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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의 괴 1권(20화)
제3장 변화(11)


실험 이십일일째.
오랜 기간 장복을 통한 실험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 같다.
왕수강의 신체가 버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혈도 곳곳이 줄어들거나 막힌 곳도 생겼으며, 어떤 혈도는 독초의 약 기운이 가득 찬 곳도 있었다. 아마도 한 달 이상 버티기는 힘들 듯싶다.
그래도 용케 정신을 잃지 않고 있다. 지독한 눈빛이 마음에 걸린다.
오늘부터는 한 시진 이내에 효력이 나타나는 강한 독들을 써 봐야겠다. 중화제를 충분히 준비해 두고, 강도를 높여 가며 실험을 할 예정이다.
일단 사용될 독들은 천남성(天南星), 황갈분, 반하(半夏), 석산(石蒜)…….

일지 속에는 그동안의 실험 과정과 결과물들이 들어 있었다. 대부분이 노소평이 정리해 둔 내용들과 일치했다.
약간의 오차가 존재하긴 하지만, 그것은 왕수강의 신체적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아무리 독을 먹인 후 중화제를 복용시켰다 하지만, 몸속에 완전히 독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독을 투여하는 일이 반복되었으니 오차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매번 감탄하며 서책과 실험 내용을 비교했을 정도로 노소평이 정리한 내용은 대단한 것이었다.
더 이상의 실험이 불필요하다고 느낀 것도 이 때문인지도 몰랐다.

“사마경의, 이제 슬슬 정리를 해야 하지 않을까? 지난 한 달간 우리가 실험한 독이 백여 가지가 넘는 것 같은데. 아직 많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 독들은 사용이 불가능한 것들뿐이잖아.”
“하긴 남아 있는 독들은 워낙 귀하고 양도 많지 않아서 약당에서 항상 확인을 하여 함부로 빼낼 수 없으니,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겠지. 여태껏 독을 쓰고 바로 해약을 주었지만, 이번에는 치사량만큼 먹이고 반응을 조금 살핀 후 떠나자고.”
“왕수강 그 녀석이 불쌍하긴 하지만, 우리의 행적을 드러낼 수는 없는 일이지. 녀석과 함께한 지난 한 달간, 우리의 독에 대한 이해도가 남달라졌으니까, 기왕이면 편안한 죽음을 선사하자고. 그게 그나마 도리를 다하는 것 같군.”
사마경의는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에 대한 실험 내내 자신보다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 왕수강을 괴롭힌 것이 마강영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그에게 도리를 다하자니.
어찌 되었든 이제는 마무리를 할 시간이었다. 더 이상은 실험을 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왕수강을 살려 두기엔 부담이 너무 컸다. 우선 이 일의 전모가 밝혀지는 것이 주된 이유였고, 매번 실험을 할 때마다 보이는 왕수강의 독기 어린 눈빛 또한 거북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편안한 죽음이라……. 초혼산(招魂酸)이면 가능하겠군. 잠을 자듯 그렇게 죽음을 맞이할 테니,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연구 일지를 보며 중얼거렸다.

사마경의와 마강영이 석곽묘에 나타난 것은 술시(戌時)가 넘어선 시각이었다.
하늘은 구름이 잔뜩 끼었는지 달빛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왕수강, 이제 너와 인연을 끝맺음할 때인 것 같구나. 너로 인해 많은 이로움을 취했으니, 죽음만큼은 편안하게 해 주마.”
누워 있는 왕수강의 모습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동안 먹은 독의 부작용인지 듬성듬성 머리카락이 빠져나간 모습에 눈과 코로 싯누런 고름이 나오고, 여기저기 검붉은 반점들이 수도 없이 나 있었다.
게다가 한 달 이상 제대로 먹지 못해서인지 한동안 균형 잡혔던 신체는 다시 왜소한 모양새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초혼산이라는 것이다. 주로 찬 성분의 약재와 독초로 만들어지지. 그래서 복용을 하게 되면, 맥박이 점차 느려져 잠에 빠지게 되고, 그 양이 많다면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내가 네게 베풀 수 있는 마지막 배려이다.”
사마경의는 왕수강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초혼산을 먹이는 그의 손끝이 가볍게 떨린 것은 착각일까?
‘이렇게 끝나는 것일까? 그동안의 몸부림은 다 헛된 것이 된 것인가?’
왕수강은 그동안 악착같이 버티며 놓지 않았던 정신의 끈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밀려오는 수면의 달콤한 유혹을 견디기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 있었다.
사마경의는 왕수강의 맥을 짚어 보곤, 점차 잦아드는 그의 생명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가지. 다시는 이곳에 올 일이 없을 것 같군.”
서둘러 떠나가는 발걸음에 찹찹함이 그려진다.



제4장 구사일생(九死一生)(1)


선조 때부터 이어 온 인연의 끈으로 간곡한 부탁을 드립니다. 비록 지금의 소림이 남과 북으로 갈려 서로의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으나, 본래 하나의 뿌리가 아닙니까? 혜능 육조께서 일선에서 물러나신 지 이제 삼십여 년, 마조 대사의 큰 그늘 아래 소림이 다시 하나의 목소리를 내길 기원합니다. 해서…….

마조도일(馬祖道一), 선사 혜능의 유지를 계승 발전시킨 당(唐)나라 선종(禪宗)의 완성자로 알려진 그는, 한 편의 서신을 둘러싸고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본래 파격적인 행보로도 유명한 그가 이토록 고민하는 이유는, 서신에서 윗대의 인연을 앞세워 소림 보물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대가는 있었다. 그것은 재화였다.
현재 소림은 남종이 우세하다 하나, 그동안 북종과의 다툼으로 인해 건실하게 뿌리내릴 수 있는 자금이 많이 부족한 상태였는데, 그것을 일거에 해소할 수 있을 정도의 보시를 약조한 것이었다.
“아미타불. 본래 재물은 외물에 불과한 것. 하나 지금의 소림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 역시 재화이니, 더 이상의 고민은 어리석은 짓이로다.”
그는 방장실을 나오며 사미승을 불러 자신의 제자인 대지(大智)를 불러오도록 하였다.
대지는 본래 남악법조율사(南岳法朝律師)의 가르침을 받아 승려가 되었으나, 불교의 교리에 얽매여 계율을 중시하는 북종의 선(禪)에서 탈피하고자 자신에게 가르침을 청한 인물이었다.
사려 깊은 그는 제자이기 이전에, 자신과 불법을 논의하는 친우였고, 지금과 같은 고민을 함께할 수 있는 오랜 지기이기도 하였다.
“스승님, 불러 계시온지요.”
“회해(懷海), 내 자네를 부른 이유는, 이것을 가지고 산동의 북궁세가를 다녀와야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일세. 북궁세가는 혜가 선조 때 소림의 수많은 건물과 분파 들을 중축하면서 가장 많이 신세를 지기도 한 곳이지. 그곳에서 소림에 부탁을 해 왔네. 대환단(大還丹)과 소환단(小還丹)을 각기 한 알씩 얻기를 희망하고 있네. 아무래도 자네와 사대 금강이 다녀오는 것이 좋을 듯하네. 소문이 나지 않도록 조용히 다녀오게.”
“예, 그리하겠습니다. 지금 바로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가는 길에 만나는 인연을 소중히 하게. 또한 스스로의 계율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진리는 인간 본성에 따라 펼치는 일상생활 속에 존재한다네. 그러니 자네는 늘 일상을 살피고,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것이네.”
“명심하겠습니다, 스승님.”

소림을 떠나온 지 벌써 십여 일. 아직 겨울의 잔재가 가시기도 전에 여기저기에서 서둘러 새 생명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산새들도 부지런히 겨우내 먹지 못했던 배를 불리느라 여념이 없었고, 나무들도 자신의 본래 빛깔을 찾으려 초록 눈망울을 선보이고 있었다.
“사형, 북궁세가에서 무슨 일로 성약이 필요한 것일까요?”
사대 금강의 하나인 대오(大悟)가 대지를 보며 물었다.
“글쎄. 아마도 내력을 끌어올리기 위함이거나, 지병을 고치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그저 이것을 전해 주는 것으로 본래의 소임을 다하면 되는 것일세. 그 이상은 관심을 두지 말게. 각자 사정이 있는 것이고, 그것을 궁금히 여길수록 번뇌만 쌓이니, 자네의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일세.”
“후, 사형이 그리 말씀하시니 드릴 말이 없어지지 않습니까? 어쩜 그리 스승님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말을 할 수 있는지, 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대지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언제 봐도 활달한 대오는 법명과는 달리 깨달음이 늦는 편이었다. 하지만 본래 성품이 밝고 선한 데다가 마음이 순수해, 가장 먼저 불법의 깨달음을 얻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사제였다.
돈오(頓悟), 그 말에 가장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일순간의 깨달음은 어떻게 찾아오는 것일까? 점수(漸修)를 통하지 않고 돈오에 오를 수 있을까? 끊임없는 수행이 정말로 필요하지 않는 것일까?
이것이 북종과 남종의 차이일까?
수많은 생각들이 그를 혼란케 했다.
“사형, 사형.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아, 미안하이.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말았네. 그나저나 하늘이 심상치 않네. 이러다가 비를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군.”
하늘에는 어느새 검은 먹구름이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었다. 아마 머지않아 비를 뿌릴 태세인데, 지금 그들이 가는 길에는 쉴 만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사형, 저기 풀숲이 우거진 곳에 가 보는 것이 어떨까요? 잠시 비를 피할 수 있는 사당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서두르는 것이 좋을 듯하네. 혹여 비로 인해 성약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어서 쉴 만한 곳을 찾아보세. 자네들도 각자 돌아보고.”
“네, 사형.”

* * *

피를 흘리며 자결한 시체 옆으로 한 인영이 서둘러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아미타불, 이런 내가 조금 늦어 버렸구나. 시주, 어째서 이런 잔혹한 일을 벌인단 말입니까?”
‘소림승.’
고호명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두렵지는 않지만, 소림이라는 명성은 함부로 여길 것이 아니었다. 소림이 세워진 지 불과 백오십여 년이지만, 그동안 그들이 보여 준 무공의 발전은 강호의 한 축으로 성장할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다.
달마 대사의 면벽 이후 만들어진 소림 기예는 이 대조 혜가와 육 대조 혜능을 거치면서 확고한 무예로 자리 잡았으며, 북종과 남종의 대립은 소림 무공이 한 단계 더 발전해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현 무림에서 그들의 비위를 거스를 만한 인물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런 소림승이 자신의 앞을 막은 것이다.
“흥! 전후를 살피지 않고 나를 탓하는 것이오, 대사?”
“생명은 숭고한 것입니다. 어찌 이런 살수를 펼쳐 그 존재 가치를 상실케 한단 말입니까?”
“남의 물건을 탐하는 자, 그 손을 자르고, 남의 목숨을 탐하는 자, 자신의 생명을 받쳐야 한다. 이것이 당률이오만. 그리고 강호의 율법이기도 하지요. 제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물건을 잃어버렸다면, 그 죄를 묻는 것이 옳지 않겠소, 대사?”
“외물(外物)이 어찌 생명보다 중하다 여기십니까? 이로 인해 다른 이를 해하는 것은 불필요한 살생일 따름입니다.”
고호명은 갑자기 짜증이 밀려왔다. 자신 앞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 저 소림승에게 강한 살기를 표출하였다.
“소림은 녹불옥장을 잃어버렸더라도 외물이니, 훔쳐 간 이를 용서할 수 있겠구려.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소. 여태껏 내 눈 밖에 난 이를 살려 둔 적이 없소, 대사. 그것이 소림이라 할지라도 나를 막지 못하오.”
스스로 자결을 했다는 구차한 변명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자존심이 용납하질 않았다.
“아미타불. 시주께서 소림을 언급하셨으니, 저도 물러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소림의 명예는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침통한 표정의 대오는 나한기공(羅漢氣功)으로 내식을 가다듬으며 고호명을 바라보았다.
고호명의 손에 들린 가는 일섬사가 대오의 가슴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 나가는 동시에, 대오와의 거리를 두기 위해 뒤로 물러났다.
대오는 소맷자락에 기를 넣어 다가오는 일섬사를 쳐 내며 앞을 향해 돌진을 하였는데, 이는 그가 익힌 소림오권(少林五拳)이 근접 박투에 능한 권법으로, 이렇게 거리를 벌린 상태에선 아무런 이득을 취할 수 없는 무공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자신이 쳐 낸 일섬사의 끝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그의 머리로 날아드는 것을 느낀 대오는 깜짝 놀랐다. 일섬사를 쳐 낼 때 내공을 그리 많이 주입하지 않았다 해도, 이렇게 쉽게 방향을 틀어 자신을 공격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대오가 뒤에서 다가오는 일섬사를 뒷발로 가볍게 차올려 잠시 주춤한 사이, 고호명은 또 다른 일섬사를 꺼내어 대오의 등을 향해 발출했다.
등으로 다가오는 이질적 기운을 느낀 대오는 급히 자세를 낮추며 앞으로 다가섰다.
마치 뱀이 먹이를 향해 돌진하듯 고호명을 향해 다가간 대오는 한 손을 갈고리처럼 뻗어 고호명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갑작스레 좁혀진 거리에 고호명은 인상을 쓰며 발을 굴러 하늘로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타격하지 못한 채 허공에 떠 있는 두 개의 일섬사를 거두어들이면서, 발아래에 있는 대오를 향해 다시 한 번 강하게 휘둘렀다.
채찍처럼 휘어져 다가오는 일섬사는 소리를 달고 대오를 향해 나아갔다.
목표를 잃어버린 대오는 뒤에서 다가오는 일섬사를 향해 내공을 주입한 소매로 쳐 내고자 했다.
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