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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의 괴 1권(17화)
제3장 변화(8)


“다들 모였군. 오늘부터 자네들과 나는 새로운 독에 대한 연구를 진행할 것이네. 그러기에 앞서 다짐을 받아 둘 일이 있네. 지금 하고 있는 실험을 외부에 노출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일세. 사체를 해부하여 그 사인을 밝힌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해서는 아니 되는 일일세.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러한 일을 해서라도 이 독의 정체를 밝혀내고, 그 해독제를 만들고자 하네. 이는 내 개인적인 욕심에서 시작된 일이라 보아도 무방하네. 그래서 자네들에게 먼저 당부해 두는 것일세. 알겠는가?”
“네. 약조 드리겠습니다.”
노소평이 이렇게 말을 한 것은 사체를 중독 시킨 이들이 혹시나 그들에게 위해(危害)를 가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 어린 배려인 동시에, 시체까지 해부한 비도덕적 의원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됨으로써 그들의 경력에 오점을 남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우선 자네들은 독에 대한 제반 지식을 쌓아야 하네. 나와 함께하는 시간 동안, 틈틈이 저 서책들을 살펴보도록 하게. 따로 시간을 내서라도 반드시 알아야 하네. 특히 제독과 용독에 대한 이해를 높여야, 비로소 나를 보조할 수 있을 것이네. 경의와 강영이는 특히 노력하거라. 아직 어린 너희들을 이 연구에 동참시킨 것은 친우에 대한 체면치레가 아닌, 너희들의 자질을 아껴서이니, 내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말거라. 알겠느냐?”
두 사람은 동시에 대답하였다.
“그리고 당 의원, 자네를 뽑은 이유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되네. 독에 관해서는 사실 자네의 가문이 나보다도 훨씬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다 생각되네. 그런 자네가 독에 대해 잘 모른다면, 어찌 가문의 인정을 받을 수 있겠는가? 앞의 두 사람보다도 더 심혈을 기울여 배움에 임해야 할 것이네.”
미처 인식하지 못한 노소평의 따뜻한 그늘을 이제야 바라보게 되었다. 자신을 이해해 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 여겼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마음 저편에 숨어 있던 여린 자신이 흐느껴 울었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냥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바라보았다. 점점이 수놓아지는 지면 위에 그동안의 회한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자네 아버지를 너무 원망하지 말게. 그분은 속이 깊으신 분일세. 자네에 대한 애정을 표현 못 하시는 것뿐이지, 늘 자네를 지켜보고 계실 것이네.”
아버지의 영상이 겹쳐졌다.
무심하던 그 눈길 어디에 나를 담아 두셨던가?
그럴 리 없다 생각되었다. 두 손에 힘이 들어간다.
반드시 뛰어난 의원이 되어 그 앞에 서서 말할 것이다. 당신이 인정하지 않았던 자식이 이렇게 돌아왔다고.
“이제 난 한빙고 안에 들어가 사체를 살펴볼 것이네. 그동안 자유롭게 서책을 보고, 혹여 궁금한 점이 있다면 나중에 물어보게.”
노소평은 이 말 한마디를 남겨 두고는 차가운 기운을 뿜고 있는 석실로 들어가 버렸다.
“저렇게 추운 곳에서 어떻게 부검을 하시는지 궁금하군. 춥지도 않으신가 보네. 혹여 무예라도 익히고 계신 건가?”
“자네들은 양기취정법을 배우지 아니하였는가? 태사부님께서는 그 심법을 오랜 시간 익혀 오셨다 들었네. 아마도 그 때문일 듯싶네.”
“제가 보기엔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심법이던데, 그것을 고집하고 익히신 것이옵니까?”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사마경의가 말했다.
“우리 같은 의원이 뛰어난 심법을 익혀 무엇을 하겠는가? 그저 남보다 신체에 존재하는 기에 대한 이해도만 높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태사부님께서는 이 심법을 꼭 익히라 하시네. 하지만 의방 내에 이것을 익힌 이는 아무도 없다고 말할 정도이네. 대부분이 무공 심법을 익히고 있지. 나 역시도 자네와 같은 생각으로 다른 심법을 익히고 있지만, 왠지 저 모습을 보니 후회가 되는군.”
당의문은 굳게 닫혀 있는 석실 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떤 길이던 당신의 그림자를 좇겠습니다. 태사부님.’

* * *

사마경의는 실험실 내부에 구비된 서책들을 하나둘 뽑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 많은 독들이 여기 쓰인 책의 내용 그대로 발현이 될까? 증상과 해독법까지도 일치하는 것일까? 궁금하다. 직접 실험해 볼 수도 없고…….’
그의 손에는 독초총람(毒草總覽)이라 쓰인 두꺼운 서책이 들려 있었다. 전해 내려오는 독초에 관한 서적들을 노소평이 따로 모아 둔 것으로, 지금 펼쳐져 있는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광초(狂草)는 키가 일 척에서 이 척 정도로, 주로 고산 습지대에 자생한다. 꽃은 사월에 흰 꽃으로 피었다가, 오월경 짙은 자색으로 바뀌며, 뿌리는 한 손마디 정도 크기로 자색을 띠고 있다. 약재로서 줄기와 뿌리를 주로 사용하며, 진통과 마비 작용을 한다. 복용 시 일시적으로 땀이 나지 않고 체온이 상승하며, 대략 다섯 푼 정도를 사용하게 되면 시각 장애와 더불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치명적인 맹독초이다.’
사마경의는 자신도 모르게 광초라고 적혀 있는 작은 항아리를 찾아보았다. 그 안에는 광초의 줄기와 뿌리를 말려 분말로 만들어 놓은 작은 옥함이 놓여 있었다.
‘일부 가져가서 강아지 한 마리라도 끌고 가 직접 확인해 봐야겠다.’
그는 옥함에서 아주 작은 분량을 꺼내어 작은 종이에 담았다.
다행히 마강영이나 당의문은 각자 서책에 몰두하고 있어 자신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전 잠시 볼일을 보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두 분께서는 여기 더 계실 것인지요?”
“네, 그리할 것입니다. 다녀오세요.”
밖으로 나온 사마경의는 서둘러 시전으로 나가 어린 강아지 두 마리와 먹이로 쓸 죽을 사 와 뒷산으로 끌고 갔다.
죽을 나누어 한쪽은 대략 두 푼의 광초를, 다른 한쪽은 석 푼의 광초를 풀었다. 그리곤 개들에게 먹이로 주었다.
하지만 개들은 그것을 먹으려하지 않고 자꾸 고개를 틀곤 하였다. 아마도 후각이 발달하여 냄새로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듯했다.
“이래선 실험이 안 되는군. 억지로라도 먹여야지.”
꼬리를 가랑이 사이에 넣고 떨고 있는 어린 강아지들의 입을 강제로 벌려 죽을 부어 넣었다. 그리고는 반응을 살피기 시작했다.
두 푼의 광초가 들어 있는 죽을 먹은 강아지는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제자리를 뱅글뱅글 돌며 괴로워했고, 석 푼 들어 있는 죽을 먹은 강아지는 처음엔 온몸이 빨갛게 되어 큰소리로 울다가 채 일각도 안 돼 제자리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배와 다리를 하늘로 하곤 그대로 죽어 버렸다.
“음……. 강아지가 어린것을 감안하더라도, 대략 일각정도면 어느 정도 효과가 나타나는군. 저 녀석도 얼마 못 가겠군. 그나저나 이렇게 해서는 독의 반응만을 살펴볼 뿐이니, 아무런 소용도 없군.”
전혀 떨림이나 죄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냉정한 눈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강아지를 바라보았다.
‘실험 재료로 이렇게 어린 동물들은 별 소용이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비싼 소나 말로 실험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떻게 한다……. 아직도 수많은 독들이 남아 있는데, 매번 이렇게 할 수도 없는데…….’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의방을 향해 걸어갔다.
마침 그의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얼마 전 자신의 장난으로 근신을 하고 있던 왕수강이었다.
‘음, 저 아이라면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겠군.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지만, 일단 약효를 최대한 줄여서 사용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머릿속에서 조부로부터 배운 약초나 독초를 희석하는 방법에 대해 떠올렸다.
‘저 아이에게 실험해 보기 앞서, 준비를 좀 해 두어야겠다. 중수(重水)를 구하는 것이 문제인데, 아무래도 본가에 연락을 취해 보내 달라고 하는 것이 좋겠군.’

사마경의는 본가에서 중수가 도착하기 전까지 독들을 일부 빼돌릴 궁리를 하였다. 독이 항아리마다 얼마나 들어 있는지 태사부조차 정확히 모르고 있으니, 나머지 두 사람의 눈만 피할 수 있다면 실험에 쓸 독들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 아니겠는가?
산공분 일부를 빼서 작은 옥함에 넣고 있는 순간, 실험실 문이 열리며 들어온 이는 마강영이었다.
평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과묵하고 폐쇄적인 그에게 약점이 될 만한 순간을 포착당한 것이다.
“지금 독을 몰래 빼내려 하는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보지는 않았겠지.”
“몰래 빼내긴. 태사부님께서 가져오라 하셔 여기 담아 가는 길인데.”
“그래? 한번 여쭈어 보아야겠군. 네게 산공분을 가지고 오라 하셨는지.”
말을 마친 마강영은 몸을 틀어 석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사마경의는 마강영을 향해 말했다.
“넌 궁금하지 않아? 이 독들의 쓰임새와 반응들이?”
걸음을 멈춘 마강영이 사마경의를 보며 말했다.
“무슨 의미지? 책에 분명 각각의 독에 관한 설명이 써 있을 텐데.”
“죽어 있는 지식이 무슨 소용이지? 내 눈으로 보고 내 손끝으로 확인해야 비로소 살아 있는 지식이 되는 것 아닌가? 여기 있는 서책의 내용을 다 이해한다 해도 실제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 어림도 없는 이야기지.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넌 의원 자격도 없는 놈이다.”
마강영 역시 사마경의의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몰래 도둑놈처럼 행동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도둑질까지 해 가면서 알고 싶지는 않다.”
“넌 아무것도 하지 마. 내가 다 할께. 도둑질도 실험체를 구하는 것도, 그리고 독의 희석까지도 내가 다 할께. 넌 그냥 독의 실험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 되잖아. 그럼 되는 것 아니겠어?”
마강영은 사마경의의 말에 흔들리는 자신을 느꼈다.
“사마경의 너 혼자 다 한다고? 난 그냥 입 다물고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이건가?”
“그래, 너만 가만히 눈감아 준다면, 우리는 저기 보이는 수많은 독들을 정복할 수 있어. 어때, 나와 함께하겠어, 아니면 저 문을 열고 들어가 태사부님께 내 잘못을 고해바치겠어? 이 자리에서 결정해 줘.”
잠시 고민하던 마강영이 말했다.
“실험체는 구한 것이 맞나? 그렇다면 네 의견을 따르지. 이렇게 좋은 기회도 드물 테니.”
은근슬쩍 사마경의의 말에 지지를 표명했다.
‘능구렁이 같은 자식. 손도 안 대고 코 풀겠다는 심보군. 어디 두고 보자. 내 이렇게 당하면 사마경의가 아니다.’
이를 갈며 사마경의는 말했다.
“의동(醫童) 중 한 명인 왕수강이라는 어린 녀석을 택했다. 물론 그 녀석한테는 비밀이지. 잘해 주는 척하며 그놈이 먹는 음식에 조금씩 독을 넣으며 반응을 살펴볼 것이다. 게다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고아라 했으니, 혹여 일이 잘못된다 하더라도 별 탈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넌 내가 독을 가지고 나갈 때, 태사부님이나 당 의원이 오는지 망을 봐주면 좋겠다.”
“한 배를 탓으니 그 정도는 해 주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