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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의 괴 1권(6화)
제2장 교차(交差)(2)


“내 듣기로는 문성 공주의 성정이 보통 오만한 것이 아니라 들었네. 황상의 총애를 받아 결코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거나 양보를 한 적이 없다 하니, 더욱 걱정이 되네. 게다가 공주를 며늘아기로 받아들인다면, 공연히 관부의 관리 감독만 강화될 것이네. 혼인 이후 보인 역대 공주들의 품행이 그리 방정하지 않았으니, 이것 역시 걱정이 아닐 수 없다네.”
“형님, 저도 들은 바 있습니다. 전대 공주께서도 천사백 호의 봉읍을 하사받아 공주부(公主府)를 세운 이후, 향락과 사치를 일삼았을 뿐만 아니라, 부마가 되신 두봉공(杜奉公)께서도 평생을 세가가 아닌 공주부에서 사셨다고 들었습니다. 만일 휘아가 문성 공주와 성혼하게 된다면, 저희는 세가를 이어야 할 후계자를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 혼담을 없었던 일로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쉽지 않네. 만일 혼담이 파기된다면, 그 후폭풍을 어찌 감당하려 하는가? 우리가 비록 산동성에서는 알아주는 명문이라 하나, 전 중원에서 살펴보자면 그리 큰 세력은 아니라네. 게다가 이곳 산동에는 우리를 대신할 세도가들이 얼마든지 있다네. 그리고 혼담을 파기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변명거리가 있어야 하는데, 휘아의 기혼 사실은 이미 공주가 알고 있는 부분이어서, 그다지 큰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네.”
“후, 한 달 이내에 문성 공주 일행이 저희 세가에 당도한다는 인편을 오늘 받았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조치를 취하셔야 합니다.”
“성격도 몹시 급한 공주시네. 장안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얼마인데, 한 달 안에 오시겠다니. 일단 명이가 돌아오는 대로 사정을 이야기해 보세. 명이라면 아마도 좋은 수를 생각해 내지 않겠는가?”
“그러길 바라야겠습니다. 다정유사라는 이름에 걸맞은 녀석이니, 뭐래도 수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일단 저도 다른 방도를 알아보겠습니다. 형님께서도 주위 분들께 도움을 청해 두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미 여러 군데 손을 써 두긴 했네. 하지만 신통치 않네. 오히려 걱정만 늘어 가니…… 허허.”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하질 않습니까? 반드시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후우……. 나는 연이에게나 가 보려 하네. 자네도 그만 나가 보게나.”
하나뿐인 딸 북궁연(北宮戀)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북궁철우이다.
그런 북궁철우의 또 다른 별명은 팔.불.출이다. 딸에 대한 지극한 애정은 일찍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자신이 세가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동안, 아내는 세가의 안주인으로서 아이들의 어미로서, 그리고 한 지아비의 아내로서 그 위치를 온전히 지켜 주었다. 그랬기에 오늘날의 북궁세가와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독상을 당해 혼수상태에 있었을 때, 아내는 그 모든 것을 혼자 짊어지고 세가를 이끌었다.
그 당시 연이를 임신한 상태이기도 했는데, 과도한 업무와 남편에 대한 걱정으로 하루하루 보내던 아내는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가 침상에서 일어섰을 때 처음 보았던 것은 아내의 죽음이었고, 그리고 강보에 싸여 있는 북궁연이었다. 연(戀)이라 이름 지은 것도 아내를 잊지 않겠다는 그만의 각오였다. 그에게 있어 북궁연은 딸이자 아내의 분신인 것이다.
자라면서 아내를 쏙 닮아 가는 북궁연은 대범하고 올바른 품성을 지니기도 해, 북궁철우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북궁연이 남아로 태어났다면, 세상을 움켜쥐었을 만한 대기(大器)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형님, 이 다음에 어떻게 연이를 시집보내시겠습니까?”
쓴웃음을 지으며 마인풍이 말했다.
“못 보내네, 아니 안 보내네. 어디 우리 연이를 넘보는 녀석이 있다면, 내 쫓아가서 다시는 피죽도 얻어먹지 못하도록 만들고야 말겠네.”
“평생을 그리 끼고 사실 생각이십니까? 연이도 좋은 사람을 만나야죠.”
“…….”
“으음……. 자네 안 나가 보나? 할 일이 많은 것 같던데.”
“하하! 다녀오겠습니다. 덕분에 걱정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역시 연이가 보배입니다.”
“그야 당연한 말 아니겠는가? 우리 연이는 누가 뭐래도 최고이네. 그 예쁜 눈동자하며, 날랜 콧등하며, 오뚝하게 솟아오른 코하며, 그린 것 같은 입술하며……. 어디 그뿐인가…….”
“형님, 저 그만 가 보겠습니다. 나머진 나중에 듣겠습니다.”
“아직 할 말이 많은데, 벌써 가려고 하나. 좀 더 듣고 가지.”
마인풍의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연이 이야기만 나오면 이야기를 멈출 줄 모르는 북궁철우는 아마도 이 시대 최고의 팔불출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 * *

긴 머리를 한 갈래로 질끈 묶은 검은 무복 차림의 소녀가 수많은 혈도가 표시되어 있는 목각 인형을 향해 천천히 도(刀)를 들었다.
수수한 차림새와는 달리 도를 들고 있는 소녀의 모습은 화려한 미사여구가 절로 생각날 정도로 아름다웠다. 짙고 간결한 눈썹하며, 흑백이 또렷한 눈과 석공이 정성 들여 다듬어 놓은 듯한 높고 오뚝한 코, 붉은 석류빛 색깔을 감추기라도 하듯 입술은 정갈하게 수놓은 그림처럼 보였다.
그런 그녀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나왔다.
“휴! 사람이 뜻을 세워 그것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 이리 어려울 줄 미처 몰랐구나. 비록 여인의 몸으로 태어났으나, 내가 가진 꿈과 노력은 두 오라버니에 비해 작지 않다고 생각되는데, 어찌 아버님은 날 이 새장 속에서 묶어 두려 하시는가. 세가를 나가 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느끼고 싶었건만, 내 뜻을 정녕 모르신다 말인가.”
큰 오라버니인 북궁휘는 세가의 희망이라는 표현에 어울릴 정도로 그 무예와 상재가 출중하다. 북궁휘가 태어나기 전부터 세가에서는 영약을 준비하고, 대대로 내려온 기예를 체계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게다가 태어난 북궁휘의 자질은 인세에 보기 드문 것이었다. 관옥 같은 외모에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반사 신경을 타고난데다, 여기에 본인의 노력만 깃든다면 소위 영웅의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도 남음이었다.
모두의 바람 때문일까. 북궁휘는 자라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이어지는 고된 훈련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는 것 이외에도, 밤에는 세가의 후계자로서 배워야 할 상술과 지리, 사예(四藝)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공부를 하였다.
그런 북궁휘의 꿈은 세가와 함께한다.
하지만 북궁휘의 꿈속에는 북궁연 자신이 들어 있지 않았다. 그것이 북궁연을 좌절케 하는 이유였다.
둘째 오라버니인 북궁명은 큰오라버니의 위명 탓인지, 무예보다는 글을 읽고 익히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아버지 북궁철우의 강요에 못 이겨 세가의 무예를 배우고, 그것을 검증받아야 했지만, 타고난 무재보다는 문재가 더 뛰어난 북궁명이었다.
그래서 북궁철우는 그가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북궁명의 관심은 오직 학문뿐이지, 결코 관리가 되어 권력의 중심에 서는 것이 아니었다.
이에 아쉬움을 뒤로한 북궁철우는 지혜로운 둘째 아들에게 도움이 될 스승을 모시고자 했는데, 북궁명 스스로 태산파에 들어가 무예와 선인 들의 도(道)를 배우길 원했다.
무엇 하나 자신의 뜻대로 순응하지 않는 둘째 아들을 보게 된 북궁철우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가 더없이 그리워졌다. 만일 아내가 살아 있었다면, 자신보다는 좀 더 나은 방법으로 둘째 아들을 설득했을 것이다.
북궁휘가 저리 차가운 성격을 가진 것도, 북궁명이 세가에서 벗어나 방황하는 것도, 모두 자신의 탓만 같았다.
부드럽지만 올곧은 성격을 가진 북궁명의 꿈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는 데 있었다. 그 꿈속에는 하나뿐인 여동생 북궁연이 들어갈 틈이 없었다.
두 오라버니는 그 꿈을 좇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데, 자신만 정체된 일상을 보내는 것이 불만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의 추억에 사로잡힌 자신의 아버지는 마치 자신을 어머니인 양 대했다. 어릴 때는 가끔 그녀를 보고 ‘아매(娥妹), 보고 싶소.’라는 말을 하곤 했었다.
처음에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으나, 점점 도를 더해 가는 아버지의 관심과 사랑은 그녀를 숨 막히게 하였다.
그래서 세가를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꿈꾸기 시작하였으나,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있지만, 아직은 시기가 일렀다. 타인에게 시집을 가서 그와 함께 세상을 질타하는 것이 그 유일한 탈출구였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우선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남편감을 찾는 것이 그 하나요, 또 남편이 될 사람의 성정이나 뜻이 자신과 일치해야 할 것이고, 스스로 독립된 생활을 영유할 수 있을 정도의 생활 기반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이 여자라는 태생적 한계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그 틀을 과감하게 깨고 싶은 것이 간절한 소망이지만,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어찌 보면 불가능할 수도 있는 이야기이다. 무림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존재하지만, 무림 역시도 세상의 일부였다. 그래서 여성 고수로 이름을 떨치는 이는 극히 드물었고, 대부분의 무림 세가 여식들은 자신의 인생을 남편이 될 사람의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고 있었다.

* * *

“가주님을 뵙습니다.”
큰 대례를 올리는 소혜였다. 소혜는 북궁연과 어릴 적부터 함께한 동무이자 시녀였다. 어미를 일찍 여읜 북궁연을 위해 북궁철우가 또래 시녀를 들인 것이다.
“그래, 연이는 안에 있느냐?”
“아가씨께서는 지금 연무장에 계시옵니다.”
‘연무장에? 역시 연이구나. 그리 무예를 좋아하다니. 내가 왔다고 전해 주려무나. 아니다. 내 직접 찾아가겠다. 너는 소란 피우지 말고 네 일을 하거라.”
“네. 알겠습니다.”
조신하게 금기서화(琴棋書畵)를 배우고, 후일 좋은 혼처를 잡아 결혼하길 바랐던 북궁철우는 그의 딸이 간절히 원했던 세가의 무공을 익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북궁연의 단식으로 인해 단 하루 만에 그 결심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후 북궁연을 가르쳐 본 북궁철우는 놀람의 연속이었다. 세가 역사상 몇 손가락 안에 든다는 자신의 큰아들보다도 오히려 그 자질이 출중한 듯했기 때문이다. 문일지십(聞一知十)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총명하고, 무공을 익히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신체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공의 고하는 일반적으로 내가심공과 외적인 힘, 즉 근력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북궁철우였다. 물론 상황에 따른 임기응변 역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겠지만, 무공의 근간은 역시 내공과 근력이었다.
이러한 견해를 바탕으로 할 때 여성은 무공을 익히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특히 세가의 무공은 강맹함을 장점으로 하기에 더욱 그러했다. 압도적인 내력과 신체적 우위를 살린 무공을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내력을 키우는 데 중점을 두며, 근력 강화를 위한 체계적인 학습이 필수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북궁연의 신체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힘의 전달 과정에서 나타나는 근육의 조직 분포가 매우 뛰어났다. 마치 무거운 돌을 나를 때 일반인들이 순수한 자신의 힘으로 들어 올린다면, 북궁연은 수많은 도르래를 사용하여 드는 것처럼 그 조직의 치밀함이 놀라울 정도였다.
게다가 북궁연의 무공에 대한 열정은 세가 내에서도 알아줄 정도였으니, 무공을 익혀 나가는 진도가 빠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연무장에 들어선 북궁철우는 아주 느리게 도를 움직이고 있는 북궁연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힌 상태로, 보는 이가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목각 인형의 주요 혈도들을 가격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지금 북궁연이 수련하고 있는 천왕도법은 세가 내에서도 몇몇만이 익히고 있는 절예였다.
과거 북궁세가를 처음 개파한 초대 가주인 북궁열(北宮悅)은 독실한 불교 신자로 수많은 경전을 공부하기 위해 범어를 공부하고 멀리 떨어진 서역으로 수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선지자인 간다르바를 스승으로 모시고, 불교의 교리와 무예를 전수받을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과 밀적금강(密迹金剛)이라 불리는 무공은 지금의 북궁세가의 근간을 이루는 심공이 되었다.
원래 이 두 무공은 금강문을 지키는 금강역사의 모습을 본 따 만든 것으로, 나라연금강은 다소 과격한 움직임을 통해 신체의 극대화를 이루어, 자연스러운 호흡과 그를 통한 기의 흡수를 목표로 하고, 밀적금강은 이러한 호흡을 통해 들어온 기를 근육과 혈도 속에 아우르는 형식을 담고 있다. 나라연금강이 적극적인 움직임을 요구하는 공격적 성향을 보인다면, 밀적금강은 그 움직임이 끝났을 때 자신을 보호하는 방어적 성향을 가진다.
그래서 북궁세가의 무공은 처음보다 후반으로 갈수록 위력이 배가되어진다. 움직임이 격렬할수록 외부의 많은 기들이 흡입되어 체내에 내공과 융합하여, 잠시 숨을 돌릴 틈에 근육과 혈도 속으로 녹아들어 가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장점이 있는 반면 단점도 있으니, 무공을 받쳐 줄 신체적 조건, 즉 근육과 혈관 조직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 아니면 그 위력을 올바로 나타내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무공을 익힌 십중팔구는 혈도와 근육 속에 녹아드는 내력을 이기지 못해 반신불수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보안하기 위해 수대를 걸쳐 행해진 것이 태어난 아이를 벌모세수시켜 무공을 익히기 가장 좋은 상태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은 많은 영약과 내력이 높은 세가 무인의 희생을 강요하기 때문에, 한 세대에 기껏해야 한두 명 정도만이 그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만일 이러한 조건이 없었다면 아마도 무림에서 북궁세가의 위치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