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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의 괴 1권(18화)
제3장 변화(9)


“수강아, 지금 사마 의원님께 가 보거라.”
아직 근신 중인 왕수강에게 의동들을 담당하고 있는 청인(靑仁)이 말하였다.
“네? 사마 의원님께서 찾아 계신다고요?”
“그래, 네게 사과할 것이 있다면서 찾으시더구나. 무슨 일이 있던 게냐?”
“아니에요. 별일 없었어요.”
며칠 전의 불쾌한 기억이 떠올랐다. 아직도 분하고 억울한 생각이 들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동이 되어 의원의 말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사마경의의 거처로 갈수록 의문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사과를 한다는 말조차 믿기 어려웠다. 분명 뭔가 있을 텐데, 불안하기만 했다.
“사마 의원님, 찾으신다 들었습니다. 저 왕수강입니다.”
“들어오너라.”
사마경의의 거처에는 마강영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작은 탁자에는 향기로운 용정차와 약간의 화과자가 담겨 있었다.
“내 이렇게 너를 부른 것은, 지난번 일을 사과하기 위함이다. 나의 오해로 인해 네가 고생을 했구나. 내일부터는 약고로 가서 일해도 좋다는 허락을 미리 받아 두었다. 그러니 맘을 풀거라.”
믿기 어려운 말에 왕수강은 당황하였다.
“이리 앉아 차랑 과자 좀 들거라. 내 사과의 의미로 주는 것이니.”
왕수강은 머뭇거리며 의자에 앉아 사마경의와 마강영을 쳐다보았다.
용정차 향이 그의 코끝을 간질였다.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차향이 입안 가득 퍼져 나갔다. 처음 먹어 보는 차이지만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마실만은 한 것이냐? 특별히 신경 써서 차를 우려내었는데, 더 들고 싶으면 먹어도 좋다.”
‘아주 특별히 신경을 썼지. 지금은 티가 나지 않겠지만, 저녁때가 되면 분명 반응이 나타날 것이다.’
사마경의는 웃음 띤 얼굴로 왕수강이 좀 더 마시길 권했다.
“그래도 되나요? 향이 너무 좋습니다.”
뭔가 의심쩍으면서도 방금 전 느꼈던 향기에 취해 왕수강은 차를 마실 욕심을 내었다.
“얼마든지 원하면 마셔도 된다. 그리고 편할 때 와서 내게 부탁하면, 언제든지 차를 내어 주마.”
“감사합니다, 사마 의원님.”
유심히 왕수강의 얼굴을 살펴보던 마강영은 어제 사마경의가 행했던 독의 희석 방법을 떠올렸다.
광초 분말 다섯 푼과 물 한 그릇을 서로 섞더니, 그 위에 중수를 한 그릇 퍼 넣는 것이 아닌가.
조금 후에 짙은 회색빛을 띤 물이 중수 아래로 가라앉고, 맑은 빛을 띠는 물은 중수 위로 올라왔다.
사마경의는 위로 떠오른 물을 병에 담았고, 중수와 광초가 섞인 그릇의 중간에 막아 두었던 마개를 열어 따로 중수를 걸러 내는 작업을 반복하였다.
물로서만 희석시키는 것이 아니라, 중수를 가지고 희석시키는 방법이 특이했다.
이렇게 하면 입자가 거의 드러나지 않기에 독의 사용 유무를 알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희석된 물은 원래 물보다 대략 십분지 일 정도의 효능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좋은 걸 배운 것이다.
왕수강이 마시는 차는 희석된 물로 상급의 용정차를 구해 끓인 것이다. 그래서 광초의 맛을 느끼기보다는 용정차의 맛을 진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 * *

“하……악, 갑자기 배가 왜 이렇게 아프지?”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왕수강은 갑자기 찾아온 고통에 몸부림을 쳤다.
처음에는 복통인 듯싶어 측간을 다녀왔으나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이제는 제대로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새우처럼 등을 구부리고 헛구역질이라도 하는 듯한 손은 땅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로는 가슴을 두들겼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어 보지만, 입과 코를 통해 들어오는 공기가 매우 희박하게 느껴졌다. 호흡곤란이 다가오자 눈앞에 사물들이 점점 멀어져 갔다.
“수강이 있느냐?”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누가 도와주세요…… 제발.”
가는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지만, 밖에서 들었을지는 미지수였다.
“안으로 들어가 보세. 아무래도 반응이 온 것 같네.”
바닥에 쓰러져 가슴을 두드리고 있는 왕수강의 모습을 본 것은 사마경의와 마강영이었다. 지금쯤 반응이 나타날 것이라는 생각에 궁금증을 견디지 못하고 와 본 것이다.
마강영은 일단 왕수강의 손목을 잡고 진맥을 해 보았다. 광초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맥이 급하게 뛰고 있었다. 호흡곤란으로 인해 심장과 폐 기능이 일시적으로 부하가 걸린 것처럼 보였다.
아마 여기서 조그만 더 나아간다면, 분명 사망에까지 이르게 될 것 같았다. 어린 탓인지 독초의 효능이 너무 과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어서 중화제를 먹여. 잘못하다가 큰 사단이 날 것 같단 말야.”
마강영은 큰소리로 사마경의를 향해 소리쳤다.
“조용히 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나도 지금 준비하고 있다고.”
사마경의는 품속에서 꺼낸 광초의 중화제를 물에 섞으며 말했다.
“비켜 봐.”
이미 정신을 잃은 왕수강의 입을 벌려 중화제를 먹이고는 눈을 감고 왕수강의 맥을 짚었다.
강한 맥이 잡혔다. 보통 광증이 있는 이들이 갖는다는 맥과 유사했다.
중화제의 반응이 생각보다 느렸다. 거칠게 뛰어노는 혈액의 흐름을 못 쫓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일단 이 아이를 데리고 자리를 옮기세.”
사마경의는 중화제를 먹은 왕수강의 상태가 호전되지 않자, 겁이 났다. 왕수강이 죽고 사는 것은 별일이 아니나, 혹시 자신의 행적이 드러날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난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내가 행한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차가운 마강영의 목소리에 사마경의는 분노의 시선을 보냈다.
“흥! 나 혼자 모든 것을 뒤집어쓸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만일 이 일의 전모가 밝혀진다면, 분명히 말하지만 네가 시켜서 모든 일을 행했다 그리 말할 테니, 잘 생각하는 것일 좋을 것이다.”
“증거가 없을 텐데, 난 아니라고 말하면 그뿐이다.”
“증거는 만들면 그만이다. 이것처럼.”
사마경의는 품속에서 ‘연구 일지’라고 쓰인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너와 내가 서로 공모하여 왕수강이라는 저 아이를 실험체로 쓴다는 내용이 들어 있지. 의심스러우면 한번 보는 것이 좋겠지.”
“그깟 종이 쪼가리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을 증거라고 말하기엔 부족하지.”
“아, 참 또 말을 안 했네. 네 침상 아래 그동안 모은 독들의 일부를 좀 가져다 두었지. 그리고 또 다른 곳에도. 나 혼자 당할 것이라 생각했나? 절대로 넌 빠져나가지 못해.”
마강영은 사마경의를 보며 헛웃음을 삼켰다. 자신이 약점을 잡고 있다 생각했는데, 이제는 전세가 역전된 것이다. 독사 같은 놈이라는 생각은 했었지만, 설마 그 대상에 자신을 포함시키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이번은 내가 진 것 같군.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사마경의.”
튀어나온 곱사등만큼이나 그의 마음도 굽어 있었다. 사마경의에 대한 적개심이 무럭무럭 커져 나갔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의동들이나 청인이 오기라도 하면, 우린 꼼짝없이 걸리게 될 것이다. 얼른 이놈을 들고 나가자.”
“어디로 간다 말이지?”
“여기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공림(孔林)이 있다. 거기에 가면 버려진 묘소 하나쯤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거기에 숨겨 두었다가, 날이 밝으면 새로운 장소를 물색해 보자.”
얼마 전 본가에서 중수를 받았던 장소를 머릿속에 그리는 사마경의였다. 몰래 받고 싶은 마음에 인적이 드문 곳을 선택했었는데, 그곳이 바로 공림이었다.
본래 공림은 곡부 인근에 있는 공자의 묘소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의 생애를 기리기 위해 만든 공림은 공자의 묘소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풀숲으로도 매우 유명했다.
사마경의가 가고자 하는 곳 역시 수백 장이 수풀로 뒤덮인 곳으로, 치박 사람들이 치박의 공림이라 부르는 곳이었다. 주로 고관대작들의 무덤이 들어선 이곳은 일반인들의 무덤인 토묘가 아닌 석곽묘가 주를 이뤘다.

사마경의, 지독하게 운이 좋은 놈이란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의방을 빠져나오는 동안 그 많던 의동과 의원, 심지어 환자들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자신은 사방을 경계하며 걷고 있는데, 이놈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듯 어깨 위에 왕수강을 걸쳐 메고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다행히 검은 구름이 달빛을 잠시 막아 주고 있었다.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감싸고 몸 안으로 들어왔다. 공림 주변을 감싸고 있는 음습한 기운까지 더해지자 두 사람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길, 으슥한 곳을 잘도 찾는군.”
사마경의를 노려보며 마강영이 소리 죽여 말했다.
“그렇게 불평만 하지 말고, 서둘러 빈 석곽묘나 찾아봐. 이놈을 그냥 던져두고 갈 수는 없잖아?”
“무슨 소리야? 여기 던져두고 가는 것 아니었어? 다 죽어 가는 놈을 일부러 석곽묘에 안치시켜 줄 필요는 없잖아?”
“모르는 소리를 하고 있군. 만에 하나 이놈이 살아난다면, 우리는 좋은 실험체를 따로 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고, 죽는다면 시체를 들키지 않고 처리할 수 있는 장점이 있게 되지. 게다가 안장까지 시켜 줬으니, 우릴 원망하지 않을 것이 아닌가?”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저리 냉정하게 말하는 사마경의의 모습이 두려워졌다. 게다가 왕수강을 둘러업은 상태로 의방에서 이곳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모습은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잘도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군. 무공까지 익히고 있을 줄은 몰랐는걸.”
마강영은 자신의 발걸음을 너무도 쉽게 따라온 사마경의를 보며 말했다.
“흥!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둘은 서로 신경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주변을 살펴보며 빈 석곽묘를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저기, 저기 한번 가 보자.”
마강영이 가리킨 석곽묘는 세월의 변화를 무수히 겪은 듯 무덤 앞에 세워 놓은 십이지상의 모습이 마모되어 그 형태를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도굴꾼들에 의해 여기저기 파헤쳐진 흔적이 역력한 석곽묘의 내부는 지하로 깊게 내려가는 계단 형태를 띠고 있었으며, 그 끝의 공간은 의외로 넓고 따뜻했다.
“누가 살고 있는 것 아니야?”
“이 먼지들을 봐라. 누가 살고 있다면 이런 먼지가 있을 수가 없지. 게다가 네 뒤를 봐라. 우리가 걸어온 발자국 모양이 얼마나 선명한지.”
한심하다는 듯 사마경의는 마강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희미한 어둠을 뚫고 먼지가 수북한 입구에는 그와 자신의 발자국들이 오롯이 남아 있었다.
‘제길, 당황해서인지 계속 책잡힐 행동을 하는구나. 사마경의 네놈에게 당한 이 빚은 반드시 갚아 주마.’
“일단 저기 놔두는 것이 좋겠군. 묘지가 안쪽 깊숙이 있어서 정말 안성맞춤이야. 이놈이 죽지 말고 계속 살아서 우리 실험체가 되어 줄 수만 있다면, 더욱 좋을 텐데.”
사마경의는 왕수강을 돌로 만들어진 평평한 탁자 위에 내려 두며 말했다.
“일단 진맥이라도 해 봐야겠군. 중화제를 먹이고 나서 어떤 반응이 있었는지…….”
손목을 두 손가락으로 감아 눈을 감고 조용히 집중해 보았다. 의방에서보다 많이 가라앉은 보통 맥이었다.
“아직 살아 있다. 운이 좋은 놈이군.”
어둠 속에서 흰 이를 드러낸 사마경의를 바라보는 마강영은 꼭 악마 같다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한술 더 떠 왕수강의 온몸의 혈도를 점하는 동시에 자신의 의복의 일부를 잘라 왕수강의 두 손목과 다리, 배 등을 석탁에 감아 묶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마지막으로 입에도 재갈을 물리는 모습에 마강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린놈이 독해도 너무 독하다. 이건 상종 못 할 놈이구나.’
“일단 의방으로 돌아가지. 내일부터는 정말 바빠지겠어.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실험할 수 있으니, 정말 기분 좋군.”
사마경의의 말이 석곽묘 내부를 진동시키며 울려 퍼졌다.

* * *

“헉…… 또 같은 꿈인가?”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조부와 아비가 들어오지 말라고 한 말을 들었어야 했다. 코끝을 찌르는 혈향과 누워 있는 사람의 절망적인 모습. 호기심에 살짝 지켜본 문틈 사이로 그에게 늘 웃음을 선사해 주던 고 씨 아저씨의 고통스런 표정이 보인다.
“이래서는 답이 없습니다, 아버님. 그 사람을 살릴 방도가 없습니다.”
고개를 숙인 아비 사마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륜을 어겨 가며 하는 일이다. 나약한 생각을 먹으려거든 처음부터 하지 말았어야 한다. 이미 시작한 일, 끝을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수술 후 지혈을 할 방법이 마련되지 않는 한, 더 이상 이런 일은 의미가 없습니다. 수술 시 필요한 마취제의 사용량을 알아내는 데에만 열 명이 넘는 희생이 필요했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희생이 있어야 그 사람을 살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며 말하는 아비의 어투에는 울음이 묻어났다.
“약해지지 말거라. 모든 업보는 내가 짊어지고 간다. 넌 경의와 며늘아기만을 생각하거라.”
“제가 시작을 하였으나, 이것이 올바르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멈추는 것이…….”
“닥치거라. 그런 마음으로 어찌 네 아내를 살릴 수 있단 말이더냐. 사람의 배를 갈라 수술에 성공한 사례가 있거늘, 이리 나약한 말만 하고 있단 말이냐. 정아, 힘을 내거라. 반드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로도 난 몇 번씩 그 둘의 일상을 훔쳐보았다. 외부 혹은 내부에서 사람이 없어지면, 어김없이 수술대에 올라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 아침, 어미가 보이질 않았다. 내당과 정원, 심지어 측간에조차 어미가 없었다.
가슴이 유달리 뛰는 것이 무언가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부와 아비가 늘 사용하던 수술실로 다가갈 즈음, 누군가의 절망 어린 울음소리를 들어야 했다.
“안 돼. 이렇게 가면 난 어떻게 하라고. 여령, 제발.”
문틈으로 들어온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수술대 위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의 어미였다. 얼굴은 평온했고, 한 손으로 아비의 손을 잡고 있었다. 복개된 상태가 아니었지만, 배를 덮고 있는 천은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엄……마.”
작게 중얼거리다 소리쳤다.
“엄마! 엄마!”
문을 열고 들어가 어미에게 다가갔다. 그동안 수술대 위에서 그랬던 사람들처럼 어미의 얼굴에도 죽음이 깔려 있었다.
무표정한 그 얼굴을 아직도 기억한다.
“경의야……. 네가 어떻게 여길…….”
“아빠, 엄마는……. 엄마는 다른 사람처럼 죽은 거야? 왜 말이 없어? 왜 말이 없냐고.”
“경의야, 그건…….”
“엄마 살려 내. 엄마 살려 내. 내가 다 보았어. 여기서 죽어 나간 사람들 다 보았단 말이야. 어서 엄마 살려 내.”
“경의야, 네 어민 죽을병에 걸려 어쩔 수 없었다.”
조부의 음성이 들렸다.
“거짓말. 할아버진 거짓말쟁이야. 엄마 안 아팠단 말이야. 어제 나랑 놀아 줬단 말이야.”
손자의 애태우는 모습이 가슴에 사무친다.
수없는 죄악을 저지르면서까지 살리려 했던 며늘아기의 죽음은 결국 그의 노안에서 눈물을 만들고야 말았다.
“가슴에 묻거라. 네 어미를 살리기 위한 네 아비의 노력을 가슴에 묻거라.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돌볼 수 없었던 네 아비의 무능함을 가슴에 묻거라. 넌 그리 살아서는 안 된다. 반드시 뛰어난 의원이 되어 이런 아픔을 겪지 말거라.”

그때부터였다. 어김없이 잠이 들면 수많은 이들이 자신에게 달려들었다. 때로는 피를 흘리는 모습으로, 때로는 고통을 호소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붙잡고 하소연하였다.
기억력이 좋다는 것은 반드시 살아가는 데 있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여섯 살 때의 기억이 지금의 사마경의를 지배한다.
그 끔찍했던 기억들은 그의 머릿속에 남아 속삭인다. 네가 살아가는 동안 넌 날 버릴 수 없다고.
“후, 그 녀석은 지금쯤 깨어났겠지.”
잠시 왕수강을 생각해 보았다. 부모를 잃고 고아로 떠돈 그 아이의 고통 너머로 자신의 어미의 얼굴이 겹쳤다.
“너로 인해, 난 좀 더 높은 곳을 향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치스러운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난 결코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지 않을 것이기에, 네게 미안해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