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불사의 괴 1권(11화)
제3장 변화(2)


잠시지만 심법을 운용하자 차가운 공기가 코를 통해 그의 뇌에 공급되었다. 그리곤 아까의 긴장감과 두려움은 어느새 한 켠으로 밀려 나갔다.
‘두려워하지 말자. 누군가에게 기대려 하지도 말자. 만일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나 스스로를 아끼고 지켜 내자.’
호흡을 통해 들어오는 기의 신선함을 느끼며 왕수강은 생각했다. 요 몇 달간의 호사는 그의 육신을 편하게 했을지 모르지만, 기대고 안주하고 싶은 욕망을 부추겼다. 그래서 어린 왕수강의 결심은 때때로 변하고 장벽에 가로막히고, 그리고 멀리 사라지곤 했다.
이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난 결코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니다. 내가 노력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나에게 손을 내밀지 않을 것이다. 잊고 있었다. 내가 처한 위치를…….’

“헉……헉……왕 소제, 안에 있는가?”
헐레벌떡 뛰어온 당의문이었다. 기쁨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와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당 의원님, 들어오세요.”
아까보다 한결 차분한 목소리로 왕수강은 당의문을 맞이하고 있었다.
‘많이 차분해진 것 같군. 조금 전만 해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더니, 이번에는 침착한 모습이라니……. 아직 어려서인가, 아니면 힘든 일을 많이 겪어서 그런가, 감정 기복이 심한 듯하구나.’
당의문은 진정된 모습의 왕수강을 보며 잠시 이런 생각에 잠겼다.
“왕 소제, 기뻐하게나. 학시원을 맡고 계신 소의원님께서 자네가 이곳 의방에서 일할 수 있도록 태사부님께 건의하였다네. 태사부님께서는 북궁 대협이 이곳에 오시기 전까지, 의방 일을 도우면서 지내라고 하셨다고 하더군. 그리고 아직 어려서 다른 것은 할 수 없지만, 약재를 나르고 분류하는 일은 할 수 있을 것이라며, 당분간 약고에서 일하라 하셨네. 만일 북궁 대협의 허락이 있다면, 나이가 좀 더 들었을 때 이곳 학시원에서 정식으로 가르침을 내리신다는 말씀도 하셨네.”
“그게 정말이십니까? 정말로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제가 이곳에 남아도 된다,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허허 좀 전의 차분한 자네는 어디 가고 이리 호들갑인가? 정말 그리 말씀하셨네. 그러니 내일부터는 약고에 가서 일을 배우도록 하게나. 의원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이 잘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인데, 그 기초 중에 기초가 되는 것이 약재학이라네. 나도 아직까지 약재학이 어렵기만 하네. 자네는 아직 어려 충실하게 배울 수 있는 시간이 많을 것이니, 열심히 하도록 하게.”
“네, 명심하겠습니다. 당 의원님, 이 은혜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왕수강은 머리 숙여 고마움을 표시했다.
“뭘 이런 일로 그리 고개까지 숙이는 겐가. 후일 자네가 훌륭한 의원이 되어 소원을 성취한다면, 그때는 나를 조금만 생각해 주게나. 그럼 되는 것이네. 그리고 아직 몸이 완쾌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무리하지는 말게나.”
진심이었다. 태사부와의 인연을 연결해 주는 고리로만 생각했던 왕수강이 어느새 그의 가슴에 들어와 있었다. 그와 지낸 몇 달 동안 당의문은 의학적 사고 영역의 확대뿐만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기본적 태도마저도 크게 변화하였다.
우연의 일치인지도 모르지만, 의원으로서 자신을 자각한 것이나 환자와 타인에 대한 배려와 같은 사소한 변화 역시 왕수강과의 만남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은 어땠을지 모르나, 지금의 당의문은 왕수강을 아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도가의방 잔류에 대해 그토록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네, 그리하겠습니다.”
두 눈에 눈물이 가득한 왕수강의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당의문은 그의 등을 두드려 주며 그렇게 자리해 주었다.

“이 녀석, 이 추운데 왜 나와 있느냐?”
검은색 털모자와 두꺼운 가죽을 여기저기 덧댄 외투로 온몸을 가득 감싸고 있는 한 인영이 다가오며 말했다.
“송 아저씨.”
“이러다 감기라도 들면 어쩌려고 밖에 나와 있는 게냐?”
“걱정이 되서 나왔지요.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는데, 혹시 못 오시진 않을까 해서 나와 봤어요.”
“이놈아, 내가 설마 길이라도 잃어버릴까 봐 나와 있느냐? 아니지, 혹여 네놈에게 약초에 대해 가르쳐 주지 못할까 봐 나온 것은 아니냐? 뻔히 보인다. 네 녀석 속이.”
“아얏! 말로 하시지 왜 때리세요? 아파 죽겠네.”
“오호라, 엄살이시라 그 말이지. 어디 한 대 더 맞아 봐라.”
눈길을 어지러이 달리며 두 사람은 그동안의 정겨움을 표현했다.
부모가 없는 왕수강은 송철의 그 투박함을 좋아했고, 세상천지에 그 혼자인 송철 역시 왕수강의 순박함을 좋아했다.
“아저씨, 이번엔 무엇을 가지고 오셨어요? 겨울이라 약초가 거의 없을 텐데요?”
“휴, 약초꾼들이 어디 겨울이라고 쉴 수 있냐? 게다가 북쪽 지방은 눈으로 덮여 있지만, 저 아래 형산이나 계림 같은 곳은 사시사철 따뜻하니, 멀더라도 그곳으로 가는 거간꾼과 약초꾼 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 게다가 남방에서 자라는 약초와 북방에서 자라는 약초는 그 쓰임이 다르니, 너도 나중에 많이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그래요? 여긴 눈이 많이 내렸길래, 이번에 오실 때는 빈손으로 오실 줄 알았지요.”
“흐흐……. 중원이 어디 작은 소국인 줄 아느냐? 구주팔황 그 넓디넓은 세상을 네 녀석이 들어 보기나 했을라고.”
“칫! 뭐 아저씨도 다 다녀 보신 것은 아닐 거잖아요.”
“허허. 내 이래 뵈도 사방 곳곳 안 다녀 본 곳이 거의 없을 것이다. 삼협의 그 웅장함과 계림의 빼어난 풍경하며, 여인네들의 노랫소리하며……. 햐! 다시금 가고 싶구나.”
“나중에 하나씩 들려주세요. 저도 가 보고 싶단 말이에요.”
“네 녀석 하는 것을 보고 말해 주마. 이렇게 추운데, 뜨거운 차라도 한잔 가져다주면서 그런 말을 하면 예쁘기나 하지, 이거야 원 써먹을 데가 없구나.”
“이궁 내 정신 좀 봐. 아저씨가 오시면 약고로 얼른 모시라고, 궁 의원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추운데 이렇게 말만 하고 있었네요.”
“네놈 하는 짓이 그렇지. 어서 앞장이나 서거라.”
“알았어요. 잘 따라오세요. 넘어져서 다치지 마시고요.”
송철만 보면 어리광을 부리는 왕수강이었다. 편안함과 동시에 그리운 아비의 체취를 느낄 수 있어 그리하는지도 몰랐다.

“이번엔 멀리 다녀왔다고?”
“네, 한겨울에 태산에 들어가면 얼어 죽기 십상입죠. 게다가 눈밭을 헤치고 약초를 캐야 하는데,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입니까? 약초도 얼마 없는데 목숨까지 걸긴 뭐해서 사람들을 모아 형산에 다녀왔습니다.”
“형산이라면 꽤 먼 거리인데 고생했구먼. 그래 어디 약초 좀 보세나?”
“이번엔 운이 좋았습니다. 저근백피, 청상자, 군천자, 천초근, 유백피, 사삼, 대극, 패장 등 엄청나게 많은 약용식물뿐만 아니라, 이놈 보십시오. 하수오와 현삼을 대량으로 발견했지 뭡니까, 덕분에 헛고생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오호. 이 하수오는 삼십 년도 더 되었군. 좋은 녀석을 골라 왔네그려. 내 샘은 톡톡히 쳐 주겠네. 역시 송철 자네가 와야 우리 약고가 좀 채워지네.”
도가의방에서 거래하고 있는 약초꾼들은 줄잡아 십여 명이었다. 하지만 그중 약고를 책임지고 있는 궁자성의 맘에 드는 이는 송철과 자학(紫鶴)이라 불리는 거간꾼뿐이었다.
송철은 직접 약초를 캐 와 도가의방에 대 주는 일을 하고 있고, 자학이란 자는 원래 작은 의원을 하다가 약초만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행상이 되어 대규모 약재를 이곳에 납품하는 업자였다. 그래서 남달리 약초를 보는 눈이 뛰어났고, 무엇보다도 대량으로 납품하기 때문에 저렴한 가격으로 약재를 들여올 수 있는 장점을 가진 상인이기도 했다.
“자네들은 이 약초들을 창고에 쌓아 두게. 수강아, 넌 사람들을 모아서 약재들을 분류할 준비를 하도록 하고.”
“네, 알겠습니다. 궁 의원님.”
“송철 자네는 나와 어디 가서 식사나 하고 오세. 고생을 했으니 이만한 대접은 해야 하질 않겠나?”
“하하, 좋습니다. 술도 한잔 사 주시는 겁니까?”
“물론이네. 어디 가서 자네 같은 약초꾼을 다시 만나겠는가? 고생했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제가 공짜로 일하는 것도 아니고,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이게 무슨 고생이겠습니까?”
“하여튼 나가세나. 수강이 넌 사람들을 모아서 약재 분류 작업을 하는 것을 잊지 말거라. 내 다녀와서 꼭 확인할 것이다.”
“네. 걱정 말고 다녀오십시오. 송 아저씨, 나중에 봬요.”
“오냐. 이따 보자꾸나.”

약초가 주는 내음은 각기 달랐다. 머리를 아프게 하는 독한 내음부터 코를 간질이고 입가에 절로 침을 내게 만드는 향기까지, 각각 다른 자태를 풍겼다.
왕수강은 지금 자신이 들고 있는 현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한 뿌리에 얼마나 할까? 이걸 먹으면 어디에 좋을까? 또 이건 어디에서 자랄까?’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아직은 약초의 모양새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벅찼지만, 자신도 언젠가는 약초들의 쓰임새를 알고, 그것을 배합해 직접 약을 만들 수 있으리라 여겼다.
‘지금은 단순히 분류 작업이나 하고 있지만, 나도 저 의원님들처럼 나만의 약을 만들 수 있겠지.’
도가의방의 의원들은 자신이 개발한 약초배합법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고관대작에서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에게 그 약효를 인정받은 약들은 학시원에서 정식 교과과정 속에 포함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약을 개발한 의원에 대한 처우마저도 달라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도가의방의 의원들과 수련 의원들은 누구보다도 의술을 발전시키는 데 열과 성의를 다했다. 도가의방이 명성을 높아지게 된 이면에는 이와 같은 의원들의 숨은 노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수강아, 이 저근백피와 청상자는 저쪽 그늘진 곳에 놓아두도록 해라. 음지에서 일단 말린 후에 다시 찌는 과정을 행해야 하니, 실수하지 말거라. 그리고 현삼과 사삼은 섞이지 않도록 주의하고…….”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의원들의 잔소리에 왕수강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매번 이렇게 약재들이 들어올 때마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만 실수를 하여도 약재의 질이 떨어지거나 못쓰게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어린 왕수강으로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틈틈이 약재의 명칭과 모양을 외우긴 했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약재들을 구별하기엔 그 수가 너무 많았다.
“휴, 이제 겨우 끝났네.”
밖은 어느새 검은 하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하얀 눈은 교묘히 그 어둠을 품에 안으며 자신의 존재감을 밝히고 있었다.
“으, 추워. 얼른 방으로 들어가서 심법이나 수련해야겠다.”
심법을 수련할수록 몸이 가벼워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물에 대한 인지능력이 예전보다 좋아졌다고 생각되었다. 물건이 또렷하게 보인다던가, 이전보다 한자를 외우는 것이 편해졌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착각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그의 혈도 구석구석에 기들이 자리 잡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머리에 있는 후정, 뇌호, 풍부, 아문 등의 혈도에 좀 더 많은 기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약재들과 씨름하며 그 세세한 모양과 이름을 그의 머릿속에 아로새기려는 노력이 반복될수록, 그 양은 점차 증가하였다.
사람의 신체는 주로 사용하는 부분이 발전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 역시 주로 사용하는 신체 혈도에 많이 분포될 수밖에 없었다.
왕수강의 일과인 약재를 외우고 분류하는 작업은 많은 생각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머리 부분의 혈도들이 두드러지게 활성화되는 것 역시 당연한 이치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충분한 휴식과 고른 영양 공급은 한창 자라는 왕수강의 성장 속도를 높여 주는 결과를 가져왔고, 더불어 그의 끊임없는 탐구욕은 지식 형성 과정뿐만 아니라, 두뇌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는 효과를 가져온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인들과의 비교일 뿐이었다. 세상에는 그런 일반인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천재들이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왕수강은 그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