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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의 괴 1권(8화)
제2장 교차(交差)(4)


북궁명이라고 어찌 적희영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하지만 아직까지 자신에게는 여동생 같을 뿐이었다. 어쩌면 스스로를 찾아야 한다는 미명 아래, 감정을 배제한 탓도 있을 것이다. 그에게 절실한 것은 누군가와 보내는 시간이 아닌,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는 존재에 대한 성찰이었다.
그래서 가문이 아닌 태산파에 입문한 것이고, 오로지 그 한 가지만을 목표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말을 몰던 북궁명은 어느덧 치박으로 향하는 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길 왼편에서 뛰어나오는 물체를 보았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해서일까, 아니면 달리는 속도를 감당하지 못해서인지, 당황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우측으로 한 손에 쥐고 있던 고삐를 트는 한편, 오른손으론 물체의 앞쪽으로 기를 뿜었다.
히이잉.
달리던 말이 일으킨 먼지와 그가 일으킨 장풍으로 인해 북궁명의 주변은 온통 먼지로 뒤덮여 버렸다.

‘콜록콜록, 빌어먹을 어느 놈이냐.’
화개 구충(邱衝)은 지금의 사태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뿌연 먼지는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의 바지를 적신 이 불쾌한 물기는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마을에 잔치가 있었으니, 어찌 그와 분타 걸인들이 빼먹을 수 있었겠는가. 양손에 깨진 빈 그릇을 들고 각자 먹을 것을 구해서 돌아왔으니, 이는 오랜만의 포식이었다.
게다가 인심 좋은 주인댁은 냄새가 심하게 나는 화개를 다른 곳으로 쫓아 보내기 위해 홍주 몇 병을 건네주었으니, 술이라면 자다가도 깨는 구충에게는 이보다도 더 좋을 수가 없는 날이었다.
분타원들에게 달랑 한 병의 홍주를 던져두고 자기 혼자 술을 독차지하고는 가져온 음식을 안주로 거나하게 취했으니, 내공으로 취기를 날려 보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비틀비틀 거리를 걷다 보니 어느새 대로 한가운데를 걷고 있었고, 요의를 느낀 구충이 바지춤을 풀고 대로 바로 옆 나무를 향해 그 기분을 발산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말달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점점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뭐, 별일이야 있겠어. 딸꾹! 크크, 오랜만에 마신 술이라 그런지 하늘이 핑 도는군.’
이미 취기가 올라 버린 그는 하늘을 바라보며 작은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히이잉!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말의 울음소리. 느릿한 영상처럼 펼쳐지는 먼지들의 솟아오름, 그리고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말과 사람.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찰나였다. 축축한 바닥에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그대로 뒹굴었다. 그 위로 뿌연 먼지와 자신을 뛰어넘는 말의 발굽이 보였다.
아직도 허리춤은 풀려진 상태이고, 그리고 무엇인가가 자신의 몸속에서 끊임없이 배설되고 있었다. 앞도 제대로 안 보이는 뿌연 먼지 속에 화개 구충은 그렇게 웅크리고 있었다. 엉덩이를 하늘로 한 채로.

북궁명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을 달렸다. 갑자기 튀어나온 물체를 뒤로한 채 달리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치박을 향해 달렸다. 말과 그가 일으킨 먼지 속의 검은 물체를 뛰어넘으며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짐승이 갑자기 나타나다니, 잠시 다른 생각을 해서 자칫 사고로 이어질 뻔했구나. 쓸데없는 생각일랑 하지 말아야겠다.’
그는 몰랐다. 자신이 뛰어넘은 물체가 사람이고, 그가 개방 내에서도 속이 좁기로 유명한 화개 구충이라는 것을.
평소의 북궁명이라면 한 번쯤 뒤돌아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급을 요하는 세가의 일로 급히 가는 도중이었고, 뿌연 먼지 속이었지만 말이 어떤 물체를 다치게 하지 않고 뛰어넘었으니 별 이상이 없었으리라 생각하며 가던 길을 서두른 것이었다.

“으아……아……아…….”
한참을 웅크리고 있던 구충은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얼마나 볼썽사나운 모양새로 있었는지 모른다. 먼지는 가라앉은 지 오래였고, 잠시 그의 주변을 맴돌던 정신이 들어온 것은 축축하게 젖은 바지의 불쾌한 느낌과 옆에서 혀를 내밀고 자신을 바라보는 덩치 큰 개 한 마리의 시선 때문이었다.
거지 생활을 하면서 안 겪어 본 일이 없다고 자부하는 구충이었다. 문전 박대 당하는 것은 기본이요, 구정물 세례에 심한 욕설과 면박까지 수없이 들으면서 지내 온 거지 인생 이십여 년 동안, 자신이 배설한 땅바닥 위에 얼굴을 묻고 바지에 소변을 싸 보긴 처음이었다.
게다가 무공을 익히고 있는 상태가 아니던가. 아무리 취기가 올랐다 하나 이런 사태가 올 동안 방심하고 있었던 자신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리고 이런 일을 만든 원흉에 대한 원한은 자신에 대한 연민까지 더해져 점점 싹을 키워 나갔다.
옆에서 자신을 한심스런 눈빛으로 쳐다보던 개를 걷어차며 말하였다.
“개……자……식! 거…… 걸리기……만 해 봐라. 내…… 내…… 두 다리 몽…… 몽둥이를 부…… 분질러 다…… 다시는 거…… 걸을 수 없게 마…… 만들고 말 테다. 두…… 두 손 마…… 마디마디를 꺾어 다…… 다시는 마…… 말을 몰 수 없게 해 버릴 테다.”
화가 나면 말을 더듬는 이 습관이 구충에겐 또 다른 고충이었다. 얼마 동안 지속될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화가 나게 만든 원흉을 없애야 비로소 말을 더듬지 않을 것 같아 원한이 곱씹어진다.
“퉤퉤! 지…… 지랄 맞은…….”
입가에 묻은 진흙 아닌 진흙이 그의 화를 부채질했다. 이미 취기는 날아가 버리고, 대로에는 말이 지나간 흔적만이 조용히 남아 있었다. 아주 조용히.

* * *

북궁명이 약속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 기간 동안 왕수강은 이제 마음껏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되어 있었다. 당의문과 노소평의 극진한 치료와 평소 가장 원하던 글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 몸과 마음을 기쁘게 한 탓일 것이다.
게다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존재하지만, 앞으로 자신이 살아가야 할 길을 정하게 된 것도 큰 몫을 차지했다.

“허허, 북궁 소협은 약속을 어기실 분이 아닌데,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구나.”
북궁명이 왕수강을 맡기고 간 지 벌써 두 달이 훌쩍 넘어섰다. 늦어질 것이라는 마지막 인편이 온 이후로 한 달이 더 지난 것이다. 노소평이 아는 북궁명은 자신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무인 중의 무인이었다.
그런 그가 한 달 이상 소식이 없자, 입장이 곤란해지는 것이 있었다. 바로 왕수강의 거취 문제였다. 이제 거의 나은 상태의 왕수강을 이대로 의원 내에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왕수강이 차지한 환자실뿐만 아니라, 매일 그에게 들어가는 보약값은 만만치 않은 액수였다. 북궁명의 입장을 고려하여 좋은 약재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앞으로도 건강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다량의 약들을 제조하여 체계적으로 복용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깨진 그릇 같던 왕수강의 신체를 온전하게 만들기 위해서 약물 치료와 병행하고 있는 것은 호흡법이었다.
원래 의원이 되기 위한 선결 조건은 신체의 기에 민감해져야 하는 것이다. 진맥과 침술, 이 두 분야는 특히 그 조건이 강조되어진다.
이를 위해 고안된 것이 바로 호흡법이다. 비록 무림인들의 내공심법과는 거리가 있지만, 이 호흡법을 익히게 되면 자신의 기와 타인의 기를 쉽게 느낄 수 있기 때문에 환자를 치료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다.
게다가 또 다른 장점도 있으니, 환자를 치료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육체적 노동을 요구하는데, 이 호흡법을 통해 어느 정도 육체적 정신적 피로감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외에도 집중력의 향상이라던지, 정신을 맑게 하는 효능이 있었다. 물론 한두 달 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라 꾸준히 수년 이상을 해야 어느 정도 효과가 나타나지만, 지금의 왕수강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
부모를 잃고 떠돌다가 세상의 험악함을 몸소 체험한 왕수강의 정신은 일반인들과는 많은 괴리가 존재하였다.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한창 받을 시기이기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보통은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성인이 되더라도 편협하고 어딘지 모를 그늘을 가지게 되고, 그래서 범죄자가 되거나 하층민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노소평은 자신이 치료하던 수많은 빈민촌에서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접했다. 그때마다 그들에게 이 호흡법을 전수했지만, 그대로 따른 이는 백에 한둘 정도이고, 그마저도 수박 겉핥기 식으로 따라 하는 시늉만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이 가난한 이유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스스로 체념과 절망이라는 단어로 수갑을 채운 채 게으름으로 온몸의 옷을 입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소형제, 내가 오늘은 새로운 것을 자네에게 가르쳐 줄 것이네. 이것을 꾸준히 한다면, 평생 잔병치레는 하지 않을 걸세.”
“아, 정말입니까? 노 의원님.”
“그렇다네. 일단 이 호흡법은 두 가지가 존재한다네. 하나는 의원들을 위한 호흡법, 또 다른 하나는 일반인도 할 수 있는 호흡법. 우리는 전자를 양기취정법(養氣就精法)이라 부르고, 후자는 단전호흡이라 부르지. 전자가 의원을 위함이라면, 후자는 일반인들의 양생을 도모하기 위함이라네. 내 소형제에게 이리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얼마 전 당 의원에게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라네. 의원이 되고 싶다고?”
“네. 부모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의원이 되고 싶습니다.”
“음, 오래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 부모님 유언이었다고 들었네. 단순히 그것뿐이라면 사실 의원이 아닌, 무공을 배우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네. 의원은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일. 어찌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의술을 배우고 남에게 베풀겠는가? 자네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내 생각엔 의원이 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생각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네.”
왕수강이 생각하는 의원은 만수무강을 위한 지름길 정도였다. 타인에게 베푼다는 의식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최우선시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노소평이 언급하는 의원의 자세라던 지, 아님 봉사 정신으로 무장된 의원의 모습은 왕수강이 바라는 이상적인 의원은 아니었던 것이다.
병치레를 하지 않고 적당히 돈을 벌 수 있으며, 후일 일가를 이루어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직업이 의원이라 생각했었는데, 노소평은 그의 심리 상태를 꼬집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노 의원님, 전 아직 의원이란 직업이 가진 좋은 점만을 알 뿐이지, 그 안에 있는 의원의 자세나 그런 것은 잘 알지 못해요. 제가 비록 어리긴 하나, 올바른 의원이 될 수 있는 가르침을 내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당당하게 요구하는 왕수강의 모습을 본 노소평은 잠시 웃음을 머금었다.
평소 의술을 하는 자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최우선시되어야 한고 생각했다. 이는 의원이 되기 위한 필수적 기본 자질이었다.
아무리 영특하더라도 그 사람 됨됨이가 나쁘다면, 그는 의원이 되지 못한 이들보다도 더 위험했다. 거짓으로 사람의 병을 속인다던가, 아님 일부러 치료를 늦추어 자신의 이득을 극대화한다던가 하는 것은 그가 의원 생활을 하면서 수없이 봐 왔던 일이었다.
한술 더 나아가 위급을 달리는 생명 앞에서 그 가치를 돈과 권력으로 환산하는 뛰어난 의원들도 비일비재하였다.
그러니 노소평이 의원이 되겠다는 왕수강에게 한마디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만을 위한 의원이 세상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
“내 하나 예를 들어주지. 나라에는 황제 폐하께서 백성을 통치하시네. 그렇지 않은가?”
“네. 그렇사옵니다.”
“만일 황제 폐하께서 영민하시고 어진 분이시라면, 그 백성을 다스림에 인의로서 대할 것이고, 이에 백성들의 삶은 풍요롭고 윤택해질 것이네.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백성을 다스림에 자신의 사리사욕을 우선시한다면, 백성들의 삶은 피폐하고 그로 인해 죽어 나가는 이들이 수없이 많이 생길 것이네. 이와 마찬가지이네. 일반인들에게 의원이란 황제 폐하와 같은 역할을 한다네. 의원의 잘못된 생각 하나는 바로 일반 백성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릴 정도로 그 위험성이 높다네. 이해하겠는가?”
“아! 전 의원이 되면 더 이상 굶지 않아도 되고, 세상이 무서워 도망 다니지 않아도 되는 것만 생각했어요. 저를 위해 의원이 되고, 저를 위해 의술을 행하는 이가 되려 했습니다. 노 의원님, 전 자격이 없는 것인지요?”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대답했다.
“아니네. 누구나 그런 생각으로 의원을 시작하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점을 반드시 기억하고 의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네. 앞으로라도 절대 잊어선 안 된다네.”
“명심하겠습니다. 언젠가 의원이 된다면, 지금의 이 말씀 깊이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노소평은 아직 어린 왕수강의 결심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배우지 못하였다 하지만, 어찌 저리 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당의문의 이야기가 이제서야 이해가 되었다.
“잠시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빠졌군. 그래, 자네가 의원이 되겠다고 결심을 했으니, 내 소형제에게 양기취정법(養氣取精法)을 가르쳐 주겠네. 양기취정법을 배우기 전에 소형제는 인체 혈도를 먼저 알아야 한다네. 여기 혈도를 나타낸 도해가 있네. 일단 이것을 보고 각각의 명칭을 외우도록 하게나. 다 외운 이후에 내 혈도마다 역할과 기능을 가르쳐 줄 것이네.”
“정말 감사합니다. 어르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