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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의 괴 1권(10화)
제2장 교차(交差)(6)


왕수강은 덩그랗게 놓인 혈도해(穴圖解)를 바라보았다.
방금 이 방에서 일어난 일들이 믿기지 않았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당의문의 모습이 그를 조금은 혼란스럽고 당황하게 만들었다.
깨달음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이 그리 좋은 것일까?
배움에 막힘이 존재하는 것일까? 단지 외우고 이해하면 다가 아닐까?
그런데 또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일까?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가왔다.
눈앞에 보이는 저 그림들 속의 혈도들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씩 직접 손으로 만져 보았다.
느껴지는 것이 있을 턱이 없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몸에 그 하나하나를 직접 표시하고 눌러볼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다 노소평의 말이 떠올랐다.

“절대로 자네 몸의 혈도를 만진다던가 강하게 눌러본다던가 하는 일을 하지 말게나. 혈도의 역할과 기능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런 일을 벌인다면, 큰일이 날 수도 있네. 이 점 꼭 명심하게.”

책을 건네주면서 당부한 노소평의 말이 아니었다면, 왕수강은 이를 행동으로 옮겼을지도 몰랐다.
“휴, 결국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 도해를 통째로 외우는 것뿐이구나.”
당의문의 깨달음을 부러워하던 왕수강이 얻은 결론은 공부뿐이었다.
빼곡히 적힌 글들이 왕수강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그의 머릿속을 들락날락했다. 아무리 잡아넣으려 해도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그 글들을 원망스레 쳐다보며 왕수강은 중얼거렸다.
“기다려 줘. 내가 너희 모두를 내 머릿속에서 살아가게 만들고 말 테니까. 단지 내겐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뿐이니까.”



제3장 변화(1)


누구에게나 시간은 공평한 기회를 제공한다. 왕수강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곳 도가의방에 오기 전의 왕수강과 지금의 왕수강은 시간의 흐름을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변화가 컸다.
우선 외모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작고 메마른 몸집이 이젠 보기 좋을 정도로 살이 올랐으며,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아서인지 키도 반년 사이에 몰라볼 정도로 많이 자랐다.
두 번째로 이제 까막눈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본인의 노력과 당의문이라는 좋은 스승은 학문에 대한 목마름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책을 읽는 즐거움과 새로운 것을 알아 가는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마지막으로 왕수강의 꿈인 의원에 대한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노소평이 전해 준 도해를 외우는 데만 꼬박 한 달이 걸렸다.
노소평은 왕수강이 보여 준 끈기에 감탄하며 그에게 양기취정법을 가르쳐 주었다. 만일 도중에 외우기를 포기했다면, 양기취정법이 아닌 단전호흡을 가르치려했던 노소평의 시험을 무사히 넘긴 것이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먼저 자세를 바르게 하고, 시원한 공기를 가슴 가득 호흡하며, 몸속으로 들어온 기를 느끼는 것이 첫 번째로 달성해야 할 목표였다.
처음에는 일어나기조차 힘들었지만, 이젠 새벽마다 호흡을 통해 느껴지는 기의 모습을 보는 일이 즐거워졌다.
기는 아직 그의 몸에 쌓이지 않고 호흡이 끝나는 동시에 그에게 인사를 하며 떠나갔다.
노소평은 그러한 일이 수없이 반복되어야 비로소 기가 몸속에 남아 그에게 새로운 길을 가르쳐 준다고 하였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왕수강에게는 어제와 오늘이, 그리고 내일이 다르게만 느껴졌다. 무엇인가 배운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변화는 시작되는 것이다.

“장 아저씨, 안녕하세요.”
“그래, 벌써 일어난 게냐. 아직 추운데 좀 더 있다 나오지 않고.”
“아니에요. 충분히 잤는 걸요. 저도 도와 드릴게요.”
“그럼 나야 좋지만, 너무 무리하지 말거라.”
“네. 전 저쪽 동문에서부터 이곳으로 올게요. 아저씨.”
“그렇게 하려무나. 난 이곳에서 서문 쪽으로 치우마.”
“네. 그럼 수고하세요.”
말이 끝나자마자 눈을 밟으며 동문으로 달려가는 왕수강이었다.
“허허. 부지런하기도 하지. 누구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구나. 내 이놈의 자식을!”
장씨는 쥐고 있던 나무 빗자루를 한쪽으로 치우며 급히 자신의 집으로 달려갔다. 죄 없는 자신의 자식을 닦달하기 위해서.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눈은 지난밤의 모습들을 간직하기라도 하듯 꽤 많이 쌓여 있었다.
“후, 꽤 추운데. 오늘은 송 아저씨가 못 오실지도 모르겠는걸.”
두 달 전부터 약재학을 배우기 시작한 왕수강이었다. 의원이 되기 위해서 제일 기본이 되는 것이 약초를 다루는 일이라며, 당의문의 소개로 송철에게 약초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송철은 왕수강을 이곳 도가의방에 데려오기도 했던 인물로, 의방에 유통되는 약초의 반 이상을 공급하는 약초꾼들의 우두머리였다.
‘송 아저씨는 말은 거칠게 하지만, 따뜻한 분이지. 매번 나를 구박하시긴 해도, 가르쳐 주실 건 세세히 가르쳐 주시잖아.’
송철에 대한 왕수강의 생각은 따뜻한 사람이란 단어로 묶인다. 힘든 산행이 그를 거칠게 만들었지만, 산을 닮은 그의 품성은 누구보다도 인자하고 너그러웠다.
그래서 왕수강은 그를 좋아했다. 오늘 내린 눈 덕에 그가 이곳까지 오려면 꽤나 수고스러운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투덜거리면서 이곳으로 오고 있으리라.
가슴이 설레인다. 오늘은 어떤 약초에 대해 가르쳐 줄까.
문득 몇 달 전 일이 떠올랐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왕수강의 비질이 동문에서 서문을 향해 힘차게 그 행보를 시작했다. 비질을 하며 날리는 눈의 잔영들이 새벽 별빛을 받아 아름답게 수놓아졌다.

“어머, 그 환자 뻔뻔하기도 하지 않니?”
“하긴 좀 그렇긴 해. 벌써 몇 달째 저러고 있다니?”
“그렇지. 네가 생각해도 좀 그렇지. 아무리 뒤에 북궁세가 사람이 있다 해도, 어떻게 본인이 돈 한 푼도 못 내면서 저렇게 방을 차지하고, 매일 그 좋은 탕약을 받아먹을 수 있니?”
“게다가 요즘은 당 의원님과 태사부님께 직접 무언가 사사하고 있다고 소문이 쫙 나 있던걸.”
“아, 나도 줄이나 잘 서 보는 건데. 어디 그런 사람 없나?”
“아서라. 이곳에 그런 호사를 누리는 사람이 또 생기면, 내가 배 아파 못 산다.”
“호호, 그렇지.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밥값은 해야 하는 것 아닌지…….”
“얘, 늦겠다. 어서 가자.”
“그래, 또 경을 칠라. 얼른 가자.”
지나가는 말이지만, 그 대상이 나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내가 그리 뻔뻔스러웠던가. 이제 환자라는 명칭은 버린 지 오래지만, 그들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그리 좋지 않았던가.
의녀들의 말속에는 부러움과 질시가 서려 있었다. 어린 왕수강은 왜 자신이 그들로부터 질시 어린 시선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자신이 도가의방의 환자도 손님도 아닌 입장이라는 것이다. 언제까지 북궁명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예전과 같은 나락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다급함이 생겼다.
‘다시는 이전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난 이제 의원이 될 거야. 의원이 되어서 오래오래 살거라고.’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때 북궁명이 이곳 도가의방에 왔으면 좋겠다는 바람마저 생겨났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좀 오래 걸릴 것 같다는 소식과 함께 왕수강을 부탁한다는 그의 편지가 도착한 지도 꽤 오래되었다.
그는 무슨 일로 오지 않는 것일까? 내가 그에겐 아무런 의미도 되지 못하겠지만, 노 의원님의 말씀으로는 절대로 약속을 어기지 않는 무인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가 기댈 곳이라곤 당의문과 노소평뿐이었다.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면 그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가장 현명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당 의원님, 전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무엇을 말인가?”
자신이 들어오자마자 왕수강은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제가 이곳을 나가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그게 무슨 말인가? 이곳을 나가다니?”
“전 이제 환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은인이신 북궁 대협께서 제 후견인이 되어 주시는 것도 아니질 않습니까? 그러니 어찌 이곳에 남아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니, 누가 자네에게 뭐라 했는가? 자네에게 이곳을 나가라고 그러던가? 그리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태사부님이시지, 다른 사람이 아니네. 자네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일세.”
“누가 뭐라 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걱정이 되어서 드리는 말이에요.”
갑자기 질린 얼굴로 말하는 왕수강이 안쓰럽기만 하다.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리 걱정되는가? 그럼 이곳에 남아 무엇이라도 하길 원하는 것인가”
“네, 당 의원님. 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어요.”
다급함이 어린 목소리를 듣고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불과 하루 사이에 왕수강은 초조하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어제만 해도 학문을 배우는 기쁨에 감사해하던 왕수강이었는데 이리 변하다니, 걱정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자네, 이제 겨우 몸이 회복된 것이네. 무리를 해선 안 된다는 태사부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였는가? 그리고 아직은 어려 이곳 도가의방 내에서 할 만한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네. 내 태사부님께 여쭈어 보긴 하겠지만, 그리 서둘지 말게. 도가의방은 결코 매정한 곳이 아니라네. 자네 한 사람쯤은 거두어들일 능력도 충분한 곳이지. 그러니 내 말대로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게나.”
“정말 그런 것이지요? 제가 이곳에 있어도 무방한 것이지요?”
“허허. 그렇대도. 정 자네 마음이 불안하다면, 태사부님께 배운 호흡법을 반복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네. 내가 학시원에 다녀와 좋은 소식을 가져다줄 것이니, 마음 편히 기다리게. 알겠는가?”
“네. 그리하겠습니다. 당 의원님만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당의문은 급히 자리를 떠났다. 빨리 노소평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왕수강의 처우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걸음을 빨리하는 와중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왜 이 아이를 위해 나서야 하는 것일까? 단지 언젠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란 미련 때문일까? 알 수가 없구나.’
언제나 주변 사람보다는 자기중심적 사고를 가진 당의문이었기에 그런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왕수강의 일이라면 솔선수범하여 나서는 것이 당연시되어 버렸다.
내심 생각과는 다르게 그의 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왕수강은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노소평으로부터 배운 양기취정법을 떠올렸다.
혈도가 그려진 서책을 받은 지 한 달이 다 되어서야 겨우 명칭과 위치를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노소평에게 숨을 쉬고, 기를 받아들이는 방법, 혈도들의 기능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노소평이 가르치는 양기취정법은 일반적 심법과는 크게 달랐다. 무림인들이 말하는 심공은 단전이란 곳에 기를 모아 그것을 혈도를 통해 흘려보냄으로써 잠재된 육체의 능력을 자각할 수 있도록 개량되고 발전되어 갔다.
그러나 양기취정법은 단전을 하나의 혈도로 보는 의학적 사고에서 시작된 심법이다. 그렇기에 단전에 기를 모아 두는 것이 아니라, 혈도들 전체에 기를 조금씩 나누어 두는 것을 근간으로 했다.
또한 혈도 사이를 아주 가는 선으로 연결하여 기가 끊이 없이 순행하도록 하여 몸속에 흐르는 기의 모습을 살펴보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혈도들의 기능과 위치 등을 좀 더 쉽게 파악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다만 아쉬운 점은, 내공의 이동 통로인 혈도들이 가늘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큰 힘을 낸다거나 무림인들과 같은 육체적 능력을 극대화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반인들의 건강을 목적으로 하거나, 의원들의 기감을 키우는 데는 양기취정법만큼 좋은 심법도 드물었다.
오래 살아가기가 목적인 왕수강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본래 기가 원활하게 통하지 않는 일반인들과는 달리, 가는 선이기는 하지만 혈도들 사이에 통로가 존재하고, 이곳을 통해 기가 순환하면서 체내의 나쁜 기들을 정화시켜 몸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때문에 이 심법을 오랜 시간 익힌다면, 분명 왕수강의 숙원인 건강하게 오래 살기는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의원이 되기로 결심한 왕수강으로서는 노소평이 가르쳐 준 양기취정법은 반드시 익혀야 할 심법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