대열을 보고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전투를 하자는 건가? 좋지. 부대, 평보로.”
그는 600명이 일제히 펼치는 가공할 머스킷 사격의 전율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명령을 내렸다.
“대대, 계속 앞으로 전진!”
“1열, 조준.”
레기움 제국군 병사들의 1열이 조준에 들어갔다.
“음?! 아직 100미터밖에 안 되는데?”
배킨스 중령은 적잖게 당황하고 말았다. 상식에 벗어나는 행동이었다.
“발사!”
“멍청한 놈들 이 거리에선 운이 좋지 않는 이상 아무도 안 죽어…….”
그 말이 무색하게 드리지아 1열에 있던 수십 명의 병사들이 쓰러졌다.
“억!”
배킨스 중령 또한 오른팔에 총알이 박혔다.
“마, 말도 안 돼. 이 거리에선 200명이 쏴도 많이 죽어 봐야 고작 4명뿐일 텐데!”
사실 1열에 유격병들이 섞여 있어 벌어진 현상이었다.
데네브의 부대는 연대가 해체되어 여러 보직의 병사들이 있었고, 그들 중 대다수를 1열에 세워 둔 것이었다.
거기에 마리 중위 또한 여분의 강선총을 가지고 쏘았지만, 배킨스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1열, 재장전!”
‘몇 미터에서 쏴야 안정적일까?’
데네브는 고심에 빠졌다.
너무 멀리서 쏘면 적에게 큰 타격을 주지 못할 것이고, 너무 가까이서 쏘면 적에게 둘러싸일 가능성이 있었다.
적이 좌우로 압박해 들어온다면 그의 부대는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 것이기에 그는 적당한 위치를 생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