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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의 괴 1권(14화)
제3장 변화(5)


약고에서 나온 왕수강은 요 며칠 새 많은 눈이 내려 걷기도 쉽지 않은 길을 무작정 걸었다.
도가의방의 모습이 점점 멀어질쯤에야 비로소 걸음을 멈추고 눈밭에 자신을 맡겼다. 차가운 눈의 느낌이 왕수강의 가슴과 머리를 식혀 주었다.
한바탕 울고 싶었다.
저녁이 되었는지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제 나름의 법칙을 따라 운행하고 있었다. 짜증나고 답답하던 마음이 어느 정도 풀어지는 듯했다.
‘이곳도 마찬가지구나. 당 의원님 같은 좋은 분이 있는가 하면, 그 가증스런 사마경의 같은 놈도 있는 것을 보니, 도가의방 역시 내가 보아 오던 사납고 무섭던 세상과 다르지 않구나. 이곳에서도 살기 위해 나를 낮추고 숨겨야 하는 것인가?’
부모를 잃고 떠돌 때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실제로는 먹을 것이 없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세안이나 빨래를 하지 않고 지내는 경우가 많았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동정을 베푼 이들에게 찬양과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야 한다는 것도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도가의방에 온 이후로는 그런 생각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늘 따뜻한 배려 속에서 자신의 완쾌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잊고 있었다. 어떻게 자신을 낮추고, 다른 이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잊고 있었다.
‘사마경의 덕에 좋은 걸 배웠다. 타인의 눈에 띄는 것은 정말 좋지 않은 일이다. 뭐든 피해 갈 수 있으면 피해 가자. 더럽고 추악한 것 모두 다 피해 가자. 그러다 보면 끝이 보이겠지.’

* * *

“헉헉, 먼저 가, 약 매. 내가 뒤를 맡을게. 어서 가.”
“안 돼요, 사형. 같이 가요. 죽더라고 함께 죽어요. 난 사형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같이 가요.”
“안 돼. 어서 떠나. 우리 둘 다 죽을 수는 없어. 사매는 태산에 계신 사부님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하잖아. 제발 부탁이야, 어서 떠나.”
“사형 난 싫어요. 같이 가요.”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난 어차피 중독되어 목숨을 장담할 수 없어. 그러니 사매라도 어서 도망쳐. 그들이 금방 쫓아올 거야.”
“싫어요. 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예요. 사형 없인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강월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적약약을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미안해, 사매. 이러고 싶지 않지만…….”
적약약은 갑자기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안 돼요, 사형. 제발……. 어서 혈도를 풀어 주세요. 제발.”
강월은 소리치는 적약약의 아혈마저도 점하고는 그녀를 가시덤불로 가득 찬 숲 언덕 아래에 숨기며 말했다.
“바보 같은 약 매. 다음 생이 있다면 내가 꼭 찾아 갈게. 먼저 떠나서 미안해.”
강월을 바라보는 적약약의 눈에 슬픔이 내려앉았다. 주변에 쌓여 있는 눈꽃처럼 시린 물방울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와 그녀가 지나온 길 위에는 발자국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추적자들은 분명 발자국을 따라올 것이다.
그는 사매를 숨겨 둔 언덕 아래까지의 발자국들을 지운 뒤 그녀의 신발을 양손에 쥐었다. 그리고는 신법을 펼치는 중간 중간 땅에 두 손을 디디는 행동을 반복하였다.
‘얼마나 버틸지 모른다. 두세 시진 이후에 사매의 혈도가 풀릴 것이다. 그 전에 최대한 멀리 떠나야 한다.’
강월은 한계 이상의 내공을 끌어올려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 덕분에 한곳에 몰아 두었던 독이 그의 체내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눈이 가물가물거린다. 얼마나 달렸는지도 모르겠다.
저 멀리 마을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이 달빛에 어려 환한 웃음을 보여 주었다.

* * *

“이보세요. 여기서 이렇게 누워 계시면 큰일 나요, 아저씨.”
강월은 자신을 흔드는 손길에 눈을 떴다.
“쿨럭, 쿨럭. 내게서 떨어지게. 잘못하다 중독될 수도 있네. 헉…….”
한 움큼의 붉은 피가 흰 대지를 적셨다.
왕수강은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려다가 그 말을 듣고는 놀라 멀리 떨어졌다.
“중독……이요?”
깜짝 놀랐다. 오래 살아야 하는데, 중독이라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거리를 좀 더 벌렸다.
“헉헉!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겠는가?”
“부탁이오? 그보다 먼저 의방에 가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미…… 틀……렸네. 윽!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이네. 더 이상은 바라지도 않네. 단지 이 물건을 그녀에게…….”
“네? 누구에게 전해 주란 말인가요?”
“…….”
강월은 자신의 품에 손을 넣은 채로 그렇게 숨을 거두었다. 급히 서두르느라 미처 전하지 못한 물건이 못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는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그녀의 영상을 두 눈에 가득 담은 채로 그렇게 숨을 거두었다.
“이보세요? 괜찮으신 거예요?”
왕수강은 주변에서 막대를 가져와 사내를 툭툭 치며 말했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얻을 수 없었다.
‘가까이 가면 중독되어 저 사람처럼 죽을 수도 있는데, 이를 어떻게 한담. 그의 품속에 무언가 들어 있는 것 같은데, 저걸 그녀에게 주라는 것인가? 그녀는 또 누구인지?’
이름도 모르는 사람에게 물건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에 당황스러웠다.
이미 망자가 된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스쳐 갔지만, 왠지 두려웠다. 망령이 자신을 쫓아다닐까 걱정이 되었다.
“할 수 없지. 언젠가 주인이 나타나면 줄 수밖에.”
나뭇가지를 들어 죽어 있는 사내의 손에 들린 물건을 꺼내었다.
작은 옥함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는 겉옷을 벗어 그 물건을 잡고 감쌌다.
“시체는 어떻게 하지?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 것 같다. 혹시라도 중독되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피를 쏟으며 죽어 가는 사람을 보았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자신도 저리될까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도가의방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의방 내에서 언제나 자신의 편이 되어 주는 당의문을 찾는 것은 왕수강의 일상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당 의원님, 당 의원님.”
“왕 소제가 아닌가? 무슨 일로 그리 급히 나를 부르는가?”
“저기 의방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사람이 쓰러져 있습니다. 본인 스스로 중독되었다고 제게 말했는데, 아무래도 죽은 것 같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사람이 쓰러져 있다고? 지금으로서는 확인을 먼저 해야 하니, 자네가 앞장서게나.”
급히 서두르려던 당의문은 다시 한 번 생각하며 말했다.
“아니지, 잠시만 기다려 주게. 내 의원님들께 말씀을 드리고 나서 사람들을 데리고 가 봐야겠네. 여기 잠시 있게.”
“네, 알겠습니다.”
왕수강은 놀란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고자 했다.
“후…….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심법을 행해 보자.”
누구나 큰 심호흡 이후 자신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것보다 조금 더 정교하고 복잡한 체계를 갖춘 양기취정법은 신체의 기감의 활성화 말고도, 지금같이 마음을 가다듬거나 집중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가졌다.
무인들은 심법을 운행할 때 타인의 방해를 받게 되면 주화입마와 같은 위험한 지경에 처하기도 하지만, 양기취정법은 들숨과 날숨의 작은 변화를 주어 호흡과 마음을 일치시키는 과정을 중시하기 때문에, 장소에 구애 없이 심법을 행할 수 장점을 가지기도 했다.
잠시 동안 심법을 수련하고 나니 마음이 정리되었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사마경의의 행동과 죽음이라는 또 다른 일에 맞닥뜨리게 된 일, 자신이 얼마나 안일하게 세상을 보았는지도 깨닫게 되었다.
‘내 능력을 키워야 해. 지금처럼 해서는 안 돼. 실력이 없으면 학시원에 들어가긴커녕 쫓겨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사마경의와 같은 이들처럼 내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잖아.’
‘천재란 사람들은 사마경의와 같은 이들이겠지. 태사부님조차도 그 자질을 크게 칭찬하지 않았던가? 난 그들보다도 훨씬 못 하니, 밤낮없이 노력을 해도 그들과 같이 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포기하고 싶진 않아. 나도 언젠가는 그들처럼 의원이 될 테니까. 뛰어나진 못해도 그래도 좋은 의원은 될 수 있겠지. 노력한다면…….’
그의 상념이 이어질 때,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왕 소제, 얼른 나오게나. 지금 그 자리로 가 보세.”
왕수강이 밖으로 나오니, 하인 세 명이 들것을 들고 서 있었다. 그리고 당 의원과 또 다른 수련생인 오진서 의원이 자신의 가방을 들고 그를 재촉하였다.
“아직 살아 있을지 모르니, 어서 가자. 이 추운 날씨에 오랫동안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오 의원이 말했다.
“네, 저를 따라오세요.”
왕수강 일행은 눈이 수북이 쌓인 길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저 멀리 눈에 반사된 달빛이 한 인영의 모습을 비춰 주고 있었다.
“저기입니다. 너무 가까이 가지 마세요. 독에 중독되어 있다 했습니다.”
“음……. 내가 먼저 살펴보겠네. 어떤가?”
당 의원은 오 의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게. 난 주위를 좀 살펴보겠네. 혹여 다른 이가 있을지 모르니.”
당의문은 가방에서 얇은 가죽으로 만든 장갑을 끼고는 누워 있는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팔을 들어 진맥을 해 보았다. 피독수 위로 느껴지는 맥이 존재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반복해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휴, 이미 늦은 것 같네.”
“네가 한번 해 보겠네. 자네를 못 믿는 것이 아니라, 나도 궁금해서 그러네. 장갑을 낀 채로 진맥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러니, 이해해 주게.”
“그렇게 하게. 난 상관없으니.”
오진서는 두 눈을 감고 자신의 손끝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그 역시도 아무런 맥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자네의 말이 맞는 것 같네. 죽은 지 조금 되었네. 중독이 되었다 하니, 일단 조심해서 의방에 데려가세나.”
“허장, 자네는 가서 염을 할 장의사를 데려오도록 하게나.”
“네, 당 의원님.”
“나머지 두 사람은 시체를 들것에 들고 의방으로 가도록 하게. 독에 중독된 시체이니, 함부로 만지지 말고, 천을 사용해서 만지도록 하게. 그리고 사부님들께 말씀드려야 하니, 왕 소제는 우리를 따라오도록 하게.”
“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