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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의 괴 1권(13화)
제3장 변화(4)
작은 촛불이 어른거리는 방 안에서 한 가닥 붓 소리만이 소슬거리고 있었다. 단정히 단삼을 입은 채 무언가를 쓰고 있는 이는 사마경의였다.
개원(開元) 740년 1월 20일
이곳에 온 지 하루가 지났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무엇인가 남겨 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 나의 작은 재주를 보여 주었다. 훗! 놀라는 모습들이란 가관이 아니었다.
노 의원에게 일단 확실한 눈도장을 찍은 것 같다. 함께 들어온 꼽추 녀석은 별로 맘에 들지 않는다. 날 보는 눈빛이 몹시도 거슬린다.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다.
개원(開元) 740년 1월 22일
왜 무료로 그들을 치료해 주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런 일은 나라에서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긴 황제가 저 모양 저 꼴인데, 그들을 구제할 수 있을까만은 그렇다 해도 사비를 털어 가며 천한 이들을 돕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
저 정도 실력이면, 당금 황실에 들어가 높은 지위를 누릴 수도 있을 것인데, 하필이면 이런 짓이라니.
할아버지께서는 무슨 의미로 날 이곳에 보내셨을까?
단순히 의술을 배우라 보내시진 않으셨을 텐데…….
개원(開元) 740년 1월 24일
지겹다. 매번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은 너무 지겹다. 그냥 조용히 의술이나 공부하다 세가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다른 이들 앞에서 웃는 낯을 하는 것도 귀찮다. 그리고 지나가는 어투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와도 좋다 했다고, 매일 찾아오는 저 어린놈도 보기 싫다. 한 번 가르쳐 주면 외워야 할 것이 아닌가? 왜 그 쉬운 것을 모른다고 하는지.
개원(開元) 740년 1월 27일
만일 내가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벌써 쓰러졌을 것이다. 업무가 산더미처럼 밀려 들어온다.
빌어먹을 그 천한 것들 때문에 내 몸이 수고로움을 더해야 한다.
오랜만에 심법 수련을 해 본다. 몸속 가득 기가 차오른다.
하지만 부족하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이제 타인의 기를 조금씩 얻어야 한다.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얻어 낼 방법은 역시 진찰뿐이겠지.
스스로를 혼세마(混世魔) 장구령(張九齡)이라 칭한 노인이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의 나는 없을지도 모른다. 다 죽어가는 얼굴로 무공을 전수한 노인네의 얼굴이 떠오른다. 뭐 원수를 갚아야한다는 명분은 붙었지만 또 다른 이유가 어이없다. 내가 표리부동해서 세상의 근심으로 남겨두고 싶다니. 왜 세상을 원망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뜻에 맞게 살아가긴 싫다. 최소한 난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큼은 완벽하고 싶다. 다른 이의 칭송이 나쁜 것은 아니지 않는가?
개원(開元) 740년 1월 30일
매일 찾아오는 왕수강이란 녀석을 어떻게 하든 떼어 놓아야겠다. 스스로 나의 의동이 되길 자처한 것도 모자라, 매번 감시하듯 따라붙는 녀석 때문에 맘 놓고 숨 한 번 못 쉬고 있다.
집요한 놈. 어리게만 보았더니 보통 독종이 아니다. 머리도 좋지 않은 듯싶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요즘엔 곧잘 내가 가르쳐 준 것들을 외우고 있었다.
뭐 그래도 아직 미숙한 것만은 사실이지만, 마강영이란 놈보다도 내 신경을 더 건드리고 있다. 두고 봐야겠지만 조만간 수를 내어야겠다.
개원(開元) 740년 2월 3일
약고에 약을 주문할 일이 생겼다. 학시원을 맡고 있는 소 의원은 정해진 서식을 보여 주며, 반드시 이러한 서신을 동봉해서 약재를 받아 가라 이야기했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유치하긴 하지만 틀림없이 통할 것이다.
보기보다 성실한 왕수강 이 녀석은 이곳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다. 하인, 하녀 들 할 것 없이 의방 내 의원들조차 이놈을 감싸고 있다. 무엇이라도 하나 더 가르쳐 주려 하고, 하인들은 알게 모르게 그가 공부를 하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자신들의 희망이라고 하면서.
어림없는 소리지. 내 그리되게 두진 않을 것이다.
* * *
“수강아, 이리 잠시 오너라.”
“네, 부르셨어요?”
“약고에 가서 편자광(片仔廣)과 운남백약(雲南白藥) 석 푼만 가져오너라.”
“저기 사마 의원님, 의동들이 약고에서 약재를 가져갈 때에는 의원님들의 서신을 반드시 함께 가져가야 합니다. 그러니 필요한 약재 이름과 직인을 찍어 주시면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음, 지금은 일이 많고 조금 급해서 그러니, 나중에 내가 손수 서신을 전해 드릴 테니, 먼저 다녀오거라.”
“아무리 그러셔도 약고를 담당하고 계신 궁 의원님께서 약재를 내어 주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네 이놈! 다녀오지도 않고 그 무슨 변명이 많으냐? 뒤에 밀린 환자들이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일단 다녀오기나 하거라.”
“저기…….”
“일단 급한 환자가 우선이다. 그러니 서둘러 다녀오거라? 빨리 가지 않고 무엇을 하느냐? 나중에 내게 혼이라도 나고 싶은 것이냐?”
“아닙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약재 관리에 관해서는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 궁 의원이지만, 저렇게 서슬 사납게 구는 사마 의원에게 재차 안 될 것이라 말하기 곤란했다.
‘보나 마나 궁 의원님께서 경을 치실 텐데. 어떻게 하지? 규칙도 모르고 있냐 하시며 나만 꾸중을 들을 것이 뻔한데. 휴, 걱정이다.’
걱정을 뒤로한 채 그의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지붕 위에 소복이 쌓인 눈이 약고 위를 덮고 있었다.
“궁 의원님, 안녕하세요.”
“어서 오너라.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약고에 왔느냐?”
“새로 오신 사마 의원님께서 편자광과 운남백약을 석 푼씩 가져오라 하셨습니다.”
궁 의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직 이곳 도가의방의 규칙을 새로운 수련의에게 알려 주지 않았더냐?”
“아니옵니다. 벌써 규칙을 가르쳐 드렸사온데, 익숙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음. 내 이번만은 특별히 내어 줄 것이나, 다음부터는 반드시 서신을 가져와야 한다. 그리고 사마 의원에게도 말해 두거라. 알겠느냐?”
“네, 그리하겠습니다.”
두 약재를 손에 든 왕수강은 서둘러 사마경의에게 돌아갔다.
“사마 의원님, 여기 편자광과 운남백약이 있사옵니다.”
“아, 네 녀석은 분명 안 될 거라 하지 않았느냐? 이리 가져올 수 있거늘, 어찌 내게 거짓을 고한 것이냐?”
“그게 아니오라, 궁 의원님께서 다음번부터는 정식으로 절차를 밟지 않으면 약재를 내어 주지 않을 것이라고 사마 의원님께 말씀드리라 하셨습니다. 이번만 특별히 내어 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가져왔거늘, 어찌 안 된다고만 하느냐? 다시 가서 산자고 닷 푼을 가져오너라. 급하니 서두르거라.”
“네에? 또 가져오란 말씀입니까?”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조금 전에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서신을 주시지 않으면 약고에서 약재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약재를 함부로 남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리하신다 들었습니다. 그러니 사마 의원님이 직접 필요한 약재를 적어 주시면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왕수강은 자꾸 고집을 부리는 사마경의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저럴까? 곱게 자라서일까, 아니면 이곳 사정에 어두워서일까?’
“감히 네 녀석 따위가 나의 말에 반항하는 것이냐? 의동에서 쫓겨나고 싶단 말이구나. 네놈 눈에는 저 뒤에 늘어서 있는 이들의 아픔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냐?”
“아…… 아닙니다. 어찌 제가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라면 당장 다녀오거라.”
“네, 알겠습니다.”
약고를 향해 가는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바로 조금 전에 궁 의원이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찌 또 그냥 가서 약을 받아 온단 말인가?
문 앞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을 때였다.
“수강이가 아니냐? 또 무슨 일로 온 게냐?”
잠시 어디를 다녀오는지 궁 의원의 두 손에는 약재들이 가득 들려 있었다.
“마침 잘되었다. 나 좀 도와주거라.”
“네?”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있는 것이냐?”
왕수강은 두 손으로 약재를 받으며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저기 궁 의원님, 사마 의원님께서 산자고 닷 푼을 가져오라 하셔서…….”
“그래, 그럼 서식은 받아 왔겠지. 설마 또 안 가져온 것이냐?”
“그게…….”
궁 의원은 역정을 내며 말했다.
“내 분명히 전하라 했거늘, 어찌 말하지 않았느냐?”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지만 제 이야기를 도통 들으려 하지 않으십니다.”
“지금 당장 가서 사마 의원을 데려오거라. 너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말을 할 수밖에. 어서 다녀오거라.”
“네, 알겠습니다.”
아주 작은 일이 점점 커져만 가는 것 같았다.
왕수강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다시 사마경의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왜 빈손으로 온 것이냐? 나를 무시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사마 의원님. 궁 의원님께서 사마 의원님을 직접 모셔 오라 하셨기에 이렇게 그냥 오게 된 것입니다.”
“궁 의원님께서 나를……. 잠시 기다리거라. 내 다른 의원님들께 이 환자들을 맡아 달라 요청하고 올 터이니,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리거라.”
말을 마친 사마경의는 평소 꼴 보기 싫은 마강영에게 모든 환자들을 맡겨 버리고 자리를 떴다.
“앞장서거라. 내 직접 여쭈어 보아야겠다. 네 말이 사실인지.”
“네. 그럼 절 따라오십시오.”
‘후, 답답해 죽겠다. 내 말을 도통 믿지 않으니, 어떻게 한단 말인가? 오늘따라 정말 이상하구나.’
잠시 후, 두 사람은 약고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보게, 사마 의원. 내 분명 수강이를 통해서 정식 절차를 받아 약을 신청하라고 일러두었거늘, 어찌 이런 일을 벌인단 말인가?”
“송구스럽습니다. 궁 의원님. 하지만 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서식을 이렇게 써서 주려 하였는데, 저 아이가 그런 서식은 필요치 않으니 자신이 다녀오겠다 고집을 부리지 않겠습니까? 저도 그런가 싶어 처음에는 그냥 보내었는데, 진짜로 약재를 들고 와서 이런 것은 필요 없나 싶어 추가로 약재를 얻기 위해 재차 수강이를 보낸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사마경의는 환자의 상처 치료를 위한 약재 목록과 자신의 직인이 찍힌 서신을 꺼내었다.
그 서신을 받아 든 궁 의원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알고 있는 수강이는 결코 그런 녀석이 아닌데, 무슨 까닭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사마 의원이 날 속인 것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지?’
다시 한 번 왕수강과 사마경의를 쳐다보았다. 담담한 표정의 사마경의와 화가 난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왕수강의 모습이 보였다.
누군가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면, 둘 중 하나는 자신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선택을 해야 한다. 둘 중 하나를.
북궁세가의 둘째 공자가 부탁했다고 하나, 왕수강은 흔하디흔한 고아에 불구하지만, 사마경의는 뒷배경을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결과는 뻔했다.
“네가 감히 나를 능멸하는 것이냐? 약고에서 일하는 네가 나의 말을 무시하고도 온전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궁 의원은 둘 중 누가되었든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생각에 그 화를 왕수강에게 풀어 버렸다. 누가 옳고 그르건 그것은 이미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내 앞에서만 그리 행동했던 것이냐? 예의 바르고 정중하게 행동하면서, 뒤로는 이런 일을 하고 다니는 것이냐? 너의 방자한 행동을 내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왕수강은 어이가 없고 억울하기만 했다.
자신은 분명 사마경의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가 들고 있는 종이는 무엇이란 말인가? 언제 자신이 그리 말을 했단 말인가?
“궁 의원님, 저는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진짜로 말씀드렸어요. 거짓말하지 않았어요!”
따지듯 그렇게 궁 의원을 향해 소리쳤다.
“네가 네 죄를 뉘우치지 못하고, 나에게 항변하는 것이냐? 그렇다면 사마 의원이 들고 있는 이 서신은 무엇이더냐? 그가 일부러 내게 거짓을 말하고 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사마 의원님께서 거짓말하신 거예요. 분명 제게 서신을 주신 적이 없었어요.”
“그가 무엇 아쉬울 것이 있다고 이런 거짓말을 한단 말이냐? 감히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겠느냐? 그냥 잘못을 빌고 다음부터 이러한 일을 하지 않겠다 하면 그만일 것을, 꼭 나로 하여금 네게 몹쓸 짓을 하게 만들 셈이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사마경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눈이 웃고 있었다.
“왜 네게 이런 일을 행하는 것입니까?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요?”
왕수강은 궁 의원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사마경의을 노려보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너와 내가 서로 알게 된 지 이제 겨우 보름 남짓인데, 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너에게 위해가 되는 행동을 하겠느냐? 수강아, 어서 궁 의원님께 사과드리거라. 난 괜찮으니 어서. 혹여 이곳에서 쫓겨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 아니겠느냐?”
이곳에서 나갈 수도 있다는 말에 궁 의원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화가 난 표정의 그를 보니 겁이 덜컥 났다.
분하고 억울했지만, 그는 자신의 위치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 같은 의동들은 언제라도 이곳 도가의방에서 쫓겨날 수 있었다.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저기 눈웃음을 짓고 있는 사마경의와 자신과는 서로 다른 위치에 있다는 것을. 힘이 없으면 억울한 일을 당해도 어찌할 바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인지하게 되었다.
주먹을 꽉 쥐었다.
‘이번 한 번만이다. 난 의원이 되어야 하잖아. 이곳에서 쫓겨나서 거리를 떠돌 수는 없잖아. 왕수강, 이번 한 번만 참자.’
결심을 굳히자마자 그는 궁 의원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했다.
“궁 의원님, 제가 어리석어 그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궁 의원님,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아직 나이가 어려 치기 어린 행동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를 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진작 네 잘못을 청하면 되었을 것이 아니냐? 내 이번만은 사마 의원의 얼굴을 보아 참겠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에잉, 보기 싫다. 내가 부를 때까지 당분간 이곳에 오지 말도록 하거라.”
“네, 알겠습니다.”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장 나가거라. 사마 의원 자네는 나를 따라오게. 자네에게 알려 줄 것도 많고 하니.”
“예, 궁 의원님.”
공손히 대답하는 사마경의의 모습은 예의 바르고 정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람이 겸손하고 아랫사람을 아낄 줄도 아는군. 어린 나이에 의술까지 대단하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그가 날 속인 것이 아니라면 좋겠군.’
궁 의원은 묘한 시선으로 사마경의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