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불사의 괴 1권(2화)
제1장 인연(因緣)(2)
“대협, 이제 반 시진 후에 의방에 도착합니다. 오시는 동안 불편하셨을 텐데, 부디 원하시는 바를 이루시길 바랍니다.”
약초꾼들의 우두머리 역을 자처하는 송철이 북궁명에게 말했다.
“자네 덕에 편히 이곳까지 왔네. 이건 얼마 안 되지만, 객잔에 가서 술이라도 한잔씩 하게.”
“어이쿠, 정말 감사합니다. 이런 것까지 챙겨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네. 자네들이 아니었으면 아마도 나와 이 아인 많은 고생을 했을 게야. 내친김에 한 가지 더 부탁해도 되겠는가?”
“네,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북궁명이 내놓은 돈에 간이라도 빼 줄 듯한 송철이다.
“사람을 미리 보내서, 이 아이가 바로 치료받을 수 있도록 연락을 취해 주게나. 아무래도 한시가 급한 듯싶어 그러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봐, 석이. 자네 먼저 의방에 가서 급한 환자가 가니 준비 좀 부탁한다고 전해 주게.”
그리고 석이를 불러 조용히 속삭였다.
“칼 찬 무림인이니, 피해 안 보게 잘 말씀드리게. 어서 가게나.”
송철은 북궁명과 함께 의방에 가는 것이 부담이 되었다. 비록 눈앞에 보이는 돈 때문에 동행을 하기로 했지만, 단순한 약초 배달이 아닌 문젯거리가 늘상 따라다니는 무림인을 데려가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래서 미리 언질을 해 두는 것이 뒤탈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니, 때마침 북궁명의 요청은 불감청 고소원(不敢請 固所願)이었다.
* * *
‘도가의방(道家醫方)’이라는 커다란 편액이 걸려 있는 문 앞으로 사람들의 행렬이 꽤 늘어서 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 누구는 아픈 어미를 업고 기다리고, 또 다른 이는 울고 있는 아이를 달래며 가슴 졸여하면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의방에서 무료로 행하는 진료를 받고자 모인 백성들이었다. 치료받고자 하는 사람이 많다 보니 긴 줄로 늘어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 고관대작이나 권문세가 사람들이라면 기다리지 않고 바로 의방 안으로 진료를 받으러 들어갔을 것이다. 신분의 차이는 환자를 진료하는 이곳에서도 절실히 나타난다.
사람들은 북궁명과 왕수강을 태운 수레가 문 앞을 지나 의방 안으로 들어가자, 그들을 부러운 듯이 쳐다보거나 원망 어린 시선들을 보내기도 했다. 아마도 저들로 인해 자신들의 순서가 뒤로 밀렸다고 생각되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빌어먹을 세상이군. 누군 진료 받으려고 하루 종일 기다리는데, 누군 오자마자 의방으로 들어가는구나. 돈 없고 권력 없는 놈은 그저 밟으면 밟는 대로, 불면 부는 대로 살아야 하는구나.”
누군가가 월동문 안으로 들어간 그들 일행을 향해 투덜거렸다.
그 소리에 북궁명이 고개를 돌렸다. 자신도 급하지 않으면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냥 두고 넘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미안하오. 지금 사경을 헤매는 이가 있어 먼저 진찰을 받아야 한다는 급한 생각에 미처 헤아리지 못했소. 이 북궁 모, 다시 한 번 사과하오. 조금만 양해를 부탁드리오.”
북궁명의 나지막하고 진중한 사과는 그곳에 있던 백성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높으신 분들이 어디 자기 같은 것을 사람 취급이나 해 주었던가. 그런데 사과라니…….
북궁명, 그는 그런 사람이다. 사람다울 줄 아는 그런 사람이다.
* * *
“북궁 대협, 어서 오십시오.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몇 해 만에 뵙는군요.”
“아니, 노 의원님이 아니십니까? 이곳에 계셨던 것입니까? 소요의방에서 나오셨다는 이야기는 듣기는 했지만, 이곳에 계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이곳저곳 떠돌다 안착한 곳이 여기더군요. 노가주님은 평안하신지요?”
“노 의원님 덕에 지금껏 정정하게 살아 계십니다. 너무 정정하셔서 오히려 불편할 지경이지요. 하하하.”
“제가 한 일이 뭐 있다고 얼굴에 금칠을 하십니까? 워낙 신체 건강하신 분이라, 제가 별로 한 것도 없습니다.”
“노 의원님께서 소요의방에 계실 때, 독에 걸리신 아버님을 치료하지 않으셨다면, 지금쯤 저희 세가가 어찌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지요.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한 독상을 치료하신 일이 별일 아니라 하신다면, 세상의 수많은 의원들이 부끄러워 얼굴도 제대로 들고 다니지 못할 듯싶습니다.”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머리 위엔 청색 두건을 두른 노소평은 어딜 보아도 학자적 느낌을 짙게 풍긴다. 소매 끝에 점점이 수놓아져 있는 붉은 핏방울이 없었다면, 그가 의원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다.
북궁명이 그를 처음 본 것은 십오 년 전이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노소평은 변함이 없는 모습이다.
‘시간이 그를 피해 가는 것인가? 아님 그가 시간을 멈춰 놓은 것인가? 어찌 십오 년 전과 비교해서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단 말인가?’
“노 의원님은 변함이 없으시군요.”
“저도 많이 변했답니다. 요즘은 여기저기 쑤시는 게, 나이가 들었다는 징후가 많이 보입니다.”
“아차, 제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이 아이 좀 봐 주시겠습니다. 사부님께 배운 요상법대로 일차 치료를 했지만, 아이가 오는 도중에 정신을 차린 것을 제외하고는 사흘 넘게 혼수상태에 빠져 있어서 걱정입니다.”
“어디 안으로 들어가 보시지요. 안에서 아이 상태를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노소평은 아이를 유심히 살폈다. 타박상의 정도와 혹시 모를 장기 출혈까지도 섬세히 관찰했다. 초기 지혈과 응급처치 덕분인지 외관상 보이는 부분은 깨끗했다.
“북궁 소협, 이 아인 오랫동안 영양 상태가 나빴기에, 우선적으로 몸의 건강을 되찾은 후에 다른 이상 여부를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한 달 정도면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할 수 있을 듯싶습니다. 아이가 깨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과도한 외상 후 정신에 혼란이 와서 그러한 듯하니, 저희 의방에서 머물며 치료받게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아, 그렇다면 제가 한 달 뒤에 찾아와도 되겠습니까? 사실 모종의 일로 급히 문파에 돌아가야 하는데, 이 아이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인편으로 연락을 드리긴 했지만, 이곳 치박에서 태산까지 수일을 요하는지라 걱정이 됩니다. 잠시 다녀올 동안 아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참, 이 아이의 이름은 왕수강입니다.”
“아무 염려 말고 다녀오십시오. 만일 안 오신다면, 제가 직접 세가를 방문하겠습니다. 물론 아이와 함께 말입니다. 아마도 그때는 진료비를 톡톡히 내셔야 할 것입니다. 이곳에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으니, 부탁드리겠습니다.”
노소평이 농담인 듯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제 도가의방에서 나오는 수익의 대부분은 치박 인근의 빈민촌으로 유입되고 있었다.
가난한 빈민촌 백성들의 노곤한 삶 속에서 의방에서 가져오는 쌀이며 의류 들은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 된 지 오래였다.
문제는 몇 해 동안 많은 도움을 주고 있지만, 그들의 삶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가령 세금을 줄여 준다거나, 나라에서 부역을 면하게 해 준다는 등의 근본적인 도움이 없는 임시방편적인 손길이 빈민들의 의존성만을 키우는 부정적 작용도 야기시켰다.
그것을 알면서도 노소평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돕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사하거나 전염병으로 사망하게 될 것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의 의방의 치료비는 비쌀 수밖에 없었고, 주된 고객도 부유층이 아니면 급한 환자들뿐이었다.
“이건 많지 않지만, 그동안 진료비로 써 주십시오. 만일 부족하다면 그때 따로 사례 드리겠습니다.”
북궁명은 소매에서 어음인 비전을 꺼내 주었다.
비전은 나라에서 발행하는 것으로, 어느 전장에서나 환급이 가능한 어음이었다. 당시 비단길이 열리고 수많은 해외 문물이 교류되면서 화폐제도가 크게 발전하여 개원통보뿐만 아니라 어음인 비전, 그리고 상인들의 조합인 행이 나타나기도 하였으니, 당 대의 발전은 중국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황금기였다.
“오! 오백 냥짜리 비전이라니……. 정말 감사합니다, 북궁 소협. 이 돈이면 한 달 진료비로는 넘치는 액수입니다.”
산동성에서 북궁세가는 그 위치가 남다르다. 남으로는 서주와 양주를, 서쪽으로는 수도인 장안(지금의 서안)으로 통하는 산동성의 패자이다. 그런만큼 많은 거래들이 이루어졌다.
그것을 관리하는 것은 관청이지만, 관청조차도 눈치를 봐야 할 정도로 북궁세가의 위세는 무섭다. 산동성 교역의 오 할 가까이가 음으로 양으로 북궁세가 아래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특히 당 대에 들어와 재배하기 시작한 차(茶)는 그 수요의 증가로 인해 각 성의 주요 수입원이 되고 있었는데, 이곳 산동성에서는 북궁세가가 독점적으로 운영하고 있었으니, 어느 정도 부가 축적되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그리고 북궁명은 그런 북궁세가의 둘째 아들이다.
북궁명은 노 의원이 하는 일을 잘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지인 중에 하나이다.
노소평은 소요의방 시절에도 무료로 빈민가 백성들을 치료하고, 사비를 털어 그들에게 먹거리를 제공했었다. 게다가 아버지를 치료하면서 받은 많은 금액 역시 그렇게 써 버렸다.
그러했기에 그는 두말하지 않고 오백 냥이나 되는 거금을 선뜻 내밀 수 있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전 한 달 뒤에 찾아오겠습니다. 만일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긴다면, 인편으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뒤에 밀린 환자들이 많아서, 더는 배웅하지 않겠습니다.”
북궁명은 떠나기에 앞서 다시 한 번 누워 있는 왕수강을 돌아보았다. 못 먹어서 가녀린 팔과 다리, 광대뼈가 보일 정도로 홀쭉한 볼, 그리고 두 눈은 감겨 있었다.
순간 알 수 없는 막연한 답답함이 가슴을 채웠다.
‘보면 볼수록 눈길이 가는 아이다. 긴 인연의 끈이 닿은 것도, 다 저 아이의 운이겠지. 꼭 건강하게 살아서 보자꾸나. 수강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