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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의 괴 1권(5화)
제1장 인연(因緣)(5)


혼자 남겨진 왕수강은 붓으로 글을 써 본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신이 났다.
서둘러 물을 그릇에 담아 와서는 붓을 들고 좀 전에 배웠던 파지법을 생각해 내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따라 해 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다. 붓을 수직으로 세우려고 노력하지만, 글을 조금 쓰다 보면 어느새 붓은 좌로 우로 누워 있기 일쑤이고, 붓을 잡는 손에 너무 많은 힘이 들어가 손끝과 손목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휴, 세상에는 쉬운 것이 하나도 없구나. 그냥 단순히 붓을 잡고 글을 쓰는 것인데도 이리 힘들다니…….”
예전 노가장에서 부모와 함께 소작하던 시절에는 앉아서 책만 읽던 노가장 손자들이 힘들다고 할 때마다, ‘지들이 산에 가서 내 몸만 한 나무를 해 봤어, 아님 먹을 것이 없어서 들이며 강이며 쏘다니면서 먹을 것을 구해 봤어. 기껏해야 앉아서 책이나 읽는 주제에 힘들다고 저리 생떼를 쓰다니.’라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자신이 붓을 쥐고 글을 써 보니, 이 또한 곤역이 아닐 수 없었다.
역시 그 입장이 되어 봐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마다 처해진 입장이 다르고, 또 그것을 헤쳐 나가는 방식이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은, 아마도 왕수강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타인과 나를 구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다른 의미로 온전한 자신을 찾게 되는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언제 어떻게 그러한 기준들이 발현되는가 하는 것이다.

주어진 시간이 많다는 건 무엇에 집중하고 자신의 역량을 키워 나가는데 좋은 조건이 된다. 그런 점에서 이곳 도가의방에서 보낸 지난 한 달은 왕수강으로 하여금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커다란 배움의 시간들이었다.
아직 천자문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했지만, 문맹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신에게 또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 그 첫 번째 배움이고, 세상에서 자신과 부모밖에 모르던 철없던 아이가 이젠 타인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 두 번째 배움이다.
마지막 세 번째 배움은 어미와의 약속을 어떻게 하면 지켜 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작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며칠 전 당의문은 왕수강에게 물었다.
“왕 소제, 자넨 앞으로 어떻게 지낼 생각인가? 자넨 나이도 어린 데다가, 세상에 피붙이 하나 없는 입장이고, 또 그런 자네를 도와줄 수 있는 분도 없지 않은가? 물론 북궁 소협이 계시겠지만, 언제까지나 자네를 책임질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후, 자꾸 그 생각을 하면 한숨만 지어져요. 어미가 죽을 때, 제게 오래 건강하게 살라고 말했습니다. 전 어미의 소원을 들어 드리고 싶어요.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음……. 오래 건강하게 산다라……. 일단 오래 건강하게 살려면 해야 할 것들이 몇 있네. 첫 번째로 잘 먹어야 한다는 것이지. 얼마 전의 자네처럼 굶어 기력이 쇠약해진다면, 솔직히 오래 살긴 힘들지 않나 싶네. 두 번째로 병에 걸리지 않아야 한다네.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찌 병에 걸리지 않겠는가? 하지만 병에 걸리더라도 그것을 치료받을 수 있는 재력이 있거나, 아니면 스스로 치료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겠지. 셋째로 몸만 건강하다고 결코 오래 살 수는 없다네. 끊임없이 자신과 주변을 살피고, 자신을 수양해야만 비로소 몸과 마음 모두가 건강해질 수 있다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세상이 험악하니 자신의 몸을 지킬 정도의 무예를 가지고 있는 것 역시도 좋은 방편이 되겠지.”
“…….”
아무런 말이 없는 왕수강을 바라보며 당의문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내가 보기엔, 자네의 조건에 딱 맞는 직업이 있다네. 의원이 돼 보는 것은 어떤가?”
“의원이오?”
“그렇지. 의원이 되면 일단 병들어 사망할 가능성은 많이 줄지. 게다가 다른 이를 치료하여 돈을 벌 수도 있으니, 이 또한 금상첨화이고. 그 돈으로 굶지 않고 살 수도 있으니,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 나중에 자네가 연이 닿아서 무예를 익힌다면, 아까 내가 말한 네 가지 모두를 충족시킬 수 있네. 어떤가? 이보다 좋은 직업이 없을 것 같네만.”
“아! 하지만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의원이 될 수 있겠습니까? 전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걸요. 의원이 되려면 돈이 많이 들잖아요.”
“음. 물론 그렇긴 하지만, 북궁 소협께 부탁을 드린다면 그 정도 편의는 보아줄 것으로 생각된다네. 며칠 뒤 북궁 소협께서 오신다면, 어차피 자네를 세가로 데려가던가, 아니면 다른 곳에 맡겨야 하는데, 필시 자네에게 물어보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네. 그때 자네 의견을 말해 본다면, 아마도 북궁 소협이 자넬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겠는가.”
“제게 새로운 삶을 주신 은인께 또 다른 부탁을 드리라니……. 아무리 못 배운 저라도 염치없는 짓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부탁을 드리겠습니까?”
당의문은 가끔 왕수강의 말을 들으며 놀랄 때가 있다. 학식의 깊이가 느껴지진 않지만, 정중하고 예의 바른 태도는 왕수강이 몰락한 명문가 출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그래서 더욱 마음에 드는 왕수강이었다.
“이렇게 생각해 보게. 지금은 소형제가 북궁 소협의 도움이 부담이 되어 거절하려 하지만, 후일 자네가 뛰어난 의원이 되어서 그 은혜에 보답할 수 있다면, 이는 더 좋은 결과가 되지 않겠는가?”
“아!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해 보지 못했어요.”
왕수강은 마음이 흔들렸다. 마냥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닌, 자신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북궁 소협이 오면, 나도 거들어 보겠네. 그러니 잘 생각해 보도록 하게.”
“네. 곰곰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잘하면 어미의 소원을 들어 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목표가 조금씩 정해진다. 비록 스스로 생각해서 정한 것은 아니지만, 아직 어린 왕수강으로서는 그 이상을 생각할 능력이 되지 못하였다.
먹고산다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이다. 그 힘든 일에 작은 가능성을 보았으니, 이제 달려가는 일만 남은 것이다.

기다리던 북궁명의 소식을 들은 것은 해가 고즈넉이 저물어 가는 저녁 무렵이었다.
세가 내에 긴히 처리할 일이 생겨 한 달 정도나 뒤에 오게 되었다는 인편을 받은 것이다.
또 그 한 달간 왕수강을 부탁한다고 하면서 비전을 보내왔다고 하였다.
이제나저제나하며 기다리던 사람이 못 온다는 소식은 왕수강에게 작은 실망을 안겨 주었다. 그가 온다면 우선적으로 감사를 하고,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도움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 더 이상 은혜를 받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한 다짐은, 당의문과의 대화를 통해 많이 바뀌어 있었다. 의원이 되어서 자신이 받은 것 이상으로 보답하고 싶었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은 욕구도 생겼다.
그래서 일각이 여삼추처럼 느껴졌었는지도 모르겠다.
북궁명의 소식은 왕수강의 또 다른 희망이 되어 버렸다.



제2장 교차(交差)(1)


“후, 이 일을 어찌 한단 말인가? 휘아는 이미 성혼을 하였거늘, 어찌 그런 혼담이 들어왔단 말인가?”
긴 한숨을 내쉬는 이는 산동성의 패자로 군림하고 있는 북궁세가의 가주인 북궁철우(北宮鐵旴)였다.
장비 익덕(張飛 翼德)의 모습이 이러했을까? 칠 척이 넘어 보이는 큰 키와 당당한 체구를 가진 북궁철우는 그 성격이 불과 같다 하여 많은 이들이 열화태세(熱火颱勢)라는 별칭으로 부르고 있었다.
머리로 걱정하기보다는 몸으로 먼저 움직이길 좋아하는 그가 이렇듯 고민하는 것은, 다름이 아닌 이번에 들어온 혼담 때문이다. 자신의 위치에서도 감히 거절할 수 없는 혼담이기에 더욱 그를 한숨짓게 만들었다.
“하필이면 휘아가 장안에서 문성 공주 일행과 마주치다니. 휘 녀석, 그냥 지나치면 되었을 것을 나서서 일을 만들다니. 장차 며늘아기의 얼굴을 어찌 본단 말인가?”
석 달 전 북궁철우의 장남인 북궁휘(北宮輝)가 세가의 상단을 이끌고 장안으로 갔을 때, 우연히 유람을 나온 문성 공주(文晟公主) 일행과 동행하게 되었다.
북궁휘는 문성 공주와 같은 황족과 안면을 터 둔다는 의미에서, 문성 공주는 세상에서 쉽게 볼 수 없을 정도로 수려한 북궁휘에 대한 호감으로 서로 동행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북궁휘가 이미 성혼을 한 상태였던 것이다.
두 사람이 장안에서 잠시 보낸 이틀 내내 문성 공주는 끊임없이 북궁휘의 주변을 맴돌았고, 이것이 사단이 되어 혼담으로 돌아올 줄은 북궁휘도 미처 몰랐었다.
“태산파에 간 명이는 아직 안 돌아온 게냐?”
“대형, 아직 명이가 오려면 며칠 더 걸릴 것입니다. 그리고 당사자가 휘이지 명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어찌 내 그것을 모르겠는가? 하지만 휘는 이미 성혼을 한 몸이니, 명이에게 혼담을 주선하는 방법 말고는 생각나는 것이 없으니, 답답한 지경일세.”
자신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사량객(思良客) 마인풍(馬仁風)에게 하소연하듯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