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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의 괴 1권(22화)
제4장 구사일생(九死一生)(3)


“협박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시주께서 선행을 베풀어 주십사 드리는 말씀이지요.”
부드러운 말투와는 달리 그 내용은 사뭇 고압적이었다.
‘한둘이라면 해볼 만하지만, 저들 다섯을 이겨 낼 수는 없다.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은 이놈의 생명을 위협해서 길을 트는 길뿐이구나.’
고호명은 이를 갈았다. 소림이란 이름이 깊이 새겨졌다.
“대사, 길을 비켜서시는 것이 좋을 것이오. 생명의 귀함을 그리 강조하셨으니, 이놈의 생명을 돌보아야 하지 않겠소.”
고호명은 칼로 공거래의 목을 슬쩍 그어 피를 내며 말했다.
“아미타불. 길은 비켜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를 먼저 놓아주시면 비켜 드리지요.”
같은 말의 반복이다.
고호명은 최후에 내단을 포기할 각오를 해야 했다. 눈앞에 보이는 소림승은 결코 물러설 태세가 아니었다.
“마지막이오, 대사. 이놈의 목숨을 아낀다면 비켜서시오.”
“대사님, 저는 상관…….”
고호명은 서둘러 공거래의 아혈을 짚었다. 쓸데없는 말을 지껄여 자신의 일을 방해하려는 공거래가 더없이 미워졌다.
한 발씩 입구를 향해 걸었다. 언제든지 출수할 준비를 하면서 움직이는 고호명의 걸음에 따라, 대지와 사대 금강의 위치 또한 바뀌었다. 좁은 입구를 등 뒤로 한 채로 맨 앞에 대지가 그 뒤를 사대 금강이 늘어섰다.
“악!”
갑작스런 외침에 고호명은 뒤를 돌아보았다. 시체인 줄 알았던 인영이 온몸을 비틀면서 고함을 질렀다. 사지는 묶여 있는 상태로 좌우로 흔들면서 고통을 호소했다.
‘설마!’
고호명은 공거래를 붙잡은 채로 서둘러 석탁으로 다가갔다. 칼을 쥔 오른손으로 고통으로 얼룩진 인영의 손목을 잡았다.
뜨거웠다.
“감히……. 네놈이…….”
고호명이 공거래의 목을 쥔 왼손에 힘을 주려 한 순간, 등 뒤로 강한 바람이 다가왔다.
왼손에 힘을 넣는 순간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고호명은 다가오는 힘을 피하기 위해 공거래의 몸을 뒤쪽으로 돌리는 동시에, 오른쪽 칼을 들어 공거래의 배를 찌르고자 했다.
그때 공거래의 등 쪽에 작은 충격이 이는 듯하더니 대지가 어느새 자신의 옆에 다가서 있었다.
칼을 그대로 찌른다면 왼쪽이 무방비에 놓이게 될 것이 뻔했기에 고호명은 어쩔 수 없이 공거래를 자신의 옆으로 끌어당기고 쥐고 있던 칼로 그의 목에 가져다 댈 수밖에 없었다.
“대사, 자꾸 날 방해할 것이오?”
살기가 가득한 고호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미 내단의 행방은 밝혀진 듯합니다. 그를 놓아주시지요, 시주.”
‘사제, 대광(大廣)과 함께 석탁으로 빨리 오게. 잘못하면 저 어린아이가 죽을 수도 있네. 서두르게.’
대지는 고호명에게 대답하며 대오에게 전음을 보냈다.
“흐흐, 내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이놈만큼은 살려 둘 수가 없소. 그것이 어떤 것인데, 저따위 다 죽어 가는 시체에다 복용시킨단 말이오.”
공거래의 목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얼굴이 점점 붉게 변하는 공거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지는 왼쪽으로 한 보를 내딛고는 오른발로 고호명의 왼쪽 발을 내리찍음과 동시에 공거래를 향해 칼을 겨누고 있던 고호명의 가슴을 향해 일 장을 내질렀다.
조금만 내공을 가하면 공거래를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 가해진 대지의 공격은 단순히 손해를 보는 정도에서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왼발을 뒤쪽으로 옮겨 대지와 작은 거리를 벌리고, 오른손에 들린 칼로 대지의 얼굴을 향해 휘둘렀다. 만일 대지가 자신의 가슴에 일 장을 적중시킨다면, 그의 얼굴은 칼로 도려내질 것이다.
대지는 고개를 아래로 숙이며 앞으로 나온 고호명의 오른 허벅지를 호조(虎爪)로 긁고자 했다.
서둘러 오른쪽 다리를 뒤로 뺀 고호명은 공거래의 목을 쥐고 있던 왼손에 힘을 주며 아래로 내리찍으려 했다.
위에서 다가오는 공거래를 피하자니 잘못하면 그가 사망할 것 같고, 피하지 않고 그를 잡자니 고호명의 오른손에 쥐고 있는 칼이 너무 날카로웠다.
이 상황을 해결한 것은 대오였다. 대오는 석탁 쪽으로 다가오자마자 고호명의 얼굴을 향해 일 장을 내질렀다.
왼손에 힘을 넣으려는 절묘한 순간이었기에 고호명은 고개를 숙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왼손에 힘이 덜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대지는 위에서 다가오는 공거래의 몸을 오른손으로 감싸 안으며 왼손으로 고호명의 명치를 가격했다.
위에서는 얼굴을 향해, 아래에서는 명치를 향해 다가오는 공격에 고호명은 어쩔 수 없이 공거래를 붙잡고 있는 왼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그는 쥐고 있던 손에 약간의 내공을 모아 공거래의 천돌혈(天突穴)을 가격하였다.
천돌혈은 성대와 가장 가까운 곳으로, 이곳이 망가지면 말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상승 내공으로 절대 발전할 수 없는 혈도였다.
공거래는 갑자기 목이 꽉 막혀 오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온몸이 떨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기혈이 역행하는 느낌이 들었다. 혈도가 상한 것이다.
고호명은 지금 상황을 냉철하게 바라보려고 했다. 속에서는 불같은 화가 치밀었지만, 잘못하면 이곳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의 마음을 가다듬었다.
오른손에 들린 칼을 입구의 왼편에 서 있는 대명(大明)에게 던짐과 동시에 왼손으로 일섬사를 꺼내 들었다. 일섬사는 어두운 석실에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무기였다.
가늘어 눈에 잘 눈에 띄지 않는 일섬사를 입구 오른쪽에 있는 대각(大覺)을 향해 휘두른 것도 함께 이루어졌다.
대각이 얼굴 쪽으로 날아든 작은 기척을 느낀 것은 그의 왼쪽 눈에서 피가 흐를 때였다.
그가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뒤로 젖히는 순간, 고호명의 신영이 이미 입구에 다다랐다.
대명이 그를 향해 다가가려했을 때, 그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소리를 듣고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입구의 두 사람이 잠시 틈을 허용한 사이, 고호명은 석실을 서둘러 빠져나갔다.
그는 잠시 동안이지만 소림승들의 추격을 뿌리치고자 하는 생각에 바깥쪽 입구를 받치고 있던 석주를 무너뜨렸다.
쾅 소리와 함께 입구 위에 놓여 있던 석판이 계단을 향해 구르며 길목의 태반을 막아 버렸다.
“대사, 내 오늘 일은 잊지 않을 것이오. 반드시 이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고 말 것이오.”
고호명 그의 목소리가 작은 틈을 타고 석실 내부로 맴을 돌며 울려펴졌다.

* * *

무너진 석곽묘 안에는 신음하는 대각(大覺)과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왕수강의 외침으로 가득했다.
침통한 표정의 대지는 일단 사태를 수습하기로 마음먹었다.
“대명은 대각의 상처를 살펴보게. 그리고 대광은 입구를 뚫도록 하게나. 난 이 아이를, 대오는 하오문 사람의 상처를 돌봐 주게.”
대지는 이렇게 말을 하고는 서둘러 석탁에 묶여 있는 아이의 맥을 잡아 보았다.
피부를 만졌을 뿐인데도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큰일이구나. 열기가 너무 강하다. 이대로 둔다면 틀림없이 살지 못할 것인데. 일단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것이 우선이겠구나.’
대지는 가슴 부위의 혈도 몇 군데와 머리로 이어지는 염천과 선기혈을 점한 후, 왕수강의 광초혈과 인당혈을 가볍게 두들겼다.
그리고 가슴에 한 손을 대고 내공을 끌어올리며 아이가 정신을 차리기를 기다렸다.
왕수강의 혈도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너무 세찼다. 어린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왕수강의 모습을 본 대지는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직접 길을 열어 주어야겠다. 이 아이가 말을 하거나 지금처럼 움직인다면, 나조차 위험할 수 있는데, 일단 아혈만이라도 봉쇄해 두어 기가 새는 것을 막아야겠다.’
아이의 아혈을 막고 일단 몸을 휘감아 돌고 있는 열기를 서서히 단전으로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아이는 극심한 고통을 느끼는 듯 온몸을 뒤틀려고 하였다.
서둘러 아이의 견정과 곡지혈을 점하고는 가슴과 머리 쪽으로 치솟아 오르는 열기부터 끌어내리고자 했다.
‘이런! 혈도들이 이렇게 많이 상해 있다니? 이것은 또 무슨 기운인지?’
그가 명치 부근의 옥당과 잔중으로 내공을 이끄는 순간, 갑자기 아이의 여러 혈도들에서 이상한 기운들이 들고 일어섰다.
비록 그 힘은 열기에 비해 대단하지는 않지만, 마치 뜨거운 열기를 피해 도망치듯 그가 이끄는 대로 우선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괴이한 일이구나. 이미 기호지세이니, 이 기운을 축으로 해서 나머지 열기를 단전 속에 휘감아야겠다.’
쫓고 쫓기는 이들처럼 아이의 혈도에서 일어난 기운들은 서둘러 단전 속으로 숨어들어 갔다.
그 뒤를 무서운 기세로 열기가 파고들며 원을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아주 작던 원이 점점 커지면서 단전을 아우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성장기에 있는 아이였기에 그 단전의 모양이 온전한 성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크기도 모양도 작고 불완전한 상태인 왕수강의 단전은 대지에게 또 다른 불안감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솟구치는 왕수강의 체내의 기를 조절하는 대지의 이마로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지금 멈출 수조차 없는 상태에 다다른 것이다.
잠시 막아 두었던 왕수강의 견정과 곡지혈의 혈도가 풀린 것이 조금 전의 일이었다.
갑자기 팔을 휘두르려는 왕수강의 모습에 깜짝 놀란 대지는 순간 내기를 조절하는 것을 놓칠 뻔하기도 했다. 이렇게 쉽게 혈도가 풀릴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왕수강의 양손에서 또다시 처음 느꼈던 기운들이 단전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미 단전은 포화 상태인데, 새로운 기운들이 끊임없이 단전을 향해 쇄도하고 있는 것이다.
고통 때문이었을까?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아이의 눈이 떠졌다.
눈을 커다랗게 뜨며 소리를 지르려는 아이는 다만 입을 벙긋벙긋할 뿐이었다. 실수라도 하여 아이가 소리를 지른다면, 기들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왕수강의 온몸을 헤집고 다닐 기세였다.
‘아이야, 내 말이 들리느냐? 들린다면 눈을 한 번 깜박여 보거라.’
왕수강은 밀려 들어오는 고통 속에서 그의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음성에 대답하듯 눈을 깜박였다.
‘혹시 혈도에 대해 아느냐? 안다면 눈을 다시 한 번 깜박여 보거라.’
왕수강의 두 눈이 깜박이는 것을 본 대지는 큰 결심을 하였다. 일반적인 심법으로는 현재 왕수강의 체내에 담겨 있는 기운들을 아우를 수가 없었기에 역근경 상의 내용 일부를 전하기로 한 것이었다.
‘불립문자(不立文字)라. 지금 전하는 이 심법을 깨닫고 못 깨닫고는 네 스스로의 노력에 달렸구나. 난 다만 길을 열어 줄 뿐이다. 후일 네가 조금의 깨달음을 얻어 소림에 그 심득을 전하여 준다면, 내 바랄 것이 없겠구나.’
대지는 이 대조인 혜가 이래로 소림을 이끌어 갈 차기 장문인에게만 전해져 오는 역근경의 내공 구결을 조용히 읊조리며, 그 내공들이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지 왕수강의 체내에서 직접 구현해 주었다.
거칠고 사납던 기운들이 온몸을 휘돌면서 상처받는 혈도들을 다독거려 주었다. 단전에 머물지 못한 기운들은 서로 어울리면서 냇가를 이루었다가, 다시 흩어져 지류가 되었다.
흩어짐과 만남의 연속적인 행보는 왕수강의 생명에 새로운 활력을 되찾아 주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의 열기가 그 안에 잠겨 있었다. 분출되지 못한 기운들은 분명 그의 생명을 위협하는 잠재적 요소로 작용될 것이다.
그것을 걱정한 대지는 행공을 마치며 왕수강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린 시주, 온몸에 뜨거운 기운이 넘칠 때마다 반드시 내가 가르쳐 준 운기행공을 해야 하네. 뿐만 아니라 언제 어느 때이건 쉬지 말고 심법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도록 해야 하네. 이는 자네 생명이 달린 일이니, 내 말을 명심하게.”
눈을 감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왕수강에게 대지의 말은 자장가처럼 들렸다.
또 다른 생명의 싹은 그렇게 시작되었다.