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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의 괴 1권(9화)
제2장 교차(交差)(5)


사람의 혈도가 그려진 도해는 총 열 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 남성의 전체 모습이 그려진 그림 위에 빼곡하게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정면과 뒷면, 양 옆면이 그려진 그림이 그다음 장을 이었고, 다음 장에는 머리와 가슴, 팔다리만을 그려 둔 도해가 나타났다. 마지막 장에는 여성의 모습을 한 그림이 있었으며, 전자와 구별되는 특정 혈도들이 표시되어 있었다.
“와! 이렇게 많은 혈도들이 존재하다니…….”
왕수강은 그 숫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많은 혈도들의 명칭을 외우는 것뿐만 아니라, 그 역할까지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걱정스럽게 만들었다.
“언제 다 외우지? 게다가 모르는 글자도 이렇게 많은데…….”
모르는 글자는 일단 당의문이 돌아오면 물어보기로 했다. 먼저 하나라도 외우는 것이 우선이란 생각에 머리 부분에 표시된 혈도들부터 외우기 시작했다.
“위치와 명칭 모두를 외우라 하셨으니, 이것만 외우는 데도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다.”
인체의 혈도 중 머리 부근에 표시된 것만 삼십여 군데가 넘었다. 이는 일반적으로 무공을 익히는 데 필요한 필수적인 혈도의 수보다도 월등히 많은 것으로, 노소평이 자신의 의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더 많은 혈도들의 유용성을 파악하여 적어 놓은 것이다.
게다가 노소평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준 이 도해는 도가의방의 수련의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 아닌, 전문 의원이 된 사람들에게만 개방되는 의서이기도 했다.
실제로 당의문조차도 지금 이 도해보다 훨씬 적은 수의 혈도 명칭과 역할만을 이해하고 있었다.
인체 혈도가 그려진 도해와 씨름하고 있는 동안, 어느덧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가, 어느새 붉은 햇살이 창문을 비스듬히 밀쳐 내며 그의 얼굴에 닿았다.
“으아! 힘들다.”
기지개를 한껏 켠 왕수강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후, 시간이 이리 많이 지났을 줄이야. 그나저나 걱정이네. 이렇게 안 외어지니……. 나중에 노 의원님께서 실망하시면 어떻게 하지?”
열심히 외운다고 하지만, 요령이 부족해서인지 돌아서면 까먹고 잠시 다른 생각을 하면 얼마 전 보았던 도해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다지 총명하지 못한 머리를 타고난 왕수강에게 신체 도해는 불가해의 바다와 같았다. 익숙하지 않은 명칭과 어려운 한자, 그리고 그림의 위치와 이름을 무조건 외워야만 하는 상황은 누구에게나 곤란함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것은 뛰어난 머리를 지닌 자이거나, 그렇지 않은 이 모두에게 마찬가지일 것이다.
단지 차이가 난다면, 총명한 이는 좀 더 빠르게 외울 것이고, 조금 못 한 이는 오랜 시간에 걸쳐 외워야 한다는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불행하게도 왕수강은 후자에 속한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왕수강에게는 남보다 나은 끈기와 집념이 있다는 것이다.
“당 의원님께서 오셔야 이 글자들을 물어볼 텐데, 왜 아직도 안 오시지?”
하루 중 저녁 무렵에서야 비로소 왕수강을 보러 오는 당의문이었다. 이제 완쾌된 왕수강은 환자라기보다는 도가의방의 손님으로서의 위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처럼 당의문이 오랜 시간 함께할 수는 없었다. 이곳 도가의방에서 그가 돌봐야 할 환자 수가 그만큼 많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왕 소제, 안에 있는가?”
반가운 목소리다.
“어서 들어오세요. 당 의원님을 한참 동안 기다렸습니다.”
“나를 이리 반가워해 주니 고맙기는 한데, 무엇 때문에 기다렸는가?”
“사실 오늘 노 의원님께서 이 도해를 제게 주고 가셨습니다. 의원이 되기 위한 호흡법을 가르쳐 주신다며, 이 책에 그려진 혈도들의 위치와 명칭을 외우라 하셨는데, 너무 어려워서 당 의원님께 도움을 청하고자 했어요.”
늘 평소의 말과 존칭을 섞어 말하는 왕수강을 보는 당의문은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정말 잘되었군. 노 의원님께서 자네를 특별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네. 우리도 그 호흡법을 배우긴 했지만, 노 의원님께 직접 사사한 것이 아니라, 전문 의원님들께서 교과 시간에 잠시 가르쳐 주신 것이 다라네. 그마저도 수련을 하고 싶은 사람들에 한에서만 가르치셨지.”
“네? 이곳 의원님들 모두 익히고 계신 것이 아닌가요?”
“자네가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군. 이 호흡법은 어렸을 적부터 해야 비로소 효과를 볼 수 있다네. 물론 내 나이 때의 사람들이 꾸준히 한다면, 언젠가는 그 효과를 볼 수 있겠지만, 그 효용성은 크지 않다네. 그래서 우리들은 주로 무림인들이 다루는 심법을 배우고 있다네.”
“무림인들이 다루는 심법이오?”
“그렇다네. 뭐 뛰어난 심법은 아닐세. 우리가 무림 고수가 될 것도 아니고, 단지 기감을 높이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고 있다네. 실제로 이것들은 시중 서책 방에 가면 누구나 구할 수 있는 삼류 심법일세.”
“아, 그래서 수련하고 싶은 분들만 배우는 것이군요.”
“그렇지. 하지만 태사부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는다면, 우리가 익히고 있는 것보다 그 효능이 뛰어날 것이 틀림없네. 아무래도 한 단계 건너 배우는 것보다는, 직접 배움을 받는 것이 심법의 본래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을 테니, 자네에겐 좋은 기회가 될 것일세. 그러니 열심히 배우게나.”
“네, 그리하겠습니다. 그런데 너무 어렵습니다. 명칭도 낯설고, 그 위치도 정확하지 않고. 어떻게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후후, 자고로 공부에는 왕도가 따로 없네. 꾸준히 배우고, 그것을 다시 반복해서 익히다 보면, 언젠가 자신도 모르게 몸에, 그리고 머릿속에 그 내용이 담기게 되는 것이지. 단지 요령 아닌 요령이라면, 그 배움을 즐기라는 것이지.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게. 그러면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그것은 이미 힘든 일이 아닌 나에게 기쁨을 주는 일로 변해 있을 것이네.”
당의문은 왕수강에게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를 자책했다. 자신은 의원이 되기 위해 즐거움이 아닌 절박함으로 모든 사물을 인지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뛰어난 의원이 되어 힘들게 고생하고 있을 어미를 모시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아들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아비에게 당당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그렇게 조급한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한데 모순되게도 왕수강에게는 그 상황을 즐기면서 노력하라 했으니,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왕수강은 당의문이 갑자기 말이 없자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왠지 지금 그에게 말을 걸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의문은 작은 깨달음을 얻고 있었다. 그동안 정체되었던 배움에 대한 욕구가 다시금 그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익힌 삼류라 불리는 심법에도 약간의 변화를 주었으니, 왕수강에게 베푼 작은 언행이 그 스스로에게 큰 보답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머리가 맑아지며 온몸에 갑작스레 활력이 차올랐다. 사물이 좀 더 뚜렷하게 인지되고, 그동안 그를 괴롭혀 왔던 기에 대한 느낌을 비로소 알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기의 운행들, 조용히 심장과 머리로 움직이는 기의 흐름에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삼류 심법을 익혀 기를 느끼는 것은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이곳에 온 이후로 익히기 시작한 태을심법은 이름만 거창한, 말 그대로 삼류에 해당하는 심법이었다.
최초에 심법을 만든 이가 삼라만상의 법칙을 그 안에 담아 두었다면, 후대로 내려오면서 심법의 본의가 퇴색되어 당대에 이르러 태을심법이라는 이름을 가진 서로 다른 서책들이 퍼져 나가게 되었다.
원류는 하나이나, 그 가지가 수백 가지도 넘는 심법이 바로 태을심법인 것이다.
그리고 그중 하나를 익힌 당의문이 실제로 심법의 본래 의미를 유추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당의문은 아주 작은 일부이긴 하지만, 자신의 몸을 휘돌고 있는 기들의 운행을 느꼈다. 심공을 익히면서 단지 건강해지면 좋고, 후일 의술에 도움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심정으로 익힌 태을심법이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었다.
무공을 익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언젠가 한두 번씩 겪는 일상적 깨달음일지 모르지만, 일반인에 가까운 당의문에게는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의원이 몸속 기의 흐름을 어설프게나마 알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의원으로서 오늘 일생일대의 기연을 맞이한 것과 다름없었다.
“고맙네, 왕 소제. 내 자네 덕에 그동안 나를 막던 벽 하나를 넘게 되었네. 정말 고마우이.”
왕수강으로서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 제가 한 일도 없는 걸요. 그런데 정말 그 짧은 시간에 무엇을 깨달으신 건가요?”
“그렇다네. 자네에게 이야기를 해 주다 보니, 내게 더 도움이 되는 말을 스스로 해 버리고 말았다네. 평소 너무 바빠 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는데, 자네 덕에 깨달을 수 있었네. 그러니 내 어찌 자네에게 감사의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정말 축하드려요.”
왕수강은 자신의 일인 양 기뻐했다. 자신이 한 일은 없지만, 당의문이 한 단계 더 나아가게 된 동기가 자신과의 대화였다는 사실이 그를 유쾌하게 만들었다.
“왕 소제, 내 지금 잠시 나가 생각을 정리해 보고 싶네. 오늘 자네가 어려워하던 한자들을 표시해 두었다가, 내일 나에게 물어보게나.”
‘알겠습니다. 그리고 감사드려요.”
“아니네. 별일도 아닌 것을. 난 그만 나가 보겠네.”
“조심히 살펴 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