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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의 괴 1권(7화)
제2장 교차(交差)(3)


나라연금강과 밀적금강이라는 초석 위에 세워진 건물이 천왕도법이다. 북궁열의 스승인 간다르바는 그와의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불법을 수호한다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본떠 만든 작은 청동상을 선물하였다. 이 청동상은 태엽을 감아 움직일 수 있도록 고안되었는데, 사천왕상마다 그 움직임이 매번 달라졌다.
중원으로 돌아와 문파를 이루고 말년에 사천왕상을 바라보던 북궁열은 작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천왕도법이다. 각 방위를 지키는 사천왕상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채 모습을 드러내었다. 청동상에 나타난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은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비파를 든 모습인데, 움직일 때마다 작은 파동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은 검은 얼굴에 한 손에는 창과 다른 손에는 금강저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 움직임이 다른 사천왕상보다 빠르며 표홀하였다.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은 한 손에는 용을, 한 손에는 여의주를 잡은 형태로 마주 잡은 두 귀물들을 합하고 떨어뜨리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으며,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은 한 손에 커다란 칼을 잡고 사방으로 휘두르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조금씩 그 각도가 변화하고 있는 형태였다.
이러한 사천왕상 특징은 천왕도법 속에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파(波)와 전(電)과 인(引), 산(散), 그리고 참(斬)이라는 다섯 가지 오의를 내재한 천왕도법은 후대에 걸치면서 발전을 거듭한 결과, 현재에는 사천왕상이 원래 가지고 있던 파사와 광폭함을 내재한 천왕십이도법으로 완성된 상태였다.

북궁연의 수련 모습을 살펴보던 북궁철우는 안타까움에 사로잡혔다. 북궁휘와는 달리 어릴 적 벌모세수를 받지 못한 북궁연은 천왕도법의 입문 과정은 벗어났으나, 내력의 뒷받침이 없어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 벌모세수만 받을 수 있었다면, 어쩌면 세가의 최고 고수는 연이가 되었을 텐데, 정말 아쉽구나. 지금이라도 내력을 늘릴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아마도 연이 이 녀석이 제일 좋아하겠지.’
수련을 마친 북궁연은 숨을 고르며 밀적금강의 운용법을 따라 하고 있었다.
내력이 온몸 구석구석까지 스며드는 것을 확인한 북궁연은 조용히 눈을 떴다.
“연아, 이제 수련을 마친 게냐?”
“아! 아버님 오셨어요? 오신 것도 모르고 있었네요.”
“그렇게 수련에 푹 빠져 있다니, 정말 대책이 안 서는구나. 이제 시집갈 나이가 다 되어 가는데, 망아지마냥 매일 무공 수련만 하다니……. 예쁜 얼굴 다 망가질까 걱정이구나.”
말은 이렇게 해도 북궁철우의 얼굴에는 기특함이 어려 있었다.
“아버님도…… 아직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시면, 단장을 하고 다시 나오겠습니다.”
맑고 낭랑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무뚝뚝한 음성은 여성스럽기보다 중성적인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에이, 좀 부드럽게 말을 하면 안 되겠느냐? 사내아이도 아니고, 어찌 말투가 그러하느냐.”
“…….”
가만히 자신을 쳐다보는 북궁연의 시선이 민망했다.
“으음. 내 나가서 기다리고 있으마. 조금 후에 보자꾸나.”
“네, 준비하고 나가겠습니다.”
여전히 무뚝뚝한 대답이다.
언제쯤 여성다운 모습을 보게 될지 걱정인 북궁철우이다.

* * *

무복을 벗고 화려한 궁장 차림의 북궁연의 자태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아가씨, 정말 예쁘세요. 칙칙한 무복은 벗어 버리고, 이리 다니시면 얼마나 좋아요.”
“소혜야, 쓸데없는 말은 하지도 마라. 이 옷은 너무 불편하다. 활동하는 데도 제약이 심하고, 무엇보다도 부담이 돼서 입기가 싫다. 아버님이 오셔서 어쩔 수 없이 입는 다만……. 후…… 정말 입기 싫단다.”
“연 아가씨, 다른 댁 아가씨들은 얼마나 멋을 내고 다니시는지 알아요? 어떻게 하면 예뻐 보일까 하고 하루에도 수없이 단장을 하고 나오기 일쑤인데, 도대체 이렇게 예쁜 분이 꾸미지 않는 것은 죄악이에요, 죄악.”
“소혜, 너. 말이 많아졌구나. 가서 마실 차나 좀 내오거라. 난 아버님께 가 볼 테니.”
“치장하는 이야기만 나오면 꼭 말을 돌리시더라. 그렇게 싫으세요? 알았다고요. 갈게요. 그리 눈썹을 찌푸리시면 제가 뭐 겁낼 줄 알고요.”
북궁연은 쉴 새 없이 투덜거리는 소혜를 바라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소혜는 누구보다도 자신을 아끼고 염려스러워했다. 하루 종일 무공 수련에만 빠져 있는 자신을 걱정하는 한편, 꽃다운 나이에 연무장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상전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넓은 세상을 꿈꾸지, 이 좁은 치박으로 나가서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만큼은 삼가하고 싶었다.

정원에는 기이한 석회암들이 서로의 자태를 뽐내듯 연못을 중심으로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다. 수련 한 송이가 수줍어하는 듯 그 꽃봉오리를 함초롬히 다물고, 연못 위의 긴 그림자는 물결에 따라 흔들렸다.
“이제 오는 것이냐. 기다리느라 아비 목이 빠지겠구나. 그나저나 이제 정말 시집을 가도 되겠구나. 이리 예쁘다니.”
최근 북궁연을 볼 때마다 반복되는 말이었다.
북궁연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
‘또 어머니를 생각하셨습니까? 아버지 이제 그만 놓아주실 때도 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게 그리우신 것일까?
한편으로는 그런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어머니가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후일 나에게도 저런 사람이 생길까? 인과 연이 맞닿은 사람이 아버지와 같이 나를 아껴 줄 것인가?’
반복되는 물음을 날려 버리기라도 하듯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같은 말도 반복이 되면 오히려 칭찬이 아닌 놀림으로 알아듣습니다. 너무 과찬하지 말아 주세요.”
“아니, 놀림이 아니라 진심을 말한 것이다. 어찌 내가 널 놀리겠느냐?”
당황해하는 북궁철우를 보며 북궁연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일로 찾아오신 것이에요? 제가 듣기로 세가에 중요한 문제가 생겼다고 들었는데…….”
“음, 너도 들었느냐?”
“자세히는 모르옵니다. 단지 중요한 문제가 생겼다고만 들었습니다.”
“휴, 넌 알 것 없단다. 별일 아니란다.”
“별일이 아닌 것 같지 않사옵니다. 아버님의 안색이 그리 편해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다. 요즘 잠시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 것뿐이니, 걱정 말거라.”
항상 그래 왔다. 세가 내의 문제가 생기면 언제나 그녀는 뒷전이 된다. 물론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는 하지만, 자신이 한 사람으로서 온전히 대접받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버님, 제가 감히 한 말씀 올리려 합니다.”
딸아이의 기색이 심상치 않다. 몰려오는 걱정의 구름이 보이는 것 같다.
일단 피하는 것이 옳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아비가 조금 피곤하구나. 나중에 들었으면 하는데, 어떠하느냐?”
순간 화가 나는 것보다 서운함이 먼저 다가왔다. 아버지에게 자신은 그냥 잘 꾸며진 인형일 뿐인 것인가?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해야 한단 말인가?
“그리하겠습니다.”
갑작스런 침묵이 둘 사이를 지나간다.

* * *

다그닥 다그닥. 새벽을 일깨우는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진다. 어슴푸레한 어둠을 뚫고 한 인영이 쉴 새 없이 말을 달리고 있었다.
‘무슨 일로 급전을 띄우셨단 말인가?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제 자세한 내용도 없이 세가에 큰일이 생겼으니 최대한 빨리 돌아오라는 전서를 받자마자 사문의 허락을 받고 새벽을 달려가고 있지만, 빠르게 질주하는 말이 왜 이리 늦어 보이는지 마음이 급하기만 하였다.
불과 한 달 전, 문파의 반도를 처리하러 나섰다가 헛걸음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왕수강으로 인해 문파 복귀가 늦춰지면서 사문에 걱정 아닌 걱정을 끼쳤던 북궁명이었다.
또다시 사문을 떠나는 북궁명의 발걸음을 잡는 것은 사매인 적희영(赤凞瑛)의 몇 마디 말이었다.

“사형. 가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들었어요.”
“음, 급한 전갈이 와서 서둘러 가 봐야 할 듯하구나. 뭐, 아주 큰일은 아닐 것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네…….”
“…….”
우물쭈물 거리는 적희영의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었다. 언제나 당당하고 밝은 모습으로 그를 대하던 그녀가 오늘따라 유난히 이상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 무슨 할 이야기라도 있는 것이냐?”
“아니에요. 잘 다녀오세요.”
“그럼 다녀올 테니, 너도 건강히 지내거라.”
“네, 사형.”
북궁명이 말에 올라타려고 할 때였다.
“사형, 저도 함께 가면 안 될까요?”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무림의 여협이라지만, 남자를 따라 그 집에 간다함은 모양새가 보기 좋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 대상이 유학적 사고로 점철되어진 북궁명이라면 처음부터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 아무리 너와 내가 친혈육 같은 사형제지간이지만, 외간 남자와 동행을 하여 그 집에 가게 된다면, 어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사형, 전…….”
“쓸데없는 소리 말거라. 아직 혼처도 정해지기 전에 사특한 소문에 휩쓸린다면, 네게 좋을 것이 없다. 나는 서둘러 가 봐야 하니, 나머지 이야긴 다녀와서 하자꾸나.”
늘 한결같은 모습이다. 자신의 존재는 그에게 언제나 여동생 이상은 아니었다.
타인을 대할 때는 한없이 부드럽지만, 자신에게는 너무나 엄격한 사람. 주변 사람을 이해하고 도우려 하지만, 정작 자신의 고민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혼자서 속을 삭이는 사람. 다른 이를 위해 편안한 길을 놔두고 일부러 힘든 일을 자처하는 사람.
그는 그녀에게 아픔으로 다가오는 사람이었다.
함께 가자는 이 말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망설였던가. 집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좀 전 북궁명에게 언급하기 전까지, 계속 그녀를 고민 속으로 몰아넣었던 말이 아닌가?
허망하게도 자신의 고민은 북궁명에 의해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말에 올라타 서서히 사라져 가는 북궁명의 뒷모습이 애달팠다. 늘 혼자인 듯한 그의 곁을 지켜 주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자격이 없는 것인가. 사형은 날 너무 모른다.”
혼자서 중얼거리는 것이 지금의 적희영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돌아오면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