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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의 괴 1권(12화)
제3장 변화(3)


“내가 이렇게 도가의방 식구들을 모두 불러 모은 것은, 여러분께 새 식구들을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우선 여기 수강이는 다들 아시고 있을 테지만, 다시 한 번 소개를 하도록 할까 합니다. 이번에 선발된 의동(의원을 도와주는 서동) 중 한 명으로, 약고에서 일하게 된 왕수강이라 하고, 여기 잘생긴 소년은 소요의방에서 동문수학한 친우의 손자로, 이름은 사마경의(司馬璟擬)라 합니다. 나이는 어리지만 의술에 대한 이해가 높아, 이번 수련의에 선발되었습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이 소년 역시 소요의방의 추천으로 이곳 학시원에서 수학하게 되었습니다. 이름은 마강영(摩强盈)이라 합니다. 여러분들께서 많이 도와주셔야 할 것입니다.”
이제 십오륙 세쯤 되어 보이는 두 소년이 의동이 아닌 학시원 수련의라는 노소평의 말에 왕수강은 깜짝 놀랐다.
‘나보다 겨우 몇 살 많은 것 같은데, 벌써 수련의라니……. 정말 대단하구나.’
부러운 눈빛으로 왕수강은 그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은 천상의 소년인 듯 빼어난 용모를 자랑하고, 다른 한 사람은 약간 허리가 굽은 곱사등이지만 눈빛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총관은 두 사람이 묵을 방을 배정해 주도록 하고, 환영식은 정식으로 학시원이 시작될 때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로 가서 일과를 시작해 주시기 바랍니다.”
노소평의 말과 동시에 사람들은 분주히 제 갈 곳을 찾아 흩어졌다.
하지만 그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지난해 학시원에서 꼴등을 차지한 백숭 의원과 바로 그 위의 성적을 가진 소상 의원이었다.
당퇴일의(當退一醫). 학시원의 규칙에 의거하여 백숭 의원은 당연히 학시원에서 나가야 하지만, 소상 의원의 경우는 조금 억울한 것은 사실이었다. 새로운 두 명의 수련의가 들어왔으니, 어쩔 수 없이 기존 두 명의 수련의가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수차례 그 문제로 소상이 항의하였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올해가 가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라는 말뿐이었다.
“제길, 더러운 세상! 이곳도 다른 의방과 다르지 않군. 없는 자는 여기서마저 차별을 당하는구나. 내 치사해서 나간다. 어디 얼마나 잘사는지 두고 보자.”
갖은 악담을 퍼부었지만, 그의 속은 나아지는 것이 없었다.
왕수강은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비친 백숭이나 소상은 감히 올려다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의원들인데, 그런 그들이 지금 학시원을 떠나야만 하는 입장에 처해진 것이다.
‘얼마나 뛰어난 의원들이 학시원에 있는 것일까? 저분들이 나가야 될 정도라니.’
그러다 조금 전에 본 두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의 실력이 그렇게 빼어나단 말인가? 저 두 분보다도?’
쉽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니 인정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두고 보면 알겠지, 그리고 솔직히 내가 지금 그런 것을 부러워할 때는 아니잖아. 난 그저 오래 건강하게 살기만 하면 돼. 물론 매우 뛰어난 의원이 된다면 바랄 것도 없겠지만, 그리되지 않더라도 상관없잖아.’
스스로를 위로했다. 잠시지만 자괴감이 들었던 자신에게 한 번쯤 좋은 핑곗거리를 가져다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 *

“이 녀석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고 있는 것이냐? 열심히 약초 구별하는 법을 배워도 모자랄 판에, 어디 다 정신을 놔두고 있는 것이냐?”
손에 약재를 든 채 멍하니 한 곳을 바라보는 왕수강을 향해 송철이 핀잔을 주며 말했다.
“송 아저씨, 언제 오셨어요?”
“온 지 꽤 되었다. 네놈 하는 짓이 하도 어이없기에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얼굴이 소태 씹은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더냐?”
“아저씨, 세상은 너무 불공평해요.”
“허허, 이제는 정신 줄을 제대로 놓을 모양이구나. 앞뒤 없이 불공평하다 하면, 내가 어찌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
“휴, 어제 제가…….”

학시원을 맡고 있던 소공탁은 새로 들어온 두 사람을 학시원 내 의원들과 수련의들에게 소개해 주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어린 나이에 수련의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큰 반향을 일으킨 두 사람은 어디를 가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거야 원. 이렇게 관심들을 보이니, 앞으로 자네들이 피곤하겠어. 특히 사마 의원 자네는 좀 더 신경을 써야 할 듯하네. 자네를 힐끗힐끗 쳐다보는 의녀들이 한둘이 아니지 않은가, 하하.”
잘생긴 사마경의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진다.
“대충 학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으니, 태사부님을 뵈려 가세. 아마 기다리고 계실 것이네.”
소공탁 일행이 노소평의 거처에 이를 때 쯤, 왕수강 역시 태사부인 노소평에게 감사의 말을 하기 위해 그의 거처를 찾아가고 있었다.
“수강이가 아니냐? 무슨 일로 예까지 찾아온 것이냐?”
“태사부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어 오게 되었습니다.”
“녀석, 그리 안 해도 될 것인데. 하여간 이곳까지 왔으니 함께 들어가자꾸나.”
“네, 소 의원님.”
“아직 정식으로 인사를 하지 않았겠구나. 여기 두 사람이 이번에 수련의가 된 사마 의원과 마 의원이란다. 너보다 나이는 많지 않으나, 태사부님의 기대가 클 정도로 뛰어난 두 사람이니, 앞으로 많은 배움을 청하거라.”
왕수강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왕수강이 두 분 의원님을 뵙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반갑구나. 난 사마경의라고 한단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찾아오너라. 내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마.”
“마강영이다. 가끔은 네 의술을 봐주기는 하겠지만, 쓸데없는 일로 날 귀찮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첫인상에서부터 대조되는 두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봄바람처럼 산들거리고, 다른 한 사람은 겨울 사막처럼 건조했다.

“그래, 두 사람 모두 이곳까지 오느라 피곤했을 테데, 이렇게 불러내어 미안하군.”
“아닙니다, 노 의원님. 많은 환대에 오히려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할아버님께서 노 의원님께 전해드리라는 서신이옵니다.”
비단으로 감싼 서신을 전하며 사마경의가 말했다.
“중광(仲曠), 그 친구가 몹시 자랑하던 널 보게 되니 나로서도 반갑기 그지없구나. 앞으로 이곳에서 열심히 배워, 본가로 돌아갔을 때 날 부끄럽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노 의원님.”
“강영이 너도 마찬가지이다. 네가 아직 나이가 어린 관계로 여민관에 들지 못하여 이곳 학시원에 오게 되었다만, 이곳에서 정진하여 후일 여민관에 들게 되었을 때, 학시원 출신의 실력이 그곳 못지않다는 것을 알려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꼭 그리하겠습니다. 태사부님.”
노소평은 그 이외에도 학시원뿐만 아니라 의방 일에도 솔선수범할 것을 당부했다.
“오늘 이렇게 처음 만난 기념으로, 이 혈도해를 너희에게 주마. 한 권뿐이니 서로 돌려 보고 외우도록 하거라.”
노소평은 품속에서 한 권의 서책을 꺼내 두 사람 앞에 내밀었다.
“제게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노 의원님.”
갑작스런 사마경의의 말에 함께 방에 있던 사람들이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사마경의는 노소평이 준 혈도해를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면서 입으로 중얼중얼거리는 시늉을 하며 한 장 한 장 넘겼다.
그리곤 잠시 뒤,
“다행히도 제게 익숙한 혈도들이 많아서 그런지 어렵지 않게 외울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마 의원에게 주셔도 될 듯하옵니다.”
사마경의의 말에 모두 깜짝 놀랐다. 십여 장의 그림 속에 빽빽이 표시된 혈도의 숫자만 어림잡아 이백여 개가 넘었다. 그가 아무리 이전에 혈도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 짧은 시간에 다 외우긴 불가능하리라 생각되었다.
“허허, 이건 들었던 것보다 심하구나. 네 총명함이 상상 이상이구나.”
사마경의를 바라보는 네 사람의 시선을 제각기 달랐다.
노소평은 그의 재능에 기꺼워하는 눈빛이었고, 소공탁의 시선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으며, 마강영의 시선 속에는 질시의 눈빛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마지막으로 왕수강의 눈빛 속에는 황당함만이 들어 있었다.
‘내가 저걸 외우기 위해 몇 날 며칠을 지새웠던가? 그러고도 지금까지 완벽하게 외우지 못한 것을, 단 한 번 흩어 보듯 하고는 외우다니……. 세상에는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들이 존재하는구나.’
탄식이 절로 나왔다. 관옥 같은 외모에 총명함까지 더해진 사마경의란 존재는 그에게 거대한 벽으로 다가왔다.

“휴, 그래서 지금 이러고 있는 것이에요.”
“에잉, 못난 녀석 같으니라고. 그는 그이고, 넌 네가 아니냐? 총명함이 과한 사마 의원은 그 재능만큼 세상에 빛이 되면 되는 것이고, 넌 네가 가진 부족한 능력을 메우기 위해서 더욱 노력하면 그뿐 아니냐? 한순간에 혈도를 외우나, 오랜 시간이 걸려 혈도를 외우나 결과는 같다. 다만 그 시간에서 차이가 날 뿐이지.”
“그래도 그렇게 뛰어난 사람이 더 노력한다면, 제가 어찌 쫓을 수 있겠어요?”
“옛말에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려다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말이 있다. 네놈과 사마 의원은 서로 다른 존재인 것이다. 그걸 인정치 않으려니, 이렇게 바보 같은 표정으로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그럴 시간에 약초 하나라도 더 들여다보거라. 에이, 못난 놈.”
송철의 말을 들은 왕수강은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다름을 인정한다는 건 매우 어렵지만, 지금 그것이 필요할 때라고 느껴졌다.
‘고마워요, 아저씨. 다시는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게요.’
멀어져 가는 송철의 모습을 보며 왕수강은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