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불사의 괴 1권(15화)
제3장 변화(6)
“그것은 아니 될 말입니다. 어찌 죽은 자를 욕보일 수 있단 말입니까?”
“좀 더 정확한 사인을 알기 위함인데,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래도 아니 됩니다. 아무리 신원 미상의 운구라 하더라도, 의학의 발전이란 미명하에 인간된 도리를 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정 의원,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지금 여기 죽어 있는 자는 알 수 없는 독에 중독되었네.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독이라면 상관없지만, 그렇지 못하니 문제가 되는 것일세. 만일 또 다른 사람이 중독된다면, 그때는 어찌할 텐가. 우리의 사명은 아픈 이를 치료하는 것이지, 유학적 관점에 얽매여 우리의 도리를 회피하는 것이 아닐세. 그러니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떤가?”
“무슨 말씀인지 저도 압니다. 하지만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 하여, 그 존엄성이 지켜져야 옳다고 봅니다. 현실적으로 이미 중독 상태가 오래되어 저희가 못 알아보는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전 반대합니다. 부검이라니요?”
도가의방을 실제적으로 이끌어 가는 이들은 학시원에서 수련의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는 다섯 명의 의원들이었다. 태사부인 노소평을 제외하고 그들의 의술은 이곳 도가의방 내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내경, 본초와 방제를 목적으로 한 약재학, 침구와 경혈, 임상 실험을 통한 상한론, 마지막으로 의경의 체계적 정립 등, 각기 다른 분야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 이들이 지금 갑자기 등장한 한 구의 시신으로 인해 갑론을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알지 못하는 미지의 독에 대한 학문적 열망과 유학적 관념 간의 갈등이라 보아도 좋을 정도로 이들은 지루한 논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태사부님께 두 가지 의견 모두를 말씀드리고, 그분의 의중을 따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내경을 담당하고 있는 하충민 의원이 말했다.
“후, 그분께서 허락하시겠습니까? 의원의 자세를 강조하는 그분이시라면, 분명 반대하실 것입니다. 게다가 이만한 일조차 우리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어찌 도가의방을 책임지고 있다 할 수 있겠습니까?”
부검을 반대하고 있는 정 의원 역시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모두 아시겠지만, 독 분야에서 태사부님을 능가하는 의원은 매우 드물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모르는 독이라 하여 태사부님조차 모른다고 이야기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무리하게 부검을 하는 것보다, 먼저 태사부님께 보여드리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중 가장 나이가 어린 구양청이 대답했다. 뛰어난 침술로 이미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구양청의 나이는 불과 서른 살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무시할 만한 의원들은 아무도 없었다. 태사부인 노소평의 뒤를 이을 뛰어난 인재라는 것이 도가의방 내의 평이었고, 실제로 그의 의술은 나날이 발전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가장 연장자인 소공탁이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이 사안에 대해 가부를 결정하고자 합니다. 우리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분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내경을 가르치고 있는 정 의원이 손을 들며 말했다.
“전 저희 스스로 해결했으면 합니다. 물론 부검 역시 반대합니다.”
“그럼 나머지 분들은 태사부님께 의견을 물어보는 것으로 알아도 되겠습니까?”
“그러합니다.”
“저도 찬성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이 문제를 태사부님께 보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 의원님께서는 관청에 이 사실을 통보해 주기 바랍니다. 나머지 결과는 추후 말씀드리겠습니다.”
“태사부님 안에 계십니까? 저 소공탁입니다.”
“들어오세요, 소 의원님.”
소공탁은 노소평의 거처를 보며 생각했다.
‘늘 한결같은 모습이시구나. 누가 믿겠는가. 치박에서 가장 큰 의방의 주인이 사는 거처에 있는 것이라고는 책장과 침상, 그리고 저 호롱불이 전부라는 것을. 그 흔한 고서 하나 보이지 않다니……. 후, 이러니 밑에 사람들이 사치하는 것을 보실 수 없으신 게지.’
“잠시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하셨는지 궁금하군요. 학시원의 일은 다섯 분이 모두 처리하고 계신데, 그보다 중요한 일인가 보죠?”
“네, 그러하옵니다. 어젯밤에 왕수강이라 하는 의동이 의방 너머 언덕 부근에서 독에 중독되어 쓰러진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희 다섯의 의술로도 그 독의 성분을 알 수 없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이 사실을 태사부님께 고하고, 의중을 여쭙고자 오게 되었습니다.”
노소평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다섯 분 모두 독성을 알 수 없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피부색에 검붉은 반점을 띠는 것을 보고 맹독을 지닌 해충에게 당한 것이 아닐까 했는데, 입가에 묻은 피의 색깔이 짙은 검정색을 띠고, 냄새가 역겨운 것이 학령초를 복용했을 때의 증상과 비슷하기도 하지만, 결코 그 독의 정체를 알 수 없었습니다.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들어 있다 하더라도 동시다발적으로 드러나기는 어려운 것으로 추측이 되어, 이렇게 태사부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음, 여기 오기까지 대략 다섯 분의 의견이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걸 알고 싶군요.”
“정 의원을 제외한 나머지 네 사람은 부검을 통한 사인 해명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이고요. 의원이 되어 모르는 독이 생겼다면, 반드시 그 성분을 알아내어 해약을 만들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에 저는 찬성을 하였습니다.”
“분명 정 의원은 유학적 도의를 논했겠군요. 휴, 제게 조금 시간을 주시기 바랍니다. 이 문제는 일단 제가 사체를 본 이후에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사체는 부패하지 않도록 한빙고에 보관시켰고, 다른 이들의 접근을 막도록 지시를 내렸습니다.”
“잘하셨어요. 혹시 이차 중독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니 조심해서 나쁠 것이 없겠지요. 참, 왕수강 그 아이가 최초로 발견하였다 했지요. 그럼 그 아이도 내일 제가 사체를 확인할 때 함께 불러오세요. 물어볼 것도 있을 것 같군요.”
“네, 그리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태사부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밤늦게 불쑥 찾아온 결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용서가 어디 필요하겠습니까? 저희 같은 의원은 시간보다는 환자가 우선이죠. 조심해서 가시고, 내일 아침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준비해 둘 것이 조금 있군요.”
* * *
거처에 돌아온 왕수강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눈앞에서 누군가가 죽어 가는 모습을 또 지켜봐야 했던 탓에 부모의 서글픈 주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깡마르고 피폐한 모습의 어미의 모습이 또다시 망령처럼 그를 괴롭혔다.
‘안 돼. 마음을 약하게 먹어선 안 돼. 약속했잖아. 이젠 스스로 살아가기로 약속했잖아.’
상념을 털어 내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심법을 운용했다.
혈맥 속에서 미미하게 움직이는 기들이 느껴졌다. 마치 잔잔한 바다 아래 숨죽이며 흐르는 물결처럼 그렇게 흘러 다녔다. 어미의 기를 느낀 아기처럼 그렇게 자신의 존재감을 표현하며 머리에서 발까지 면면히 이어 나갔다.
‘아, 이렇게 흐르는 것이구나. 내 몸속의 기들은. 나를 감싸 안으며 소리쳐 말했구나 자신이 이곳에 있다고.’
그동안 미처 느끼지 못했던 혈도들에도 끊임없이 기들이 뭉치고 가늘게 이어져 있었다. 눈앞에 공기가 물처럼 뭉쳐져 있는 것 같았고, 손으로 만지면 촉감을 느낄 수 있었다.
‘신기한 일이다. 이것은 무엇이지. 내 주변을 둘러싼 이것들은 무엇이지.’
그가 손을 내밀어 젓기라도 하면, 그의 손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일그러진 모양은 어느덧 원래 모습대로 변하고, 아니 원래 모습이라기보다 그냥 다시 뭉쳐진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왕수강이 느낀 기는 마치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자신만을 따라오라고 그렇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주변과 내부 육체에 대한 통찰은 또 다른 세상을 알리고 있었다. 수련한 지 불과 수개월 남짓한 시기에 이런 경지에 오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데, 이상했다. 타인보다 기에 민감해서인가, 아니면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인지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했다.
분명 태사부인 노소평의 말로는 몇 년 정도 수련하다 보면 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어떻게 된 일일까?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 순간 주변을 감싸고 있던 기들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 어떻게 된 일이지? 그 많던 기들의 느낌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계속된 의문이 더 이상 심법의 발전을 막고 말았다. 또 다른 기연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순간이었는데, 아직 어린 왕수강은 그런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였다.
왕수강은 다시 한 번 그런 경험을 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심법을 운용해 보았다. 조금 전보다 자신의 내부에 흐르는 기의 모습을 정확하게 집어낼 수는 있었지만, 그 이외에 다른 어떤 기를 느낄 수는 없었다.
‘아쉽다. 언제 또 그런 느낌을 가져 볼까?’
강렬하고 기분 좋은 느낌은 그의 뇌에 아로새겨졌다.
언젠가 그가 또다시 그런 경지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자신에게 기연이 다가왔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